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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임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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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May 14. 2022

임진전쟁16. 직산전투와 울산, 사천, 순천 왜성전투

명군과 일본군의 싸움


동아일보 울상성 전투 평풍

1597년 정월 부터 일본군 병력이 부산지역으로 몰려 오면서 도요토미의 재침이 확연해 지자 왕은 이를 명나라에 통지 하고 원군을 청 했다. 명나라 조정은 일본이 명나라가 원하는 조건을 받아들여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고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 것을 괫씸하게 여겨 이번에는 종전 협상 대신에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군을 힘으로 제압하기로 전략을 바꾸었다. 


만력제는 형개에에 총독을 양호에게 경략을 마귀에게 총병관을 맏겼다.  야전 장수들은 양원, 오유충, 우백영, 진우충등 이었다. 조선군은 경주에 성윤문과 권응수, 의령에 김응수를 배치하고, 한산도에 원균이 수군을 맏고 있었다. 


원균은 칠천량전투에서 패배하여 조선수군이 괴멸되고 자신은 전사 하였다. 명나라 장수 양원은 남원성 전투에서 패퇴 했고 전주성을 지키고 있던 진우충은 싸우지 않고 도망하여 본진에 합류 했다. 


선조가 의주에서 이여송에게 전쟁 수행를 맏긴 후로 조선군은 명군 지휘하에 있었다. 시셋말로 작전권이 명군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때 국군이 유엔군 사령관(미군 장성) 지휘하에 있었던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전시작전권이 미군에게 있다. 


일본 좌군은 구례와 남원을 점령하고 전주로 입성 했다. 우군은 밀양, 합천, 황석산성을 거쳐 전주에서 좌군과 합류 했다. 이들은 작전 회의 에서 좌군은 호남을 평정 하고 우군이 한양으로 북진하기로 했다. 


8월19일 일본 우군 구로다 나가마사모리 히데모토는 전주를 출발 하여 천안-직산 쪽으로 향 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청주 방면으로 북상 했다. 구로다군 선발대 2000과 본진 3000 도합 약 5쳔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9월3일에 명군 선발대가 한성에 도착 했다. 경략 양호는 총병관 마귀에게 2000 병력을 급파하라고 지시 하고 후에 2000병력을 더하여 도합 4000 병력이 남하 했다. 명군의 지휘관은 부 총병관 해생이었다.  이들은 직산에서 구로다군 5000과 만났다. 직산은 평택과 천안 사이에 있다. 


이들은 9월7일 새벽에 직산 남쪽에서 격돌 했다. 명군에 소속되어 있던 소수의 조선군은 겨우 길잡이 정도의 역활을 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지상군의 상황을 옛 기록을 통해서 알아보자. 


"9월6일 충청도 방어사 박명현의 치계:

이달 2일에 왜군이 금산으로 부터 회덕, 임천, 한산등지에 칩입하여 불지르고 약탈 하였습니다. 이시발이 군사를 가장 먼저 일으켰으나, 과반수가 도망하여 흩어졌으며, 충청 병마사 이시언과 신이 거느린 병사들 또한 도망하여 흩어져 버렸으니, 지극히 안타깝고 염려스럽습니다."

https://m.blog.naver.com/yis9805/150114768992


명군은 기마병이었고 일본군은 보병이었디. 전투지역이 비교적 평지여서 보병보다 기동력이 빠른 기마병이 훨씬 유리 했다. 일본군은 조총으로 무장 되어 있었으나 화력이 뛰어난 명군의 대포에 대항하기 힘들었다.


9월7일 새벽 부터 시작된 전투는 오후 3시 까지 계속 되었다. 명군 보다는 일본군에게 피해가 많았으나 승부를 가리기 힘들었다. 명군은 수원으로 일본군은 천안으로 일단 퇴각 했다. 9월10일에는 일본군이 직산 북쪽의 안성과 죽산 근처에 나타나 노략질을 하고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9월9일 제독 접반사(명 제독을 보살피는 조선인 관리) 장운익의 보고서:

"죽은 왜적이 거의 5-6백에 이르고 수급은 30여개를 베었고...왜적이 산에 올라가 백기를 드니, 천안의 대군이 즉각 모여들었으므로 중과 부적으로 퇴각 하였는 데, 중국 병사들도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9월15일 조선 조정에서는 비변사 회의가 열렸다. 일본군이 한양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를 시작 했기 때문이었다. 명군이 이를 추격하려 하자 조선 측에서는 계략인지 모른다고 우려 하기도 했다. 많은 인터넽 포스팅이 일본군의 갑작스러운 후퇴 원인을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여 일본지상군이 한양에 들어오면 서해로 북상하는 수군과 만나서 병력을 증강하고 보급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명량해전은 9월16일에 끝났고 일본군 철수는 9월15일 이전에 시작 되었다. 더구나 직산전투에서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밀리지도 않았다. 일본군은 안성과 죽산 까지 진출 했고 명군은 한양으로 일단 돌아 왔다. 


