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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Mar 16. 2022

임진전쟁 12. 정유재란 직전 정국

도요토미의 마지막 발악


동아일보: 명나라 종군 화가가 그린 순천 왜성 전투

“다 죽여라, 다 태워라, 다 훔처라!” 난징 대학살을 감행한 일본 병사들이 받은 명령 이었다. 삼 “다” 정책

이었다. (3 all policy: Kill all, Burn all, Loot all)


난징대학살이 일어나기 340년전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똑 같은 임무을 일본병사들에게 주었다. 피해자는 중국사람대신 조선사람 이었다. 조선사람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죽여서 그 증표로 코를 베어 본국에 보내면 그 숫자에 따라 상을 내렸다. 도공들을 잡아 갔다. 수많은 조선 사람을 나포하여 노예로 팔 았다. 마을에 방화하여 잿더미로 만들 었다.  


일본은 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는 조선과 명나라와 달랐다. 전 국토가 번으 갈라져 있었다. 번은 한국의 도와 비슷하지만 독립성이 훨씬 강했다. 번은 다이묘가 다스렸다.  한국의 도지사 격이다. 그러나 다이묘는 도지사와는 달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군대가 있었고 번 주민에게는 조선의 왕에 해당 하는 무서운 존재 였다. 도요토미는 다이묘를 대표하는 쇼군(관백)이었다. 외국과의 전쟁을 하려면 다이묘들을 설득해서 그들의 군대를 동원 해야 했다. 왕처럼 단순한 명령으로 통하지 않았다. 


1592년 도요도미는 조선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장수(다이묘)들에게 점령지를 나누어 줄것을 약속 했다. 그리고 조선 백성들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다. 그들은 앞으로 자신이 다스릴 점령지 백성들에게 잘 대해 주었다. 그러나 1597년 정유년에는 보이는 대로 죽이고 방화하라는 명령이 하달 되었다. 도요토미는 조선을 초토화 시키서 조선을 굴복 시키려는 심산이었다. 임진년에 점령하지 못 했던 전라도가 중요한 목표 였다. 


전쟁 발발 약 일년 후 일본은 한양을 내주고  부산, 울산 지역에 후퇴히여 왜성을 건설하고 칩거 하고 있었다.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정전 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 갈 무렵인 1596년에는 일부 병력은 귀국하고  남은 병력은 고작 4만명 정도 였다.  

 

1596년9월에 명나라 사신이 도요토미에게 가지고 온 문서는 기대했던 항복문서가 아니고 책봉문서 였다. 

그는 크게 분노 했다. 도요토미는 자신을 지지하는 다이묘들을 설득하여 전쟁에 그들의 군대를  동원 했다. 전쟁을 반대 했던 그의 라이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은 그가 실패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아무 명분 없이 철군 하면 전쟁에 참여했던 다이묘(영주)와 사무라이들이 반발 할 것이고 반전 파의 도전도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도요토미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도요토미는 적당한 명분을 찾아야 했다. 그는 1596년 9월 부터 1597년 6월 까지 약 10개월 동안 당사국 조선과 직접 협상을 벌렸다.  


조선에게 왕자를 일본으로 보내면 철군 하겠다고 제의 했다. 조선이 이를 거절 하자 대신 한명이면 족 하다고 했다. 일본군은 한양을 떠날 때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서 왕의 시신을 능멸했다. 국토를 초토화하고 진주성 전투에서 무자비힌 살상를 감행한 것도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왕능을 능멸한 행위는 도저히 용서 할 수 없 었다.  조선은 도요토미의 요구를 물론 거절 했고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과 사과를 요구 했다.  


명과 일본이 거짓 협상을 하는 동안 이여송과 명나라 원군은 모두 철수 하고 유정과 왕필적이 지휘하는 약 1만의 병력이 팔거(대구 북구)에 주둔 하고 있었다. 요동으로 철수한 이여송은 북방민족 토벌 작전 중 정찰을 나갔다가 전사 했다. 


한편 조선은 군사 제도를 개편하고 의병을 관군에 편임시키는 등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한 군사력을 재정비 했다. 1596년6월 협상이 사기극으로 들어난 이후 조선은 즉각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 했다. 

조선이 도요토미와의 협상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도 명나라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당시에 명나라는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 까? 중국 역사기록을 보면  한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조선과 명의 관계 와는 사뭇 다르다. 한국 사람들이 조선의 독립성에 사실보다 훨씬 많은 점수를 주고 있지 않는 가 하는 의심이 가게 한다. . 


2일 중국 사신이 조신(평조신; 야나가와 시게요시)과 사람을 물리치고 회담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사신이 ‘조선은 우리 천조의 속국이다. 조선이 어떤일이 있으면 우리가 문죄 할 것이며, 만약 복종하지 않으면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 할 것이다. 언제 너희 일본에게 이처럼 강포하게 공격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는 가, 옳지 못한 도리이다.’ 하였다. (실록, 김영준 병법사 유튜브) 


명나라 만력제는 조선의 원군 요청에 마치 자기나라 일 처럼 적극적으로 파병준비를 지시 했다. 만력제의 근무 태만으로 환관이 정무를 보면서 부패가 극심 했고 보바이의 난과 임진왜란으로 국가재정이 어려운 상황이었으 나 만력제는 명분과 도리를 앞세워 조선을 도왔다. 


1597년5월 명장수 마귀는 선발대 17,000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 했다. 명원군 본부대는 형개가 약3만7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 왔다. 병력 규모는 작지만 아주 비교적 신속한 파병이었다. 

그리고 12월 부터 왜성의 일본군은 서서히 증강 되고 있었다. 1597년1월 가토 기요사마의 선봉대는 이미 울산 서생포에 도착 해 있었다. 그러나 전면적인 공격은 이순신이 파면되고 원균이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후인 1597년7월에 시작 되었다.  


이순신이 경상도 합천에 있는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 하고 있고 원균이 삼도 수군 통제사로 부임하여 한산도에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1597년7월7일(음력) 가토 기요사마는 14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또 한번 침략 하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조선 수군을 재압하여 수로를 확보하고 서해를 돌아 한양으로 수송이 가능 하게 함과 동시에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량문제를 해결 하려는 작전 이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운주당을 짓고 거처 하면서 장수들과 전술을 논의 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건물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술잔치를 벌렸다. 고주망태가 된 원균은 장수들이 보고를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건의도 묵살 해 버렸다.  급기야  장수들은 건의는 커녕 아예 보고도 하지 않았고 명령을 해도 잘 듣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고 그동안 전화에서 제외 되었던 

전라도가 초토화 되었다.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등용 하게 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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