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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Mar 30. 2022

임진전쟁 13. 칠천량 해전과 이순신  수군 재건

원균 곤장을 맞다.

원균의 초상 오마이뉴스


 경상 좌수사 원균과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개전 초기에 같이 싸웠다.  해전을 거듭하면서 이순신과 원균의 사이는 점점 나빠 졌다. 이순신은 원균이 자신의 공적을 과장 하여 보고 하는 것을 무척 싫어 했다. 이순신과 원균의 나쁜 사이는 동인과 서인의 싸움으로 번졌다. 이순신을 경외 했던 선조는 원균 비호 파의 손을 들어 주어 이순신을 파면(백의 종군) 했다. 


이순신이 물러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곳에는 전라 우수사 이억기, 경상 우수사 배설, 충청 수사 최호가 도합 2백척에 가까운 전함을 가지고 한산도에 집결하고 있었다. 한산도의 운주당은 이순신이 참모들과 작전을 상의 하던 건물이었다. 말하자면 해군 작전실이었다. 원균은 이 건물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매일 술 파티를 즐겼다. 부하 장수들과 전투에 대한 소통이 전혀 없었다. 건의도 보고도 모두 무시 했다. 


1597년 1월 부터 일본군은 배를 타고 부산과 울산 왜성에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거제도 동쪽은 일본군이 이미 성륙하여 점령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 군의 보급선과 군함의 왕래도 빈번 했다. 거제도 서쪽에는 칠천도가 있고 칠천도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 가면 한산도 이다.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바다를 칠천량이라고 하고 칠천량을 지나서 남쪽으로 가면 한산도이다. 


비변사는 요지음의 국가안전위원회(NSC) 또는 비상시 최고기관에 해당 한다. 비변사는 원균에게 남해 상에 지나가는 일본 배를 자주 나아가 습격하고 빠지라는 작전명령을 내린다. 일본군의 보급로를 방해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원균은 매일 술만 마시고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는 육지의 일본군을 지상군이 공격하고 수군은 바다에서 공격 하자는 수륙 양면 작전을 주장 했다. 사실상 부산포와 울산에 일본군이 집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뿔리 조선 수군이 부산에 있는 일본수군을 공격하려 다가 수륙 양면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도원수 권율도 원균의 수륙양면 작전에 반대 했다. 


권율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다.



나무위키

비변사와 도원수 권율의 압력에 원균은 1597년 6월18일 전선 100여척을 이끌고 부산포로 향 했다. 가는 길에 안골포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려 적선 2척을 나포 했지만 보성 군수 안흥국이 전사 하는 등 일본군의 반격에 못이겨 한산도로 돌아 왔다. 


7월7일 원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배설, 충청 수사 최호 과 함께 전선 169척을 이끌고 총출동 하여 부산포 근처 다대포에 정박 했다. 7월8일 일본전함과 첫교전에서 적함 8척을 침몰 시켰다. 다음날 서생포(울산 남쪽)에서 일본 수군이 반격 했다. 아군 판옥선 20척을 잃었다.  임란 발발 이후 조선 수군 최대의 피해 였다. 


원균은 겁을 먹고 후퇴하기 시작 했다. 이를 보고 받은  도원수 권율은 7월11일 원균을 곤양으로 소환하여 곤장을 쳤다. 7월14일 화가 난 원균은 부산포 앞바다로 다시 진출 했다. 가는 도중 일본군 수송선단을 발견 했다. 도망가는 일본 선박을 추격 했다. 풍랑이 심 했다. 판옥선은 방향을 잃고 표류 했다. 12척이 파도에 밀려 실종 되었다. 5척은 도모포에 7척은 서생포에 표류하여 일본군에게 전멸 했다. 


원균은 전군 퇴각을 명 했다. 병사들은 하루 종일 높은 파도에 시달리며 노를 저어야 했다. 멀미 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마실 물도 부족 했다. 가덕도에 도착 했다. 병사들이 우루루 우믈을 향해서 달려 갔다. 숨어 있던

일본군이 기습했다. 400명이 전멸 했다. 원균은 자기 부하들이 도륙 당하는 것을 멍청히 보고 만 있었다. 


