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암살에 즈음하여
일본 전 수상 아베 신조가 유세 도중 암살 되었다. 일본은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패배한 이래 미국의 통제하에 있는 나라이다. 일본군대는 전쟁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자위대라고 한다. 이들은 외국군이 처들어 오면 방어만 할 수 있다. 아베는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안간 힘을 쓰다가 사라졌다. 헌법을 개정하여 어였한 독립국가로 만드는 것이 평생 꿈이었을 것이다.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브스케는 일본 자민당을 만든 인물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945년에서 1948년 까지 약3년동안 키시 노브스케와 고다마 요시오는 나란히 감옥에 있었다. 키시는 일본 수상이 되고 고다마는 야꾸자의 두목이 된다. 두 사람은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다른 많은 전범들과 같이 투옥되었다. 1948년 어느날 이들은 운 좋게 풀려 나왔다. 그 다음날 수많은 죄수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 졌다. 미국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정보 요원으로 이용하여 일본정계를 미국정부에 협조 하도록 조정 했다. 일본에 독재와 공산주의가 뿌리 내리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자유진영에 속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930대는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다. 이때 고다마는 우익청년 단체를 이끌었는 데 일본수상 암살미수로 투옥되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그를 간첩될 사람들을 모집하고 일본해군에게 필요 한 금속을 조달 하는 거간군으로 이용했다. 약5년동안 그는 중국내 일본점령 지역에서 가장 큰 암시장을 운영 했다. 고다마는 이성장군이 되었고 무려 175 million dollar의 재산을 모았다. 1948년 감옥에서 나오 자, 그는 미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서, 보수정객들에게 이 돈을 써서 영향력을 행사 하여 이들이 정권을 잡도록 도왔다.
한국전쟁동안에는 미국인 사업가, 전OSS요원, 전외교관들을 동원 하여 CIA가 자금을 조달하는 비밀공작을 성공리에 이끌게 했다.
키시는 코다마의 돈과 상당한 정치력으로 일본의회에서 다수당의 지도자가 되어 수상에 당선 되고 자민당을 만들었다. 자민당은 거의 반세기 동안 일본의 집권당 이었다. 1941년에 그는 미국과의 전쟁 선전포고문에 서명했고 전쟁중에는 일본의 무기군수 보급 장관을 지냈다. 일본이 펄 하버를 공격할 때 일본주재미국대사였던 Joseph Grew는 구류되어 있었다. 그러나 키시는 그를 초대 하여 골프를 쳤다. 그 후로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었다. 전 후에 Grew는 중앙정보부 전위 기관인 자유유롭 전국 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이와 같이 키시는 미국 고위층에 이미 친구가 있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수상관저로 직행 했다. 그 곳에는 그의 동생, 아이사쿠 사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미군점령 내각의 수석 비서관이었다. 그는 키시에게 죄수복을 가라 입으라고 신사복을 건네 주었다. 키시는 그의 동생에게, " 이상 하지 않니? 이제 우리모두 민주주의 자야." 라고 말 했다.
키시가 죄수에서 수상이 되는 데는 7년 동안의 세심한 계획이 필요했다. 키시는 뉴스위크 도쿄 지국장 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미국 정치인들은 편집국장 해리 컨을 통해서 키시를 소개 받았다. 해리 컨은 알랜 달라스의 친구 였다. 알랜 달라스는 CIA 국장이었다. 미 중앙정보국은 컨을 통해 서 키시와 접촉 했다. 키시는 미 대사관 직원들을 희귀종 난을 다루 듯 극진히 대 했다.
키시는 미국 사람들에게 그가 이끄는 자민당은 리버랄도 아니고 민주적 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제국주의 일본의 잿더미에서 나온 우익 봉건주의자들의 클럽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의 대외정책을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것을 약속 했다. 그는 미국이 미군기지를 일본에 둘 것을 허용 했다. 그리고 그곳에 핵무기를 저장 하도록 했다. 그 보답으로 그가 요구 한 것은 아무도 모르게 미국이 정치적으로 그를 지지 하는 것이 전부였다.
Reference; Legacy of Ashes; The History of CIA by Tim Weiner
코다마와 한국의 관계는 비교적 초년부터 시작된다. 코다마 요시오가 어린 시절 서울에 있던 친척에게 맡겨져서 선린상업학교[12][13]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다마 요시오가 다시 한국과 연결되는 것이 국교정상화이다. 한국의 박정희와 야쿠자 정건영, 그리고 일본의 통칭 지한파라는 기시 노부스케, 코다마 요시오, 세지마 류조 등의 인맥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이뤄내게 된다. 친일파 이런거 보다는 아주 넒게 보면 아시아주의의 영향도 있고, 가장 중요한 핵심은 돈이었다.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상당한 금액의 돈이 넘어갔고, 이 돈을 먹기 위해서 일련의 세력들이 결집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코다마 요시오는 2등급 수교훈장인 광화장을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받았다. 참고로, 기시 노부스케는 1등급 광화대장이었다.