충청 병마사 이시언이 사로 잡은 왜적 후쿠다 간스케의 공초를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양공략을 하지 말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왜 그랬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초에 고니시와 가토는 세길로 나누어 직접 한양으로 올라가려 했는 데 관백이 사람을 보내어 전령하기를 서울은 침범하지 말고 9월까지 닥치는 대로 무찔러 죽이고 10월안으로 서생포나 부산등의 왜성으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양까지 사흘 길 밖에 안되는 데 곧바로 돌아간 것이며 전라도에도 머물 뜻이 없었 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서로잡아가고 걷지 못하는 자는 죽였으며, 사로 잡은 자는 일본에 보내 농사를 짓게 하고 일본에서 농사 짓던 사람은 군사로 바꾸어 해마다 침범하고 아울러 중국 까지 침범하려 하고 있습니다."


아와 같이 도요토미는 명량해전 이전에 일본군에게 왜성 퇴각 명령을 내렸다. 도요토미가 명나라와의 싸움에서 전면전으로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는 지도 모른다. 


도요토미는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조선왕이 무릅을 꿇고 협상을 원하여 조선영토의 일부(삼남지방)를 차지 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루리 하려 하지 않았나 짐작 해 본다. 요지음 러시아가 우쿠라이나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여 우쿠라이나 정부가 시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돈바시 지역을 러시아에게 내주고 전쟁을 끝내게 하려는 수법과 비슷했지 않았을 까?


1차 울산왜성 전투


일본군은 직산에서 본거지인 울산왜성으로 퇴각 했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일본장수는 가토 기요마사  였다. 명군은 울산성을 함락하여 가토를 굴복 시키고 부산왜성에서 일본군을 퇴각 시키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울산성 공략에 나섰다. 


가토 기요마사는 지금 울산 학성공원 자리에 성을 축성 했다.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여 단 40일 만에 난공불락의 성을 건립 했다. 태화강에서 멀지 않은 50 미터 높이의 언덕에 자리 잡았다. 해안 쪽이어서 바다를 통한 보급과 퇴각이 용이 했고 육지로 부터의 공격을 3면에서 만 방어 하면 되었다. 외성과 내성으로 만들어 화포의 공격에 대비 했다. 내성은 3개의 성으로 만들었다. 1성이 가장 높고 3성이 가장 낮았다. 입구는 디긋자 모양으로 하여 3면에서 공격 할 수 있게 했다. 들어오는 입구는 모두 좁게 했다. 따라서 전체 병력은 적군이 많아도 단위 전투 대비 병력수는 오히려 방어 쪽이 유리 하도록 했다. 이순신의 명량 해전을 연상 하게 한다. 


이렇게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왜성이었지 만 결정적인 허점이 있었다. 성안에 우물이 없었다. 


명군 총독 양호 경략 마귀 조선도원수 권율과 일본군 가토 기요마사의 대결이었다. 명군 3만6천, 조선군 일만천오백명이 동원 되었고 울산성 안에는 일본군 약 일만명이 있었다. 


1597년 12월22일 경상 좌수사 이운룡은 서생포 해안을 봉쇄하여 일본군 보급로를 차단 했다. 서생포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는 배를 타고 울산으로 들어 왔다. 12월23일 전투가 시작 되었다. 12월28일 병력과 화력면에서 월등히 우세한 조명연합군(이하 명군)은 외성을 쉽게 점령 했다. 밖에서 방위하던 일본군은 내성안으로 모두 들어 갔다. 명군은 성벽을 넘어 성안으로 들어 가려고 했으 나 빗발치는 조총 사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50 미터 안으로 들어오면 조총의 명중률은 상당히 높았다. 


