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은 조선이 원하는 대로 싸우지 않았다.
1597년9월16일 명량해전에서 기적같은 승리를 거둔 이순신은 남해로 내려 갈 수가 없었다. 일본수군이 아무리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고작 13척의 조선수군 보다 훨씬 많은 전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추격을 피해 위도, 고군산도 쪽으로 북상 했다. 일본수군은 남해를 장악하고 있었고 지상군은 이미 경상도,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일부 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남해안과 전라도 서해안마을 에서는 일본수군의 약탈과 살상이 빈번 했다. 이순신이 어느 한곳에 정박하기 아려운 상황 이었다. *일반적으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일본수군을 괴멸 시켜서 제해권이 조선수군에게 완전히 넘어 간 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데 당시의 전황을 살펴 보면 " 이순신이 일본수군의 추격을 피해서 서해안을 따라 북상 했다"는 주장이 더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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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일본 수군을 염탐하며 남쪽으로 내려 오다가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 일단 정박했다. 군량을 마련하고 군사를 정비하기 위해서 였다. 육지가 일본군에게 점령 되어 이곳 앞바다는 피난선 욍래가 빈번 했다.
이순신은 이곳을 통과하는 배에 통행첩을 발급해주고 통행료 쪼로 일정량의 양식을 받았다. 피난선은 이순신의 보호를 받으니 안전하게 항해 할 수 있었고 이순신은 거두어 들인 통행료로 군량미를 비축 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108일 간 머물렀다. (1597년11월6일 징비록에서)
1597년11월20일 완도에 정찰 나갔던 배가 돌아와 일본 배가 보이지않는 다고 보고 했다. 이순신은 완도 옆 고금도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판옥선을 건조 하여 13척을 50척으로 늘렸다. 이순신의 명성을 들은 피난민들이 고하도와 고금도 그리고 근처 섬으로 모여들었다. 해안지방이 일본군 세상이어서 안심하고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이들을 정착 시키자는 부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판옥선 만들기 등 군을 재정비하는 데 일자리를 제공 하고 농사를 짓게 했다. 창장년들은 기꺼이 병사가 되었다. 육지에서 군사를 모집하면 반 이상이 도망가 버리는 현상과는 정반대로 이순신은 8천군사를 확보 할 수 있었다.
울산, 사천, 순천을 거점으로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의 수많은 왜성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괴멸시키기 위해서 동로군은 울산으로 중로군은 사천으로 서로군과 수로군은 순천을 같은 시기에 공격 했다(4로 병진책). 수로군의 지휘관은 도독 진린이었다.
1598년7월16일 진린은 400여척의 전선과 5000 병력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하여 이순신과 합류 했다. 전쟁이 명군 지휘하에 진행되고 있어서 이순신이 진린의 명에 따라 전쟁을 해야 했다. 진린은 성격이 난폭하고 진중한 장수가 아니어서 이순신이 지휘권을 빼앗기면 일본수군에게 패전 할 우려가 컷다. 유성룡은 징비록에 진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진린은 성질이 거칠고 포악하고 교만한 자다. 진린이 한양에 이르럿을 때 상(선조)이 청파에 나가 전송 하였다. 진린은 자기 군인들이 (조선의)수령을 구타하여 모욕을 주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늦게 도착하였다는 이유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보고 역관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재상들에게 ... "장차 이순신의 군사가 패 하겠구나"라고 말했다. 진린과 같이 있으면 행동을 견제 당할 것이고 의견이 맞지 않아 .. 장수의 권한을 빼앗기고 군사들이 학대 당할 것이다."
이순신은 유성룡등과의 교신에서 진린의 성품을 파악하고 대책를 강구 한다. 대쪽 같은 성격으로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순신은 의외의 유연한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한다.
진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나가서 그를 마중했다. 진수성찬을 차려 진린을 상석에 앉치고 극진히 대접 했다. 7월27일 절이도에서 조선군 송여종이 8척의 배를 끌고 나아가 30척의 일본수군과 접전을 벌려 승전 했다. 명군과 전혀 상관 없는 전투 였다. 전과가 전적으로 조선군 몫이라는 보고에 진린은 부하들에게 무척 화를 냈다고 한다. 이말을 들은 이순신은 수급을 전부 진린에게 주고 승전을 명군이 한것으로 보고 하라고 했다. 진린은 크게 기뻐 하며 "본국에서 장군의 명성을 들었는 데 거짓 아니었구나" 하고 감탄 했다고 한다.
일단 진린의 마음을 사로 잡는 데 성공 했지만 명군이 마을에 들어가 아녀자를 희롱하고 약탈하는 일이 자주 벌어 졌다. 또한 명군 장수들은 조선장수들을 업신여겼다. 천자의 군대가 조공국을 구하려왔다는 교만 때문 이었다. 어느날 이순신은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모두 짐을 싸들고 떠나는 모습이었다.
