매거진 임진전쟁

임진전쟁 11. 이순신의 백의종군

선조는 의병과 이순신이 빈역 할 것이라고 의심했다.

by 온기철 James Ohn


htm_201410171303437003720.jpg 중앙일보 백의종군 길

1592에 시작한 전쟁은 제2차 진주성 전투를 끝으로 일년여 만에 비교적 조용 해 졌다. 마치 한국전쟁 때

일년 여 만에 휴전회담이 시작 된 것처럼 400년전에도 그랬다. 조선을 제쳐 놓고 명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분할 하니 어쩌니 하며 종전 회담을 3년이나 계속 했다. 중공과 미국도 그랬다.


그 동안에 나라는 초토가 되었다. 농사를 지어야 할 남자들은 모두 전쟁에 동원 되었다. 죽어라고 일해서 수확을 해봐야 군량미로 빼앗겠다. 조선병사 뿐만아니라 명나라 병사 까지도 먹여 살려야 했다. 일본군에게 약탈 까지 당 했으니 먹을 것이 있을리가 없었다. 가꾸지 않는 농토는 황폐화 되었다. 거기다 전염병 까지 돌았다. 굶어 죽는 사람, 병에 걸려 죽는 사람, 전사하는 사람 등등 아비규환이었다.


백성들이 사람을 잡아 먹었다는 기록이 여기 저기 나온다. 징비록, 명나라 기록, 조선 왕실 기록등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백성들이 풀과 나무껍질을 먹고 살아서 산에 풀이 없고 껍질이 성한 나무가 없었다고 한다.

이순신도 군량미 부족으로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해서 고민 했다. 거기다가 전염병으로 병사들이 죽어 나갔으나 병력 보충에 애를 먹었다. 이순신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고생 했다. 이순신은 병영 안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상거래를 허락 하여 식량 문제를 해결 하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병영 주위로 모여들어서 안전하게 살려고 했다.


그러나 왕과 조정의 행태는 백성들의 아픔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조는 이순신과 의병이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까 두려워 하여 이들이 얼마나 국가의 안보에 중요한 가는 다음 문제였다. 신하들은 나라의 장래나 정의로운 논공행상 보다는 왕의 비위를 맞추어서 당파의 이득을 추구 하려고 했다.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선조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선조를 매우 불안 하게 했다. 한양에서 출발 할 때 100여명의 수행원이 다 도망가고 30명으로 줄었다. 많은 노비 출신의 백성들이 일본군에 합류 했다. 임해군괴 순화군이 명나라로 도망가려 하자 조선사람이 이들을 잡아서 가토에게 넘겨 주었다. 이렇게 선조는 국민의 신망을 잃어 가고 있는 반면에 이순신의 인기는 날이 갈 수록 높아 지고 있었다.


의병의 선전


농민인지 군인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로 오합지졸이었던 관군이 연전 연패 하고 있는 가운 데 의병이 방방곡곡에서 일어 났다. 조선사람들은 일본에서는 번주(영주)만 굴복 시키면 새로운 정복자에게 절대 복종했던 일본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성의 장이었던 목사가 도주 해도 백성들은 의병으로 저항 했다.


백성들은 의병장에 복속되어 싸우거나 관군에 자발적으로 지원 했고 의병과 관군은 힙을 합쳐서 싸웠다.

일본군이 함락한 성들을 수복하는 현상이 벌어 졌다. 훈령원 부봉사 권응수정대임은 현지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영천을 되 찾았다. 1592년 9월에는 경상좌병사 박진은 권응수를 도와 주고 군사 1만명을 동원하여 경주성탈환 했다.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는 경주성 탈환에 큰 역활을 했다. 굉음을 내며 성안으로 닐라 들어간 포탄은 축구 볼처럼 땅에 굴러 다녔다. 일본군이 영문을 모르고 탄환주위에 몰려 들어 이리 저리 굴려 보다가

갑자기 폭발하여 수 많은 파편이 주위 일본군을 피격 했다. 일본군 병사들은 혼비백산 했다.


곽제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전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항상 붉은 옷을 입어서 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개릴라전과 관군 주도의 정규전에도 참여 했다. 의령, 삼가, 합천, 창녕, 영산의 일본군을 섬멸 했다. 전라도에서는 고경명, 김천일이 충청도에서는 조헌이 활동 했다. 스님들도 의병을 일으켰는 데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이 유명하다. 의병장에 대한 백성들의 선망은 점점 올라가는 반변에 선조에 대한 지지는 취약해져 갔다.


이몽학의 난


이몽학은 서얼 출신 이었다. 양반 첩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서얼은 정실의 아들 처럼 양반의 특권을 행사 할 수 없어서 항상 불만에 차 있는 계급이 었다. 1596년 7월, 그는 불만에 찬 백성들을 선동 하여 충청도에서 난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몇개의 고을(현)을 함락하는 기염을 토했으나 홍주목사 홍가신의 계략에 걸려 난은 진압되고 이몽학은 부하들에 의해서 살해 되었다.