7월15일 원균은 거제도 동북쪽 영등포에 정박하려 했다. 비바람이 심해서 정박 할 수기 없었다. 칠천량으로 

옮겼다. 칠천도와 거제도 사이의 아주 좁은 해엽이었다. 풍랑은 피 할 수 있었으 나 함포 사격으로 해전을 치루는 조선 헤군에게는 불리하고 육박전에 능한 일본군에게 유리한 지역 이었다.  


조선수군의 이동경로를 추적 하던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일전을 할 좋은 위치라고 판단 하고 전 병력을 칠천량으로 집결 시켰다.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수군과 고니시 유키니가의 육군이 주력 부대 였다. 


 조선수군은 지쳐 빠져서 코를 골고 자고 있었다. 적선 접근에 대비해서 망보는 병사도 없었다.  적군의 함포 소리에 조선 수군 은 혼비백산 했다. 7월15일 밤 열시 조선 수군 군량선에 불이 났다. 7월16일 새벽 4시 일본수군의 기습 공격이 시작 되었다. 무려 1000척의 일본 전선이 투입 되었다. 일본 배들은 조선 수군이 자고 있는 동안에 조선 전함 사이사이로 들어와 있었다. 공격 명령이 떨어 지자 판옥선 위로 뛰어 들어 백병전을 별렸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도 자신의 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 했다. 원균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에게 한산도 지휘부로 퇴각 할 것을  건의 했다. 그러나 원균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한산도로 미리 퇴각하여 군량미를 모두 태우고 서쪽으로 향 했다. 그가 구한 12척은 명량 해전의 주력 함대가 되었다. 원균과 지휘부는 진해만으로 향 했다. 원균은 고성현 춘원포에 도착하여 나무 밑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앉아 있었다. 그를 발견한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설이 구한 12척을 제외한 조선 수군의 전선은 모무 불에 타서 침몰 했다. 


이순신 조선수군 재건에 나서다.



daum 뉴스

조선 수군을 제압한 일본군은 전쟁 초기 부터의 숙원 이었던 호남 공략에 나섰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섬진강을 따라 남원으로 향 했다. 호남의 도성 전주가 목표 였다. 


1597년7월18일 이순신은 옛 부하들로 부터 패전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끼던 부하 장수 들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도 전사 했다고 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뼈를 깍는 노력으로 준비했던 전함이 모두 침몰 했다고 했다. 이순신은 통곡 했다. 원균을 재촉하여 출전하게 했던 권율은 무척 당황 했다. 이제 믿을 만한 사람은 이순신 밖에 없었다. 권율이 이순신을 찾아 왔다. 난감해 하는 권율을 보고 이순신이  자진 해서 해안 지역에 가서 상황을 직접 보고 사태를 수습해 보겠다고 나섰다. 권율은 무척 기뻐 했다. 그는 즉각 선조에게 이순신의 복권을 건의 했다.


이순신은 측근 10여명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당시에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이 감시하고 있어서 조선군 지휘본부가 있던 합천에 이순신도 종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그의 7월21일 자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맑다. ..곤양군에 이르렀더니 군수 이천주도 고을에 있고 백성들도 고을에 많이 남아 있어서 ... 벼를 거두기도 하고 밀 보리 밭을 갈기도 하였다. 점심을 먹고 노량에 이르었 더니 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거제도) 만호

조계종등 10여명이 와서 통곡 하였다. 또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경상 수사는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찾아 왔기에 패했던 상황에 대하여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라나고 여러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지경에 이르었 습니다."고 하였다. 또한 대장의 잘못은 말로 다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 들 하였다. 거제의 배위에서 자면서 거제 현령과 새벽2시 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도 눈을 부치지 못하여 눈병을 얻었다. *경상수사는 배설 이다. 


