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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Apr 22. 2022

임진전쟁14. 명량 해전

13대 133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작전은 1592년이나 1597년이나 변함이 없었다. 400여년 후 한국전쟁 때 맥아터의 서울 수복 작전과도 같은 맥락에서 짜여 졌다고 볼 수 있다. 부산에서 서울을 가려면 경부 고속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 가장 편리 하다. 그래서 일본군과 미군은 같은 경로로 서울로 진격 했다. 수로로는 남해와 서해를 돌아 인천에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한양에 이를 수가 있다. 물론 맥아터는 인천 상륙 작전으로 육로로 서울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급소는 인천만이다.


도요토미는 조선수군을 제압하고 전라도에 상륙하여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 한 다음 한양으로 진격 하고 수군은 남해를 돌아 서해로 북상하여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한양에서 육군과 만나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일본수군은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을 1597년7월 칠천량 해전에서 거의 전멸 시켰다.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하는 데 성공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섬진강에 들어갈 수  있었다. 호남의 도성 전주를 점령 하기 위해서 남원으로 향 했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하자 선조는 이순신을 백의종군에서 풀어서 삼군 수군통제사로 임명 했다. 1597년 7월 20일 경 부터 이순신은 전멸 하다 싶이 한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 했다. 이순신은 단10여명을 데리고 조선군 지휘본부가 있던 경상도 합천에서 도원수 권율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전라도 쪽으로 향 했다. 전라도 보성에서 군량미를 확보하고 많은 장수들이 합류 했다.  뿔뿔이 흣터졌던 장졸들과 자원병들이 모여들었다. 


8월17일 이순신은 장흥군영 구미에서 배설을 만나서 그가 구해낸 12척의 판옥선이 있는 회령포로 인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설은 뱃멀미를 핑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순신은 혼자 회령포로 가서 12척의 배를 찾았다. 


8월24일 12척의 배를 가지고 해남 어란진에 진을 쳤다. 일본수군의 공격을 받았으 나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 8월29일 진도 벽파진에 진을 쳤다. 이곳에서도 일본 수군이 공격 했으나 큰 피해 없이 격퇴 했다. 김억추가 판옥선 1척을 가지고 합류 했다. 이순신은 도합 13척을 가지고 서해로 진출 하려는 일본수군을 저지할 준비를 시작 했다. 


서울 타임스: 지도로 그려보는 명량 해전


1597년9월15일. 이순신은 13척의 조선 함대를 진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이동 했다. 일본 군선이 울돌목을 빠져 나오기 전에 공격하기 위해서 였다. 지도에서 전라우수영이라고 표기된 지점은 해남 학동리이고 그 앞 쪽 섬은 양도 이다. 울돌목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의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명량해협이라고도 한다. 빠른 물살이 바닥에 있는 암초와 부디치면서 나는 소리가 마치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해서 부쳐진 이름이다. 길이는 약 1.5 키로, 폭은 좁은 곳이 300 미터에 불과 하다. 밀물 때는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한꺼번에 좁은 해협을 통과 하여 서해로 빠져 나간다. 자연히 물살이 매우 빠르다. 조류의 속도는 세계에서 5 번째라고 한다. 


이순신은 조류의 밀물과 썰물 시간을 철저히 조사하며 작전계획을 세웠다.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 하면서 정3품의 직위를 주었다. 요지음의 계급이다. 그러나 그의 부하 장수들 중에 수많은 정3품이 있었다. 백의종군 전에는 정 2품이었다. 통솔하기 쉽지 않은 명령 체계 였다. 설상가상으로 장병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모두다 조선 수군의 열세를 잘알 고 있었다. 겁에 질려 있는 장병들을 독려 해서 전투를 치루어야 했다. 판옥선 12척을 가지고 칠천량 해전에 참여 하지 않고 도주 했던 배설이 탈영 했다. 


이순신은 사대부들에게서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적셔 판옥선에 걸었다. 조총알이 배에 박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였다. (이순신 부하 오익창의 사호집, 2012년9월 발굴)- 위키백과에서


울돌목 가장 좁은 곳에 철쇄 를 설치 했다. 솨사슬에 철구를 달아 놓아 배가 부딛쳐서 침몰 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해남 어란포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 수군은 구루시마 미치후사, 도도 다카토라, 와키시카 야스하루, 가토 요사아카, 구키 요시타카가 지휘하는 200 척의 군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전라 우수영(해남 학동리)에 진을 치고 있는 13척의 조선 군선을 격파 하고 서해로 진입하여 한강으로 들어가서 한양에 도착 하여 일본 육군과 만날 계획이었다. 이순신이 좁고 조류가 빠른 울돌목으로 이들을 유인 한것 처럼 보인다. 일본 수군은 빠른 조류에 익숙 했기 때문에 울돌목 통과를 가볍게 생각 했다. 어란진과 벽파진에서 조선 수군이 13척에 불과 하다는 것을 알고 조선 수군을 얕 잡아 보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좁은 울돌목에 많는 군선이 한꺼번에 들어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적은 수의 군선을 가지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좁은 울돌목을 빠져나오는 몇 안되는  군선을 차례로 처리 할 수 있다고 생각 했다. 