이몽학의 난으로 선조의 의병에 대한 의심은 더욱 짙어 졌다. 이몽학은 “충용장 김덕령과 의병장 곽제우, 홍계남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도우며, 병조판서 이덕형이 내응 한다” 라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선조는 진실을 파악하여 처벌하기 보다는 이를 꼬투리 잡아서 의병장들을 제거 하려고 한다. 곽제우와 홍계남은 살아 남았지만 김덕령은 처형 되었다. 이덕형은 석고대죄 끝에 사면 되었다.


김덕령은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 켰다. 그는 유학자 이면서 무예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는 휴전 상태여서 괄목 할 만한 공은 세우지 못 했다. 도원수 권율은 그에게 경상도에서 왜군의 민간 약탈이 심해지자 김덕령에게 이들 토벌에 참여 해줄 것을 요청하여 전라도 의병이었지만 경상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무렵의 의병은 단순한 민간인으로 조직된 군대라기 보다는 관군과 조정의 관리를 어느 정도 받는 국가의

군대 였던 것으로 추정 된다. 곽재우, 김덕령등도 도원수 권율과 긴밀한 협조하에 움직 였다. 이와같이 전쟁초기에 오합지졸이었던 조선 육군은 전쟁 일년여 후에는 전투에 능숙한 군대로 성장 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관군보다 의병이 더 우세한 현상이 발생 했다. 왕과 조정은 이들의 반란을 경계 했다.


선조의 원균 비호


백성의 인기가 날이 갈 수록 높아가고 휘하에 강력한 수군을 둔 이순신 또한 소심한 선조에게는 두려운 상대였다. 선조는 원균을 부추겨서 이순신을 내칠려고 시도 했다.


1592년 4월 일본군대는 배를 타고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성을 함락하고 육지로 진격 했다. 만약 수군이 바다에서 이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면 육지에서의 전투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조선은 남해의 수군을

경상도와 전라도로 나누고 한양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기준으로 좌우로 갈라서 편성 했다. 경상 좌수사(부산)는 박홍, 경상 우수사(거제도 가배량)는 원균, 전라 좌수사는 이순신(여수), 전라 우수사(해남)는 이억기 였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일본수군 함대가 구름떼 처럼 몰려 오자 기가 질려, 가지고 있던 판옥선 40척에 구멍을 내서 침몰시키고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고 육지로 도망쳤다. 동래성으로 들어가 송상현과 합류 했으나 몰려오는 일본군을 보고 다시 도주하여 북으로 피난가는 선조를 찾아 갔다. 선조는 그를 자위대장으로 임명하여 임진강 전투를 지휘 했으 나 패배 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거제도 가배포에 군선 73척을 가지고 있었다. 원균은 부산 가는 길에 있는 가덕도로 향 했다. 도중에 까맑해 바다를 뒤덮고 있는 일본군선을 보고 즉각 퇴각 했다. 여러 장수들도 도망 쳤다. 원균은 대부분의 전선을 침몰 시키고 몇명의 충복을 데리고 곤양으로 도망 쳤다. 옥포 만호 이운룡 등이 싸우지 않으려는 원균의 태도는 부당하다고 지적하며 호남 수군에게 구원을 청하라고 충고 했다. 부하 이영남

싸우지 않으면 나중에 문책 당할 우려가 있으니 이순신에게 원군을 청하여 싸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자

원균은 마지 못해서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 했다.


명령 체계 상 이순신 마음대로 임지를 벗어나서 다른 지역에 군을 파견 할 수 없었다.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원균을 도우라는 명령이 떨어 져야 했기 때문에 조금 지체 되었지만 결국 1592년5월4일 이순신은 전선24척과 협선 15척으로 경상 우수영 지역으로 출정 했다. 원균은 전선 4척과 협선 2척을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과 원균은 도합 전선 28척과 협선17척을 가지고 옥포 해전에서 승리 했다. 원균은 전투 자체 보다는 전과 올리는 데 지나치게 열을 올려 이순신이 좋아하지 않았다.


옥포해전에서 승리한 공으로 이순신은 자헌대부, 원균은 한등급 아래인 가선대부가 되었다. 이순신과 원균은 한산대첩 때 까지 여러 해전에서 같이 싸웠다. 한산대첩 후 이순신이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어 원균 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자 둘 사이는 극히 나빠 졌다. 이순신은 남인인 유성룡, 권율과 친했고 동인 출신인 이원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원래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길라졌으나 동인 이었던 이산해는 원균 편이었다. 원균의 5촌 친척이었던 윤두수는 원균 편이었다. 북인들도 원균을 치켜 세웠다.


원균은 12살 밖에 되지 않은 첩 아들 원사웅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조정에 보고 하자 이순신이 사실이 아니라고 장계를 올 렸다. 이 후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악화되었다.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은 모두 버리라”는 교시 까지 내린 지경이었다. 소문이 자자 하여 일본군도 알게 되었다. 급기야 선조는 진상 조사를 명 했다.