1962년 한-일 국교 정상화 공작을 하기 위해 방한했을 때,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오른쪽)과 만났다. 가운데가 고다마 요시오. 고다마 요시오 전집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코다마 요시오가 한국정부에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자, 당시 공화당 정치인들이 코다마 요시오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다. 이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제외하면 김종필의 형 김종락, 석정선, 김용태 등 상당수가 김종필 계열 인물들이었다. 코다마를 통해서 김종필을 박정희의 차기로 올리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물론 코다마는 그런 것까지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를 통해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알렸다. 당연히 이 사실에 분노한 박정희가 김형욱을 시켜서 도청하게 한 결과 위의 3인방은 모두 숙청된다. 이것이 유명한 JP 불충사건, 혹은 노골적으로 코다마 불충사건이라고 한다.
이상 (blog.daum.net; 극우운동가, CIA 요원, 우리나라에도 깊이 관여한 인물, 고다마 요시오) 에서
경북 문경에서 훈도(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박정희가 죽음으로써 일제와 천황을 받들겠다고 맹세하는 비장한 혈서를 신징(지금의 창춘)에 있던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건 1939년 초. 그게 유별났던지 <만주신문>(1939년 3월31일치)은 ‘혈서로 군관(장교) 지원’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그 덕인지 박정희의 대구사범 재학시절 교련 교관이었던 관동군 아리카와 게이이치 대좌(대령) 등이 손을 써 그는 결국 그 학교에 들어갔다.
“만주국은 내가 그린 작품”이라고 호언했던 기시는 그때 만주국 총무청 차장이었다. 총무청 장관은 최고위직인 국무원 총리 바로 아랫자리지만 만주인들 몫으로 준 총리는 실권이 없는 자리여서 사실상 최고실세였다. 그 밑에서 실무를 장악하고 있던 기시가 만주국이 자기 작품이라고 큰소리친 건 허언이 아니었다. 기시는 그때 만주국을 군부 엘리트와 관료, 닛산과 같은 일본 재벌이 지배하는 철저한 중앙통제형 개발독재체제의 실험실로 만들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식의 계획경제, 수출 주도, 농촌진흥, 중화학공업 육성 등 전후 일본과 한국의 압축적 정치·관료 주도 성장전략과 한국의 새마을운동,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조회, 군사교육, 충효교육, 국민교육 헌장, 퇴폐풍조 단속, 반상회, 고도국방 체제를 위한 총력안보체제 따위의 통제장치들이 모두 만주국 실험을 거친 것들이었다.
기시가 총무청 차장을 할 무렵 도조 히데키(태평양 전쟁 수행, 독일의 히틀러에 해당)는 관동군 헌병대사령관에서 참모장으로, 이어서 육군 차관, 대신으로 승승장구했다. 박정희가 만주에 간 1940년 2월께 기시는 상공차관이 되고 이어 들어선 도조 내각의 상공대신으로, 국무상, 군수차관으로 출세해 전쟁수행에 앞장선다. 따라서 기시와 박정희는 만주에선 직접 만나지 못했다.
만주군관학교 예과 졸업식 때 푸이한테서 금시곗줄을 받은 우등생 박정희는 1941년에 이름을 ‘다카기 마사오’로 바꿨고 그 다음해엔 더욱 일본색 짙은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편입한다. 우등 졸업 뒤 관동군 견습사관이 되고 1944년 7월에는 만주국군 보병 8사단에 배속됐다가 그해 12월 소위로 임관됐으며 1945년 7월에 중위로 진급한다. 그들의 주요 임무가 조선인 항일독립운동세력 박멸이었다.
하지만 일제 패전과 함께 기시와 박정희는 물없는 물고기 신세로 전락한다. 기시는 에이(A)급 전범이 돼 3년간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 갇힌다. 박정희도 무장해제당한 패잔병이 됐다. 그들을 살린 건 일제 패전 뒤 일본과 남한을 점령한 미국과 냉전, 그리고 만주 인맥이었다.
기시는 도조 등 에이급 전범 7명이 교수형을 당한 바로 다음날 전격 석방돼 1957년 총리 자리에까지 오른다. 기시를 살린 것은 나중에 외상이 되고 한일협정 때 일본대표로 활약하는 그의 평생 부하 시나 에쓰사부로, 기시의 친동생으로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되는 사토 에이사쿠 등과 미국이었다.
일본군 박정희를 한국군으로 세탁하고 군 좌익숙청 때 남로당원으로 처형당할 뻔한 그를 살린 것도 백선엽, 정일권, 김창룡, 이선근, 김정렴 등의 만주 인맥, 그들과 손잡은 미국이었다.‘쇼와의 요괴’ 또는 ‘수괴’로 불린 기시는 그 뒤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직후 물러날 때까지의 약 3년 동안의 총리 재직기간을 포함한 7년여의 길지 않은 시간에 미국의 뜻대로 전후 일본정치의 방향을 정한 보수합동 체제(55년 체제)를 만들었고, 미국 의존 안보체제를 굳혔으며, 일본 고도성장의 기본틀을 짜, 만주 봉천 총영사관보 출신인 요시다 시게루 정권 이후의 일본국가 진로를 결정했다.