9월15일 전투 전날 이순신은 장병을 모아 놓고 사기진작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훈시 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이는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 하여 조금도 용서 하지 않을 것이다."


겁을 먹고 도망치면 죽을 것이 분명 하지 만 나아가 싸우면 살 수가 있다는 말씀 이었다. 다음날 아침(음력9월16일), 이순신은 일본 군선이 울돌목에 들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즉각 13척의 군선을 이끌고 울돌목 북쪽 앞바다에 진을 쳤다. 일본군선 130척은 새벽 3-4시경에 어란진을 출발하여 7-8시 경에 울돌목에 진입 했다. 조류는 동남에서 서북쪽으로 흘러서 일본군선이 빠른 속도로 조선군선 쪽으로 진격 할 수 있었다.


울돌목 앞 쪽에 12척의 판옥선이 일자로 진을 치고 이순신이 탄 배(상선)가 울돌목 쪽으로 전진 했다. 일자로 선 판옥선 뒤 쪽에는 어선 백여척이 일자 두줄로 서서 조선군선이 실제보다 많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파란점). 일본군선은 좁은 울돌목 안에 일자로 선 5-10 척이 겹겹히 서서 조선군선 쪽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빨간 점).


일본군선이 울돌목을 뻐져 나오자 마자 이순신이 탄 상선의 함포는 불을 품었다. 일본 군선 3,4 척이 침몰 했다. 그러나 울돌목을 꽉 채운 일본군선을 본 조선 수군은 겁을 먹고 비실비실 뒤로 물러 났다. 이순신은 잠시물러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래도 다른 군선이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초요기를 올렸다. 이는 다른 장병들에게 진격하라는 신호이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참수 당한다.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 거제 현령 안위가 진격해 왔다. 안위의 배가 일본 군선에 포위되어 집중공격을 받았다.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용두가 적장선과 다른 두척의 배를 공격하여 모두 침몰 시켰다. 적장 구루시마 마치후사(마다시)가 바다에 빠졌다. 이순신은 물긷는 병사 김돌선을 시켜 구루시마를 배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즉시 토막내어 죽였다. 조선 수군의 사기는 충천 했다. 


겁이 없어진 조선 수군은 돌격 했다. 130척이지만 한번에 기껏해야 10척이 잎으로 나서는 적선을 13척의 판옥선은 함포와 당파 전술로 침몰 시켰다. 당파란 뱃 머리로 적선을 들이 받아 침몰 시키는 전술을 말한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거북선은 충격으로 적선을 침몰 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판옥선에 장치 되어 있는 대포는 일본 군선의 함포와 조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쏠 수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 지자 조류가 바뀌었다. 남에서 북으로 흐르던 조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기 시작 했다. 조선의 군선은 뻐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 가 일본 군선을 공격 했다. 일본 배들은 달려 드는 조선 배를 피해 도망 해야 하는 데  조류 때문에 뱃 머리를 돌려 야 했다. 그러나 좁은 올돌목은 많은 배들이 쉽게 돌아나가게 해주지 않았다. 일본 군선은 서로 부딛쳐서 침몰 했다. 


이때 이순신이 미리 설치 해 놓은 철쇄가 그 효능을 발휘 하기 시작 했다. 일본 군선은 이 철쇄에 걸려 침몰 했다. 수중 철쇄는 지금 진도 다리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 었다. 이는 당시 전라 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기록 한 현무 공실기에 철쇄 즉 "쇠사슬과 철구로 적선울 깨뜨렸다"란 기록에서 유래 했다 (위키백과). 조선 수군의 함포에 의해서 파괴된 배보다 철쇄에 걸리고 조류에 의해서 자멸 한 배가 더 많았다고 일본 문헌에 기록 되어 있다. 


전투는 오후 5시경에 끝났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통쾌한 승리 였다 일본 수군은 겨우 10척이 도망 했다. 123척이 침몰 했다. 조선 배는 한척도 침몰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또 한번 일본군이 서해를 돌아 한양에 들어 가는 것을 막았다. 도요토미의 패배 였다. 이순신과 조선수군의 가장 중요한 승리 였다. 13척의 배가 133척을 물리친 기적 같은 승리 였다. 


이순신은 9월16일 난중일기에 "적선30척을 깨부수자 적선들이 물러나 도망치니, 적선들이 다시는 접근하지 

못했다.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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