선조는 원균을 충청병사로 임명 했다. 그리고 원균을 띠우고 이순신을 평가 절하 하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기 시작 했다. 충청병사 원균의 실정을 비판하는 장계가 올라오는 데도 왕은 원균을 높이 평가 했다. 조정의 분위기도 이순신을 좋지 않게 보는 방향으로 흘러 간다. 유성룡 까지도 왕의 의견에 동조 하기 시작 했다. 선조가 왜 그랬는지 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백성들이 크게 존경하지 않는 원균을 띠우고 신망이 높은 이순신을 깍아 내리면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존망이 돋 보이기 때문이 아니었을 까 짐작 해 본다.


이중간쳡 요시라의 간계


고니시 유키나와(소서행장)과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은 앙숙 이었다. 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게 잘 보일려고 극심한 경쟁을 했다. 고니시는 부하 요시라경상 우병사 김응서와 접촉하게 했다. 그는 조선말을 능숙하게 했고 조선 편인것 처럼 행동하여 김응서의 신임을 얻었다. 조선 측에서는 그에게 첨지등의 직함 까지 주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중 간첩이었다.


일본의 재침이 임박한 어느 날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말한다. “고니시 유키나와 님은 강화가 깨진 것은 가토 라고 하시며 그를 죽이고 싶다고 분개 하십니다. 그가 곧 쳐들어 올 터인 데 제가 날짜와 장소를 일러 줄 터이니 조선 수병이 그를 즉각 공격 하면 승리 할 것 입니다” 라고 은밀히 알려 주었다. 김응서는 즉각 이 정보를 조정에 알려 주었다. 물론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나아가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 했다.


이순신은 일본 측의 함정이라고 의심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눈치 챈 원균은 조선 수군이 거제도 영등포를 출발하여 가덕도와 절영도(부산) 방면으로 나아가 가토에게 조선수군의 위용을 보이면 일본으로 퇴각 할 것이라는 소지의 상소문을 올렸다.


백의종군


이때 윤두수가 선조에게 이순신을 파직 시키자고 아뢰었다. 1597년 2월6일 선조는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다음 인수인계가 끝나면 이순신을 체포하여 압송 하라고 명령 하였다. 이순신은3월4일 의금부에 구금 되었다. 선조는 이순신이 임금의 명령을 거역한 반역죄를 지었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며 자세한 죄상을 밝히기 위해한 국문을 명 했다.


선조는 성균관 사성 남이신을 현지에 보내서 이순신에 대한 민심을 조사 했다. 전라도 주민과 군사는 이순신의 억울 함을 호소 했다. 그러나 남이신은 가토가 7일이나 가덕도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순신이 놓쳐 버렸다고 보고 했다.


많은 조정 대신들은 이순신을 처형 하자고 주장 했으 나 정착이원익의 간청으로 백의종군이 결정 되었다.


효자 이순신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 하다.


1593년 5월, 이순신은 충청도 아산에 사시는 어머니 변씨를 전라 좌수영(여수) 근처 고음천에 이사하게 하여 보살 폈다. 어머니는 당시에 79세였다. 아버지 이정이 그리 똑똑한 분이 아니어서 과단성 있는 어머니가 기울어져 가는 집안을 일으켰다 고 한다. 이순신은 어머니를 하늘과 같다고 할 정도로 존경 했고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자랄 때도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597년 4월1일 구사일생으로 출옥 되어 백의종군 을 하기 위해서 경상도 합천으로 향 했다. 합천에는 도원수부가 있었고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휘하에 아무 보직 없이 배속 되었다. *백의종군은 일종의 보직해임이지

장군이 졸지에 졸병이나 평민으로 강등 되는 형벌이 아니다.


옥문을 나서던 날의 심정을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옥문 밖으로 나왔다. 울적한 마음 한층 이기기 어렵다.”라고 기록했다고 한다. 83세이신 장군의 어머니는 아들의 출옥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고향 아산으로 향했다. 배는 법성포에서 6일 간 표류 하다가 구조 되어 태안의 안흥량 까지 왔다. 그러나 장군의 어머니는 풍랑에 못 견디고 사망 했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모르고 이순신은 이미 아산의 해안포 에서 어머니를 마중나와 있었다. 장군은 그날의 심정을 난중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한다. 정유 1597년 4월12일 맑음. “일찍 식사후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나갔다. …. 얼마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부고를 전 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며 슬퍼 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 하였다…” 4월19일 이순신은 어머니의 상도 치르지 못하고 재촉하는 금부도사와 함께 백의종군의 길을 떠나야 했다. 이순신은 그날의 애절한 마음을 난중일기에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 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느니 만 못 하다” 라고 적었다 고 한다.


이순신은 경상도 합천에서 도원수 권율 감시하에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1597년6월2일에 시작된 백의종군은 7월15일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사하자 이순신이 삼도 수군통제사로 보직이 복권 된 7월18일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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