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지상군의 진격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했지만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은 호남을 향해서 진격 했다. 한편 이순신은 병력을 한곳에 머물게 하지 않고 서해안을 배회 하면서 일본 군선의 북진을 경계 했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호남을 공략 하려면 남원을 통과 해야 했다. 남원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남원이 함락 되면 호남의 도성 전주 공략이 용이 해 진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조선수군을 섬멸한 일본 수군은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지휘하에 사천에서 상륙하여 남원으로 향 했다. 일본 지상군 좌군은 총사령관 우키다 히에이에,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시마즈 요시하로, 하치스카 이에마사로 편성 되어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으로 진격했다. 구례근처에서 사천에 상륙하여 섬진강을 따라 올라오는 수군과 합류 했다. 도합 56,000 병력 이었다.
지상군 우군은 총사령관 모리 히데모토,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쵸소카베 모토치카 지휘하에 병력 73,700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서생포에서 출발 밀양 합천을 거처 황석산성으로 진격하여 전주를 공략 할 계획이었다. 정유재란에 투입된 전 병력 14만명이 호남을 점령하기 위해서 전주로 향하고 있었다.
주 조선 명군 총사령관 형개는 명나라 만력제에게 일본군을 남원에서 막아야 한다는 장계를 올렸다. 만력제는 요동에 있는 양원에게 기병 3천을 주어 남원에 보냈다.
남원에는 읍성과 교룡 산성이 있었다. 교룡산성은 해발518미터의 교룡산에 성을 만들어 비상시에 피난해서 외적과 싸우려는 목적에서 만든 성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평상시에는 읍성에서 정무를 보다가 외적이 침입 하면 산성으로 피난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도시들이 많았다. 1596년 임진전쟁(1592년)이 소강 상태 였던 시기에 승병장 처영이 관의 협조를 얻어 남원 주민을 동원하여 교룡산성을 보수 하고 양곡을 산성에 비축하고 주민들을 성안에 들어와 살게 했다. (*임진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간 후에는 관군과 의병의 차이가 모호 해진다. 의병장과 관이 협조하여 전쟁이 진행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산에는 물을 구하기가 힘든 단점이 있는 데 교룡산에는 우물이 많이 있어서 장기간 버티기에 비교적 쉬운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양원은 기병을 지휘하는 장수 였다. 산속으로 들어가면 말을 타고 싸우기가 어려워 진다. 조선 장수들이 읍성을 버리고 교룡산성에서 방어 할 것을 종용 했으나 양원은 이를 거절하고 교룡산성 병력을 읍성으로 이동 시키고 남원 읍성을 보수 하여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 했다.
양원은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의 장군 진우충에게 원군을 청 했다. 그는 겨우 2천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56,000 병력의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 기에는 어림도 없는 숫자였다. 물론 그는 양원의 요청을 거절 했다.
권율과 이원익은 남원 외곽에 약 1만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좌군과 우군사이에 끼인 형국이었다. 권율은 병력을 남원성 방어에 투입하지 않고 남쪽으로 후퇴 했다. 섯뿔리 남원성으로 들어가서 싸우다가 전병력을 손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남원성 안에는 주민 7천명과 명군 3천명 그리고 남원부사 임현, 예조참판 정기원등 관리 12명이 있었다. 1597년5월 군사 3천명을 이끌고 남원성에 들어온 양원은 성벽에 성가퀴(성위의 이빨 처럼 보이는 요철
형태의 낮은 담)를 올리고 성 주위에 참호를 파는 등 방어 준비를 시작 했다.
1597년8월7일 구례가 함락 되었다. 현감 이원춘이 남원에 들어왔다. 양원은 일본수군을 방어 하기 위해서 순천에 있는 전라병사 이복남에게 전병력을 이끌고 남원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8월9일 일본군은 둔산령을 넘어 남원읍 근처에 당도 했다. 이복남은 천여명의 병력과 함께 남원성으로 접근 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나팔과 태평소를 물고 북을 치면서 행진하게 했다. 성을 호위하고 있는 일본군 사이를 그대로 통과 했다. 일본군이 조선인 포로에게 "저사람은 누구이기에 저렇게 당돌 하냐?"고 물었다. 포로들은"전라 병사 이아무개이다"라고 대답 했다. 이렇게 이복남은 무사히 남원성 안으로 들어 갔다. ( 니무위키에서)
일본군은 8월13일 부터 4대문을 공격 하기 시작 했다. 주변의 민가와 절에서 재목을 뜯어와 사다리를 만들 었다. 초가 지붕의 집단으로 참호를 메웠다. 음력 8월보름은 추석이다. 달도 밝았다. 가을 추수 철이다. 흔한 것이 집단이었다. 일본군은 잡초와 벼를 베어 커다란 풀단을 만들어서 해자를 메웠다.
