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반성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년에 시작된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은 7년 동안 계속되어 1598년에 끝났다. 임진전쟁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조일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더 현대 감각이 있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침략기(1592-1593), 소강기(1593-1597), 재침기(1597-1598)로 나누어 서술 하면 전쟁의 흐름을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전쟁은 침략기 1년과 재침기 1년 도합 2년 이었지만 조선이 입은 피해는 7년동안 계속 되었다. 인구의 1/3이 죽었다. 경작면적 2/3가 손실 되었다. 국토는 초토화 되었다. 농사 지어야 할 장정들이 전쟁에 동원 되었다. 기근이 계속 되었다. 먹을 식량도 부족 한데 그나마 일본군이 약탈해 갔다. 명군 군량미를 조달 한 다고 빼앗아 갔다. 인육 까지 먹는 사례가 빈번 했다. 거기다 전염병 까지 퍼졌다. 전쟁에 나가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다. 상당한 숫자의 조선사람들이 일본과 명나라로 끌려 갔다.
조선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을 지독하게 미워하기 시작 했다. 특히 재침기(정유재란) 동안의 무차별 살상은 일본사람 혐오가 조선시람들 뼈골에 사무치게 했다.
전시에 설치 된 비변사의 힘이 막강해졌다. 비변사는 무장과 고위 관리로 구성 된 전시 관리 기구 였다. 전쟁이 끝났지만 정부최고결정권이 의정부로 넘어 가지 않고 비변사에 남아 있었다. 왕권이 약화되고 조정 대신들의 권한이 강화 되었다. 이는 후에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일본 내의 대부분 다이묘(영주)들을 제압 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만은 서로 화해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에도 근처의 일본최고의 다이묘 였다. 조선 침략전쟁에도 참여 하지 않았다.
그는 도요토미가 신하들에게 다섯 살 난 자신의 아들을 섬기고 나라를 유지하라는 유언을 무시하고
반기를 들어 도요토미 지지세력과 전쟁을 하여 전권을 장악 했다. 소위 에도 막부 시대의 시작이었다.
성리학을 도입하여 신분제도를 확립 했다. 사농공상 이었다. 일본의 사는 무사 즉 사무라이이고 조선의 사는 선비이다. 근대 사회에서는 신분제도가 차별의 대명사 이지만 당시에는 사회질서를 의미한다. 반전 평화 주의자 인 그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임란에 대한 사과를 표명하고 통신사 교환을 성사 시켰다.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 도공들은 일본에 도자기 기술을 전수 하여 도자기 문화를 꽃 피운다. 에도 시대의 도쿄는 백만의 세계 일류 도시가 되었다. 태평성대라는 말이 유행하게 했다고 한다.
아이로컬 하게도 한반도의 비극은 일본의 부흥을 가져왔다. 임진전쟁 후 태평성대는 한국전쟁 후 일본의 재기를 연상하게 한다.
조선은 압록강 북쪽의 여진족을 다스려 왔다. 명나라 또한 요동에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견제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동안 명이 조선에 보낸 군대는 주로 요동에 주둔 하던 군대였다. 전쟁 후 명은 더 이상 요동군을 유지 할 여력이 없었다.
여진을 억압하던 조선과 명이 임진왜란으로 쇠약 해 지자 여진은 그 세력을 확장 해 나갔다. 건주 여진, 서해여진, 여인여진 3파로 갈라져 있던 여진을 건주여진이 통합 하고 금나라(후금)를 세웠다. 후금은 1627년(정묘호란)과 1637년(병자호란) 두 차례 조선을 침략하여 굴복시키고 1644년에는 명을 멸망시켜 청나라를 세운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혼신을 다해 일본군과 싸워 이겼다면 유성룡은 혼자 몸으로 못난 임금과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대신들을 달래 가며 7년 전쟁을 운영 했다. 도원수 권율과 이순신을 추천한 사람도 유성룡이었다. 1598년 남인에 속해 있던 유성룡은 북인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 났다.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 온 유성룡은 7년 전쟁의 자초지종을 기록 했다.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책의 이름을 징비록이라고 했다. 1633년 아들 유진이 서애집(유성룡의 호)에 징비록 을 넣어 간행한 것이 처음 징비록 출간이다. 1647년에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징비록이 출간되었다.
조선사람들은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1600대 말에 이 책이 일본에서 출간 되었다. 그리고 근세에 일본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중에 하나가 되었다. 아마 그들은 조선 정복 실패의 원인을 공부 하며 노심초사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것 이다. 징비록은 중국에서도 출간 되었다. 전쟁터는 한반도 였지만 전쟁의 주체는 일본과 명나라 였다. 중국이 이책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조는 일본을 물리친 공을 자신을 따라 피난 다닌 문신과 명나라에 돌리고 실제로 전쟁 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무신들은 홀대 했다. 지상군의 주력 이었던 의병장들은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모함의 대상이었다.
만주에서는 조선과 명이 일본과의 전쟁에 여념이 없는 동안 여진이 일어나고 있는 데 조선은 명나라가 조선을 구해 주었다는 의리에 억매어 명나라 섬기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미 쇠잔 해 가고 있었다.