이를 본 진린이 이순신에게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이순신이 대답 했다.
"조선백성들은 천자의 나라에서 온 군대를 보고 부모처럼 의지하고 우러렀는 데 오히려 괴롭힘을 받아 백성들과 군사들이 모두 도망가고 있 습니다. 병사가 없는 데 어찌 대장으로 혼자 남아 있겠 습니까? 나 또한 다른 섬으로 옮겨 가기위해서 .. 짐을 싸서 나가고 있 습니다." 라고.
진린이 즉석에서 사과 했다. 이순신은 명나라 군사 처벌권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 했다. 진린은 흔쾌히 이를 허락 했다. 이후 명나라장수들은 조선장수들을 업신여기지 않았고 명나라 병사들의 행패는 사라 졌다.
진린은 이순신을 "이야" 또는 "노야" 라고 불렀다. "야"는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어른을 호칭 하는 존칭이라고 한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명수군의 지휘권을 주었다. 임진 전쟁이 명군 장수 지휘하에 진행 되었 던 것을 감안 하면 이순신의 조명연합 수군 지휘권 장악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순신의 줄충한 부대 운용과 전슬에 감탄한 진린은 이순신에게 "작은 나라에서 살 사람이 아니다. 명나라에 가서 같이 살자" 고 자주 권 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이를 번번히 거절 했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 부터 생명의 위협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백성들의 왕에 대한 원성은 날로 높아지고 있는 반면에 이순신의 명성은 백성들을 감복 시키고 있었다.
참고: 남도일보; 전라도역사이야기-57. 이순신장군과 진린 도독
명군은 울산, 사천, 순천 왜성 공격에 모두 실패 했다. 그러나 다행히 1598년8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했다. 본국으로 부터 철수 명령을 받은 일본군은 살아 남아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 명군에게 협상을 청했다. 명의 장수들은 남의 나라를 위해서 자진해서 후퇴하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자신의 병력을 손실시킬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들은 일본군으로 부터 최대한으로 이득을 취하고 본국으로 보내 주면 그뿐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성에 유정의 서로군과 조명연합 수군에게 포위 되어 있었다. 고니시는 유정과 진린에게 여러 차례 뇌물을 주고 순천 왜성 탈출을 약속 받았다. 고니시는 통신선 한척만 빠져나갈 길을 열어 달라고 부탁 했다. 유정과 진린은 이를 흔쾌히 허락 했다.
시마즈 요시히로와 소 요시토시의 일본군 함대 500척은 각각 사천과 남해 앞바다에 주둔하고 있었다. 고니시가 요구한 통신선은 연락병을 태우고 사천으로 가서 시마즈에게 자신과 자신의 병력을 구출해 달라고 요청 했다. 시마즈는 순천성에 갗쳐 있는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서 주위의 모든 함정을 끌어 모았다. 모두 1000여척이었다.
노량해협은 육지와 남해도 사이의 아주 좁은 바다 길이다. 이순신은 일본수군이 남해도를 돌아서 순천으로 향하기 보다는 빨리 갈 수 있는 이곳을 통과 할 것이라고 생각 하고 남해도 노량 앞바다에 복병선을 매복 시켰다. 노량해협을 통과하면 바다가 좀 넓어 지기는 하지만 앞에 대도와 죽도 가로 막고 있다. 이순신은 죽도의 남쪽 남해도 관음포에 본대를 대기 시켰다. 복쪽 죽도에는 진린의 명 수군이 일본 수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의 판옥선은 명군의 배에 비해서 전투력이 월등 했다. 명의 장수들은 판옥선을 타고 명 함대를 지휘 했다.
1598년11월18일 새벽 시마즈 함대가 노량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발견한 조선 수군 복병선은 잠시 공격을 하고 도주하기 시작 했다. 일본함대는 이를 맹 추격 했다. 노량해협을 막 빠져 나오자 명군 선봉장 등자룡이 판옥선을 타고 포탄을 퍼부었다. 뒤를 이어 진린의 명수군 본대가 북쪽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남쪽에서 협공 했다. 당황한 시마즈는 좁은 해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명수군을 공격 했다. 판옥선이 침몰하고 등자룡은 전사 했다. 시마즈는 명의 함대가 취약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진린의 함대를 집중적으로 공격 했다. 일본함대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위기에 처한 진린을 이순신이 구출 했다. 그리고 시마즈 함대를 노량 해협으로 몰아 넣었다. 좁은 해협에서 이순신은 일본배에 접근하여 함포 사격과 화공으로 공격 했다. 수많은일본함대가 불에 타서 침몰 했고 병사들은 아우성을 치며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위기에 처한 시마즈는 노량해협을 빠져나와 본국으로 돌아 가려고 남해도 관음포 쪽으로 향 했다.
시마즈는 관음포가 육지로 막혀 있지 않고 탁 트인 바다라고 오인 했다. *관음포 입구 육지를 청색으로 위장 했다는 기록도 있다.