명군은 성공격을 포기하고 고사작전을 폈다.  먹을 물을 구하려 성밖으로 일본군이 나오면 공격하여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 명군은 성주위의 우물을 모두 매워 버렸다. 포위망은 보급을 차단 했다. 성안의 일본군은 먹을 물 뿐만이아니라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가토는 말을 죽여서 피를 마시고 구정물을 적셔서  짜낸 물을 마셨다고 한다. 더구나 음력 12월 말은 양력 일월 말이다. 가장 추운 계절이었다. 춥고 굶주린 일본군은 고사 직전이었다. 


그러나 성은 쉽사리 함락 되지 않았다. 엄동설한에 명군 또한 힘들기는 마찬 가지 였다. 사기가 떨어 졌다. 설사상가상으로  1598년 1월에 사천, 순천등지 왜성에 주준하고 있는 일본군 지원병 6만이 울산왜성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명군은 경주로 일단 철수 하여 병력을 정비하기로 결정 했다. 


1598년8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 했다. 5살난 아들에게 승계 했으나 권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다섯 다이묘(영주)들에게 넘어 갔다. 이들은 도요토미 사망을 비밀에 붙이고 전면 철수를 결정 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조선과 명도 도요토미 사망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음력8월20일 경상 좌병마사 성윤문치계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와 말하기를 "관백의 병이 위중하므로 흉적들이 철수하여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서생포의 적들은 소굴을 불태우고 돌아가려 하고 있으며 부산과 동래의 적들도 소굴을 불태우고 서생포로 향하고 있는 데 흉모를 헤아릴 수 없기에 군대를 정비하여 변란에 대비하고 있 습니다."


조선과 명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나가기 전에 왜성을 공격하여 섬멸시키기로 결정했다. 울산공략에 실패한 총독 양호를 파면시키고 형개를 임명 했다. 형개는 4로병진책으로 조선에 있는 왜성 총공격에 나섰다. 


3개의 육로와 1개의 수로 도합 4 방면으로 공격하는 전략이었다. 서로군은 순천왜(교)성을 중로군은 사천왜성을 동로군은 울산왜성을 공격하고 수군은 바다에서 순천왜성을 공격 하는 전면전이었다. 


2차 울산 왜성 전투


1598년9월21일 명나라 총병관 마귀와 조선군 별장 김응서는 각각 2만4천, 5천5백의 병력을 이끌고 경주를 출발 했다. 김응서는 동래의 일본군을 제압하여 부산에서 원군이 울산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9월22일 선봉장 해생이 울산성을 공격하고 이어서 마귀가 전병력을 동원 하여 나흘 동안 총공격을 했다. 가토 기요사마는 1차 전투에서 물 때문에 큰 곤란을 겪은 경험을 토대로 우물을 파는 등 철저한 방어 준비를 했다. 


명군은 성안에 잡혀 있던 조선 사람 천백명을 구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내고 있었으나 명군이 사천성 공격에서 패퇴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귀는 군사를 철수 시켰다. 


사천성 전투

https://m.blog.naver.com/yis9805/150115249985

명나라 장수 동일원은 중로군 약 3만명을 이끌고 사천왜성을 향 했다. 명군 2만6천8백명과 조선군 2천2백명이었다. 사천 일대는 시마즈 요시히로를 중심으로 시마즈 가문 5개 부대가 지키고 있었다. 사천은 울산과 순천의 중간에 있었고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는 길목이었다. 호남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진주성과 접하고 있다. 그는 그의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와 함께 7천명의 병력으로 사천신진리 왜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1598년 9월20일 명군이 진주 방면에 있는 망진왜성과 영춘왜성을 점령하고 사천 고성과 사천 신진리 왜성으로 진격해 왔다. 이 상황을 보고 받은 시마즈 요시히로는 주위의 작은 왜성들에 흩어져 있던 병력을 사천 고성

신진리 왜성에 모이게 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고성의 병력을 신진리 왜성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경상우병사 정기룡은 2200명의 병력으로 사천 고성을 포위 공격 했다. 신진리 왜성으로 들어 가려고 사천 고성을 나오는 일본군은 조선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고 신진리 왜성으로 들어 갔다. 


1598년10월1일 명군은 신진리 왜성을 집중 공격 했다.  전투 중에 명군의 불량기포 화약궤에 불이 붙어 광음을 내며 폭발 했다.  연기와 불이 하늘을 뒤 덮었다. 병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자 이틈을 타서 일본군이 성문을 열고 반격 했다. 무려 7천명의 명군이 죽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요시히로는 거의 3배에 가까운 조명연합군을 조총으로 공격하고 지뢰를 묻고 쇳조각이나 철정을 대포로 쏘는 등 기지를 발휘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시마즈는 조명연합군 식량창고를 불 태워 버렸다. 명군은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을 견지지 못하여 퇴각 했다. 