조선 수군은 모두 패전의 원인을 원균의 잘못으로 지적 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는 도원수와 하늘의 잘못으로 치부 한다. 1597년 7월22일 선조 실록은 선조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상(감)이 말하기를 "한산을 고수 하여 호랑이가 버티고 있는 형세를 만들어야 했었 는데 출병을 독촉 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할일이 아니라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

이번일은 도원수 권율이 독촉 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패배가 있었 든 것이다. 


1597년8월3일 이순신은 진주 수곡에서 삼도수군통제사제수를 받는 다. 말하자면 해군참모총장 임명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에게 종2품을 주지 않고 정3품을 준다. 삼군수군통제사가 될려면 종2품이어야 하는 데 그보다 못한 정3품을 내린 것이다. 휘하 장수들이 종3품이어서 통솔하는 데 지장이 있을 수 있는 계급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개의치 않았다. 


이순신은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다. 그리고 전라도 해남 쪽으로 향 했다. 조선 수군이 전라도 쪽으로 도망 했기 때문에 그들을 수습 하기 위해서 였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 직후 배설을 만나서 그가 구한 12척의 판옥선이 해남 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한 일본 수군이 서쪽으로 이동 할 것은 자명 했다. 

이순신은 일본 전함이 서해를 돌아 한양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 해야 했다. 


구례에 도착하여 현감 이원춘과 전력을 논의 하고 수군 출정식을 가졌다. 곡성에 이르니 백성들이 통곡 하며 이순신을 맞이 했다. 여기서 거북선 돌격 대장 이기남을 맏났다. 이순신은 무척 반가워 했다. 이 무렵에는 고니시가 섬진강을 따라 남원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고니시는 이순신이 이동하고 있는 것을 몰랐다. 


이순신은 많은 군량미를 기대하고 순천으로 향 했다. 그러나 순천은 이미 주민들이 모두 떠나고 텅텅 비어 있었다.  혜희 승병장을 만나서 승병들이 이순신과 합류 했다. 보성에 도착 했다. 천만 다행이었다. 많은 군량미가 비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옛 장수 였던 정운, 송희정, 최다성, 안위, 이몽구와 회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기쁨도 잠간이었다. 선전관이 도착 했다. 선조가 내린 교지는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합류 하라 는 내용이었다. 화가 머리 끝 가지 치밀 었다. 필사적으로 수군을 다시 만들어 일본수군이 한양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인간 힘을 다하고 있는 데 수군을 포기 하라니 한심한 상감 이었다. 화를 누루고 이순신은 붓을 들었다. 이순신은 죽을 각오를 하고 상소 한다. 


"신에게는 전선 12척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워 야만 오히려 막아 낼 수 있 습니다.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령한 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저들이 감히 업수이 여기지 못할 것 입니다. "


임금의 명령에 대한 불복 이었다. 다행히 선조는 이순신을 처벌 하지 않았다. 8월17일 이순신은 장흥 군영 구미에 이른다. 여기서 배설을 만나 그가 가지고 있는 판옥선12척이 있는 회령포로 안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설은 뱃 멀미를 핑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순신은 직접 회령포로 가서 12척을 찾았다. 이순신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 처럼 기뻐 했다. *배설은 칠천량 해전 직후 이순신을 만났다.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과 경상 우수사의 만남이었다. 배설은 이순신에게 불손 했다. 명량 해전에서 탈령한 배설은 정유재란 일년 후 잡혀서 처형 되었다. 


8월24일에서 8월28일, 이순신은 해남 어란진에 도착 했다. 이곳에서 일본 전함과 소규모의 해전이 있었다. 이순신은 별로 어렵지 않게 이들을 물리 쳤다. 8월29일 이순신은 진도 벽파전에 진을 친다. 이곳에서도 일본수군의 공격을 받았으 나 쉽게 격퇴 할 수 있었다. 김억추가 판옥선 1척을 대동하고 합류 했다. 이순신은 9월14일 명량 해전 직전 까지 판옥선 13척을 가지고 이곳에 진을 치고 일본수군을 울돌목으로 유인 했다. 그리고 세기의 일전 명량 해전이 벌어 진다. 


참고: 1. 유튜브: 황현필, 임진왜란 53

         2. 나무위키 칠천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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