이날 저녁 고니시 유키나가와 양원이 만났다. 고니시가 성을 비우고 나가라고 요구 했다. 양원은 이를 거절 했다. *이때 양원이 고니시로 부터 "무사히 탈출 하게 해줄 것을 약속 받았다"는 설이 있다. 후에 명나라로 돌아간 양원은 남원성 전투에서 패배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 되었다.
8월16일 새벽 일본군이 성안으로 들어 왔다. 양원은 50명의 부하와 함께 무사히 남원성을 빠져 나갔다. *접반사 예조참판 정기원은 말을 탈줄 몰랐다. 양원을 따라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 했다. 성안에 남은 전라 병마사 이복남은 병사와 주민을 독려하여 싸웠으나 중과 부적이 었다. 이복남은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구례 현감 이원춘, 남원 부사 임현과 함께 화약창고를 불태워 자폭 했다. 병사들과 주민들 모두 일본군 손에 죽었다. 도합 일만여명이었다. 한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다고 한다. (*접반사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직책을 말하는 것으로 아마 양원을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 된다)
남원성 전투에 참여 했던 일본 장수 오오타 카즈요시는 규슈 우스키시의 성주 였다. 그의 군의관으로 종군 했던 승려 경렴(케이넨)은 당시의 참혹한 광경을 "조선일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안사람 남녀 할 것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자는 없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알수 없는 세상 살이, 모두 죽어서 살아지는 구나" 라고.
전주성 함락 까지 경렴의 기록을 살펴 보자.
8월6일: 들이나 산이나 성곽은 말할 것도 없이 모두 잿 더미가 되고 사람을 칼로 치고 쇠사슬로 엮은 대롱으로 묶어서 부모는 아들을 부르고 아들은 어버이를 찿는 데 아아, 불쌍 하구나. 처음 보는 광경이로다.
8월8일: 조선 아이들을 모두 사냥하듯 몰아 잡고 그들 부모는 칼로 처 죽여서 다시는 못 보게 한다. 그들의 비명과 한탄 소리는 마치 저승 사자의 꾸짖음 같네.
8월11일: 저녁 노을에 인가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은 모든 오곡과 재보가 불태워지고 재로 화한 것이니....재로 변한 그자리에서 하룻밤을 묵는 구나.
8월20일: 전주의 부증(성안)에 도착 하였다. 여기서 3일 남짓 머무르면서 경도에서 온 사신과 만나 인진을 상의 하고 다른 부대와 의논 하였는 데, 여하튼 서울로 진격 하게 되었다.
8월21일: 남원에서 부상자가 많아 여기저기서 약 달라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다. 왕진을 바라는 부상자가 너무 많다. 너무 딱하고 괴롭다. 저마다 고통에 겨워하는 부상자들로 기득하구나! 네 몸 하나임이 한 스럽네.
전주성을 방어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은 일본군이 전주에 당도 하기 전에 성을 버리고 도망 하였다. 일본군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호남의 도성 전주를 점령 하였다. 곡창 호남이 일본군 손에 떨어 졌다. 일본군은 임진년에 호남 점령 실패를 한 풀이 하듯 호남을 유린 했다.