순천왜(교)성 전투


순천왜성 한국일보

고니기 유키나와가 버티고 있는 순천왜성은 외성과 내성 사이에 해자가 있었고 양쪽 성을 잇는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는 당겨서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왜교성 또는 예교성이라고 한다. 호남 점령을 확실히 하기위해서 만든 성이었다. 왜성중 가장 규모가 크고 견고한 성이었다. 무려 6만평에 외성과 내성이 있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었고 동쪽에는 선착장이 있었다


 서로군의 명나라 제독 유정과 조선군 도원수 권율, 전라병사 이병악 이 도합 3만6청 병력으로 육지에서 공략 하고 명 수군 제독 진린과 조선수군 통제사 이순신 휘하의 만5천명의 수군이 바다에서 공격할 계획 이었다. 


성안에는 일본군 일만5천 병력이 있었다. 조명연합군의 3분의 일이 안되는 병력이었다. 9월20일 순천성 인근의 검단산성에 조명연합군 지상군이 도착 했다. 7월16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이순신 휘하의 조선수군과 고금도에서 합세 한다. 조선수군은 명량 해전 이후 함대를 보강하여 100여척의 판옥선을 보유 하고 있었다. 


9월20일 조선 수군은 일본 해상초소가 있고 군량미 창고가 있던 장도에 폭유탄을 퍼부어 불바다로 만든 다음 상륙하여 섬을 점령 했다. 많은 군량미를 흭득했고 조선군 포로를 구출 했다. 한편 육지에서는 강화희담을 하자고 고니시를 성밖으로 끌어 냈다. 고니시를 체포하려는 원래의 목적은 달성 하지 못했으나 일본군 100여명를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수군이 장도를 점령하여 바다길이 막히고 육지에서는 조명연합군이 성을 포위하여 고니시는 완전히 성에 갖혀 있는 상태가 되었다. 


10월2일 진린과 유정은 수군과 지상군이 동시에 성을 공격하기로 합의 했다. 다음날 새벽 약속 대로 수군은 밀물 때에 상륙하여 성을 공격했다. 일본군에게 상당 한 피해를 입히고 유리한 상황이었다. 한편 지상군은 성 가까이 진격 해서 총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유정은 그자리에 병력을 멈추게 하고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좌의정 이덕형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유 제독은 2일 왜적의 성을 공격 할 때 모든 군사가 성아래로 60보 쯤 전진 했는 데, 왜적의 총탄이 비오듯 하자, 제독은 끝내 깃발을 내려 놓고 독진하지 않았 습니다. .... 각군대로 하여금 반나절을 서서 보내게 하고 .. 왜적의 탄환만 받게 했으니, 제독이 한짓을 도무지 알수 가 없습이다. ... 성위에서 한여자가 부르짓기를 '지금 왜적이 다 도망 갔으니 중국군대는 속히 처들어 오라'고 하였 습니다."


유정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동안 명 수군은 썰물이 되는 바람에 배가 움직을 수 없은 상황에 봉착 했다. 이순신이 판옥선을  동원하여 이들을 구출 했다. 그러나 조선수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조명연합군은 순천성의 고니시 유키나와의 군대를 섬멸할 기회를 유정의 비굴한 태도로 놓지고 만다. 유정은 왜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 았을 까? 아직은 기록에 확실한 이유가 밝혀 지지 않고 있다.  


도요토미 사망으로 그냥 두어도 일본군이 철수 할 것이 확실 했다. 명나라 장수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병력이 손실 되면 자신의 세력의 약화를 의미 했다. 따라서 구태여 병력 손실을 감수 하며 일본군을 공격 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에 명의 장수들은 일본군 장수들과 협상 하여 퇴각을 허용해 주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흥정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괴멸 시키는 것이 전투의 목적이었다. 명군은 조공국인 조선을 일본의 침략으로 부터 구해주고 대국의 명분을 세우면 그 뿐이었다. 조선이 원하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 국가 예산과 인명을 희생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유정과 고니시 간의 거래가 많이 의심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순신은 결심 한다. 퇴각하는 일본군을 한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그리고 필살의 노량해전에 대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R69mCCvmB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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