조정은 명을 섬겨야 하느냐 후금(여진, 청)을 섬겨야 하느냐로 갑론 을박 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주장 했으나 조정 대신들은 명에 대한 의리와 여진이 오랑캐라는 점을 들어 친명외교를 선택 했다. 집권보수 세력인 서인은 소 중화주의를 선택 했다. 망해 버린 명의 중화주의를 조선이 승계하여 명이 부활 할 때 까지 중화주의를 유지 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세번절하며 이마를 9번 땅에 찌어 피가 나는 굴욕을 당하고도 겉으로는 청을 섬기지만 실제로는 명의 전통을 지키는 정책이 병자호란 후에도 계속 되었다.
청은 대단히 발달된 나라였다. 그러나 조선은 서양문물은 물론 청나라에서도 새로운 지시과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이 오랑캐이고 조선은 명의 전통을 이어 받은 소중화국이기 때문이었다.
쑥대밭이 된 국토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고 뼈골이 사무치게 이래서는 안된다고 느낀 사람들이 당시에도 있었다. 바로 실학자 들이다. 그들은 윤리 도덕만 따지는 성리학 대신 삶에 도움이 되는 기술과 학문을 익혀야 백성들이 편하게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다고 주장 했다. 천하게 여기던 상공업을 발달 시키자고 했다. 청나라에 가서 이런 것들을 배우자고 했다. 나라를 지키려면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했다.
17, 18, 19세기 실학자들의 주장은 구미의 계몽학자들의 주장과 대동소이 하다. 계몽 사상은 근대 문명과 산업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실학자들은 조선의 계몽학자들이었다. 조선의 왕과 위정자들은 보물 같은 실학을 버렸다.
조선은 이순신을 죽이려 했고 의병장들을 적대시 했으며, 청을 무시 하고 실학자들의 절규를 못들은 척 했다.그 결과는 한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 조선은 312년 후에 일본에게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나라를 송두리 채 바친다.
한반도는 대륙과 태평양 사이에 존재 한다.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하기 전 까지는 태평양 세력이 미미 했다. 조선은 대륙세력과 잘 지내기 만 하면 평화를 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평양에 일본국이라는 강력한 태평양 세력을 만들 었다. 임진전쟁은 대륙세력인 명나라와 태평양 세력인 일본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조선에서 싸운 전쟁이다.
19세기 말에는 대륙 세력인 청나라와 태평양 세력 일본이 조선을 놓고 싸웠다(청일전쟁). 일본이 이겼지만 새로운 대륙 세력인 러시아의 간섭으로 조선 점령에 실패 했다. 그러나 10년 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러일전쟁)에서 이겨 조선을 강점 했다. 임진전쟁에서 일본이 명을 제압하지 못해서 조선 점령에 실패 했지만 1910년에는 태평양 세력 일본이 두 대륙 세력인 청나라와 러시아를 모두 싸워 이겼다.
20세기에는 일본외에 미국이라는 또하나의 태평양 세력이 등장 한다. 대륙에는 소련과 중공이라는 거대한 공산주의 국가가 건설 되었다. 대륙 세력인 소련과 태평양 세력인 미국은 힘을 합쳐서 일본과 전쟁을 했다.일본의 완패 였다. 일본 영토였던 한반도는 승전한 대륙세력 소련(러시아)과 미국의 전리품이 되었다. 당연히 반으로 갈라 먹어야 했다. 분단의 큰 그림이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은 대륙세력인 소련과 인공이 시작 했지만 결국 대륙세력인 중공과 태평양 세력인 미국이 한반도에서 싸운 전쟁이 되었다.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휴전 상태이다. DMZ는 태평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완충 지대이다. 태평양 세력은 한국-일본-미국이며 대륙 세력은 인공-중국-러시아 이다.
한국사람들이 임진왜란 때 부터 쌓인 일본 혐오 감정을 아직도 가지고 있지만 미국은 한국-일본-미국으로 만들어진 삼국동맹(Trilateral Alliance)를 운영 하고 있다.
대륙세력은 한반도를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태평양세력은 대륙으로 진출 하려는 전진기지로 차지하려고 한다. 도요토미는 조선보고 명을 칠터이니 길을 내 달라고 하지 않았던 가? 또한 대륙세력은 태평양세력의 대륙진출을 방어하는 완충지대로 태평양세력은 대륙세력의 태평양진출을 방어 하는 완충지대로 한반도를 이용 하려고 한다. 중공이 앞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개입할 때 인공(북한)은 중공 안보를 위해서 반드시 방어 해야 할 지역이라고 했고 미국이 한국(남한)에 파병할 때 남한은 일본방어에 없어서는 안될 지역이라고 했다. 지금도 북한과 남한은 중국 방어와 일본 방어에 없어서는 안될 지역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일본과 미국은 태평양에 있고 일본방어는 미국안보와 직결 된다. 따라서 아무리 서로 미워해도 일본과 남한은 우방의 관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삼국동맹(Trilateral Alliance)은 한반도 지정학적 위치의 자연적인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