관음포로 들어간 일본수군은 독안에든 쥐가 되었다. 앞에는 육지요 뒤에는 사신 같은 이순신이 추격하고 있었다. 고니기 에게서 뇌물을 받은 진린은 이순신에게 공격하지 말고 그냥 보내자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지금 저들 한명이라도 살려 보내면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다시 침공 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의 제의에 동의 하지 않았다. 진린도 이순신의 단오한 결심에 어쩔 수 없었다. 마치 고양이 앞에 쥐 처럼 일본군 은 공포에 떨 었다. 급하면 쥐가 고양이를 문 다고 하지 않았 던가?
이때 갑자기 날카로운 총성이 들리면서 이순신이 쓰러졌다. 가슴에 총탄을 맞은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절대로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고 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에게 당 부 하고 숨을 거두었다. 유지를 받들어 이회와 이완은 북을 울리며 기를 휘둘러 병사들을 독려 하였다. 정오 쯤 되어 시마즈 함대 대부분은 침몰 했다. 천척의 배가 겨우 50척이 되었다. 그러나 시마즈등 지휘부는 관음포를 빠져나와 남해도를 돌아 거제도로 향했다.
일본군 병사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않았다. 배를 버리고 남해도 육지등 근처 도서에 상륙 했다. 조명 연합군 수군은 이들을 추적하여 살해 했다. 남해도에는 대마도 주 소 요시토시의 진영이 있었다. 소 요시토시는 도주 한 병사들을 일부 구출 하여 배에 싫고 거제도로 도주 했다. 그의 진영을 접수 한 진린은 군량 만석과 수많은 우마를 흭득 했다고 한다.
진린은 전투가 끝나자 이순신을 찾았다. 이순신 진영에는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진린도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곧 알아 차리게 되었다. 이순신은 그를 구출 해준 생명의 은인이었고 사로군 중 유일하게 수로군이 승전을 하게 된것도 이순신 덕이었다. 역사의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 하고 있다.
"진린은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준것을 사례 했는 데, .. 이순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의자에서 땅 위로 몸을 던지면서 "나는 노야 께서 생시에 오셔서 나를 구원한 줄 알았는 데 어찌하여 돌아 가셨습니까?"하고 땅을 치며 통곡 했다. 온 군대가 통곡하여 곡성이 바다를 진동 시켰다"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순천성에서 탈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전투가 끝나갈 무렵 고니시는 약속대로 신호를 보내고 순천왜성을 빠져 나왔다. 신호를 확인한 유정은 성 안으로 들어 갔다. 이순신이 전사하고 일본 수군의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조명연합군이 순천왜성에 신경을 쓸리가 없었다. 그는 남해도 남단을 돌아 거제도에 도착 했다.
거제도에는 패장 시마즈 요시히로와 소 요시토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몇척 안되는 전함을 이끌고 부산으로 향했다. 울산과 남해안에 있는 모든 왜성을 버리고 일본군은 부산에 집결해 있었다. 11월24일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를 시작 했다. 12월 중 철수를 완료한 그들은 도요토미의 사망을 실감 했다. 그러나 권력은 이미 에도지방의 실세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7년전쟁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일본 남서부 지역 하급 사무라이 출신었던 도요토미 심복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배 하던 200여년 동안 이를 갈고 때를 기다렸다. 이들은 명치유신의 주역이 되었다. 에도 막부를 접수하고 일본제국을 건설 하여 1910년 조선정복의 꿈을 달성 한다.
1598년11월24일, 일본군이 철수 하던 날 이순신의 사망에 대해서 선조는 비변사에 통보 한다. "알아서 처리 하라" 였다. 충무공은 한 참후 인조가 내린 시호 이다. 선조는 전쟁 최고의 공을 세운 이순신에게 이에 합당한 공치사를 하지 않았다. 당파를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다는 정황을 여기저기 기록에서 눈에 뜨인다.
17세기 조선의 여러 역사 책에 이순신이 일부러 갑옷을 벗고 노량해전에 임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른바 이순신 자살 설이다. 그럴만한 정황은 있지만 이순신의 성품을 고려해 보면 자살 같은 어리석은 짓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조선의 왕과 조정은 이순신을 그의 공에 합당한 대접을 하지 않고 권력의 입지를 위해서 그를 깍아 내린 것은 물론 처형하려 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결과 300여년 후 두번째 침략한 적은 원래의 야욕이었던 조선 정복에 성공 한다.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순신은 5000년 한국 역사상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고 유능한 장군이었고 훌륭한 지도자 였다. 그래서 성웅 이순신이라고 하지 않는 가!
참고:
1.
https://www.koreaherald.com/view.php?ud=20200610000598
2.
https://www.youtube.com/watch?v=FXxMhm5MKGU
3.
https://www.youtube.com/watch?v=EWAZ3EHM5jY&t=987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