토요토미는 침략군에게 철저한 파괴와 도살을 명 했다. 일본군이 가는 곳에 있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 도둑질을 했다. 눈에 보이는 조선 사람은 모조리 죽였다. 어린아이, 여자, 늙은이 도 가리지 않았다. 도요토미는 죽은자의 코를 항아리에 담아 소금에 절여 보내면 그 숫자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처음에는 죽은 자의 코를 베었지만 나중엔 산자의 코도 베어 본국에 보냈다. 토요토미는 코 영수증을 발급하여 코 접수를 확인해 주었다. 그후 전라도에는 코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구 남원역 뒤에는 민인의총 유지라는 팻말이 있다. 남원성 북분이 있던 자리 이다. 이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사 한 장소 이다. 전쟁이 끝나자 피난민들이 돌아와 시체를 수습하여 이곳에 한꺼번에 매장 했다.
"충렬사에 대한 역사를 약술하면 1597년 남원성 전투이후 광해 4년인 1612년(정유재란 15년후) 용성관 동편에 최초로 사우를 짓고 배향을 시작한다. 효종 4년인 1653년 충렬사라는 사액을 내려지고 숙종원년에는 (1675년) 동충동 362번지로 이건했고 고종5년인 1868년에서 고종 8년인 1871년 사이에 사우훼철령에 의해 철폐된다. 그러나 고종 16년인 1879년 충단(忠壇)이라고 하는 단을 세워 제향을 모시고 있었는데 1941년 일제는 충단이라는 단을 파괴했고 1943년 에는 묘(廟)를 파(破)했으며 비를 넘기고 자(字)를 멸(滅)했으며 제전(祭田: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산의 전답)과 제기(祭器)를 몰수해 갔다. 이를 항의하다 여러 사람이 구속되어 70여일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http://www.namwon4u.com/mw-builder/bbs/board.php?bo_table=B05&wr_id=8483
충렬사는 처음에는 만인의총과 다른 곳(용성관 동편)에 있었으나 숙종 때 민인의총이 위치한 동충동(구 남원역 근처)으로 이전 했다.
*인터넫에 포스팅 된 글들은 만인의총(만명의 의로운 사람들의 묘)과 충렬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매우 혼동 스러운 데 한병옥 작가(남원포유)는 이를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일제는 만인의총과 충렬사 근처에 남원역을 건설하고 철도가 지나가게 했다. 이리(익산) 쪽으로 역을 출발하자 마자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했고 급카브를 도는 위험한 위치 였다. 1976년 남원초등학교 학생들이 서울 수학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열차에 탔다. 앞서 출발한 회물차가 언덕을 울라가지 못하고 뒤로 밀려 내려 가다가 학생들이 탄 열차와 충돌하여 16명의 학생이 사망 하는 사고가 발생 했다.
단지 350여년전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숨기기 위해서 역사적인 유적지에 지형적으로 위험한 데도 철도를 건설 했던 저주스러운 일본인 들이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으로 충렬사와 만인의총이 현위치로 옯기게 되었다. 그러나 유골은 발견 되지 않았다. 일본인 들이 역사를 지으면서 모두 버렸을 것으로 추정 된다.
그래서 만인의총은 시체가 없는 빈 무덤이다.
일본 교토 근처에 도요쿠니 신사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받드는 신사이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코무덤(비총)이 있다. 조선에서 베어 온 코가 묻혀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인들의 유해는 어디론가 흙속으로 사라졌는 데 그들의 코는 일본 비총에 안치 되어 있는 셈이다.
일본군 종군 승려 경념(慶念)의 기록은 당시의 참혹함을 이렇게 전한다.
“역사상 이 전쟁처럼 슬픈 것은 없다. 일본 병사들이 가는 곳마다 살육을 일삼았고 불을 지르니 그 연기가 고을마다 가득했다. 조선 사람은 어린이부터 부녀자까지 코를 잘라 대바구니에 담았고 병사들은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2012 성기중 논문, ‘일본에 축조된 비총의 의도와 대응책 연구’ 중에서 재인용
조선인 코 18만여개, 명군 코 약 3만개 도합 21만여개의 코가 일본으로 보내 졌다고 한다.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880365/1
도요토미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유화정책을 쓴다. 그는 평화 정책으로 전쟁으로 피폐한 일본을 재건 한다. 조선과도 잘 지내려고 노력 했다. 일본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본디 이 무덤은 코만 묻혔는 데 조선통신사들의 숙소가 이곳과 가까운 곳이어서 그들에게 혐오감을 덜어 주기 위해서 .... 귀무덤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이후 귀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코가 묻혀 있는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