냉전 덕에 공직에 복귀한 일본 전범자들이, 역시 냉전과 한국전쟁 덕에 살아난 그들의 수하였던 한국 지배자들과 다시 만나는 건 1961년 박정희 쿠데타 직후였다. 한일국교정상화와 한국 경제개발에는 이를 자국 안보문제와 관련한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접근한 기시와 그 주변에 형성된 일본 육사와 만주군관학교 또는 만주국 관료 출신의 만주 인맥이 깊숙이 개입했다.
기시는 자신의 만주국 ‘후배’ 또는 ‘제자’들이 그려낸 대한민국 또한 ‘내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일본 자민당 장기집권의 대미를 장식한 아베 신조 전 총리는 기시의 외손자이며, 아소 다로 전 총리는 요시다의 외손자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고,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이 자원한 것이며, 한국 근대화가 일제 식민지배 덕이라는 따위의 망언을 일삼는 이들이 이른바 친한파·지한파로 알려진 만주 인맥의 직계후손들이다. 그들은 조상들이 주도한 패전 전 ‘대동아공영권’의 제국 일본을 되찾아야 할 이상향으로 여기는 듯하다. 민주당 노다 요시히코 정권도 거기서 거기다. 단절 없는 연속성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552855.html#csidxea8d4d17caa3721b0dad90b9518aa54
태평양 전쟁의 승자 미국은 일제전범을 일괄적으로 처벌하지 않고 다시 기용 했다. 미국은 일본에 반공국가를 만들어서 소련과 중공을 방어 하려 했다. 미국은 남한을 일본의 일부로 취급 했다. 남한의 친일파는 전 일본 제국의 중요한 인물들이나 마찬가지 였다. 그저 능력있는 사람들이고 전범, 친일이라는 약점 때문에 고분고분 말을 잘들어서 편리 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일본을 내쫓은 장본인 처럼 오해하고 있었다. 나라의 주인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한국민의 미군정에 대한 여론은 아주 좋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점을 십분 이용 했다. 민중의 반정부 시위가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폭도가 되었다. 대구 항쟁, 제주 4.3사건, 여순사건등이 다 그런 연유에서 비롯 되었다. 한국군대도 일본 교육을 받거나 일본군 근무 경력이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만들어 졌다. 박정희는 이러한 미군정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중 한 사람이었다.
대구 사범, 교사, 만주 군관학교 예과, 일본육사 출신인 박정희는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로 처들어 오고 일본이 항복하자 거지꼴이 되어 경북구미 본가로 돌아 왔다. 곧 단기 육사를 졸업하고 국군장교가 된 후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내에서 남로당 간부로 활동 했다. 여순사건에 연루 되어 체포 되었다. 사형이 확실하던 판에 미군과 만주에서 같이 일본군으로 근무하던 인맥의 도움으로 살아 났다.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불리워 지는 제임스 하우스만은 박정희를 높이 평가 했고 그가 살아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이후로 제임스 하우스만은 박정희를 계속 해서 뒤에서 후원 했고 5.16 쿠테타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는 설이 있다.
박정희는 쿠테타 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룩하고 대일 청구권으로 받은 자금으로 경제개발의 믿거름을 삼았다. 당시 일본의 관리들은 만주에서 횔동하던 전범들이었고 한국의 관리들은 만주 군관학교, 일본육사에서 교육 받거나 일본군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한 약속은 베일에 쌓여서 밝혀 지지 않고 있지만 아마 위안부와 징용 보상문제도 일괄 타결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일본이 준 돈이나 빌려준 돈은 경제개발 사업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 사업을 여러 일본 기업이 맡아서 했다. 사업계약은 통상 가격보다 훨씬 비싼가격으로 이루어 졌다. 차액을 정치자금이나 부정 축재에 쓰기 위해서 였다.
손자 아베는 외할아버지 기시로 부터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 까? 한국의 경제개발은 내가 박정희를 도와 주어서 이루어 졌다고 하지 않았을 까? 위안부, 징병문제 모두 한일 회담에서 다 일괄 타결 되었다고 일러주지 않았을 까? 박정희는 내가 만주에서 하던 정책을 그대로 써서 한국을 일르 켰다고 하지 않았을 까?
아베가 옛 일본제국의 영광을 되 찾으려고 안간 힘을 썻지만 하나도 제대로 성공 하지 못 했다. 무제한 돈을 푸는 아베노믹스도 실패 했다. 일본경제는 30여년 동안 침체 상태가 계속 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은 일본을 맹열하게 추격 해 왔다. 한국이 일본 땅이라고 믿는 일본 우파의 꿈과는 정 반대로 한국은 일본을 앞서가고 있다. 박정희가 기시의 만주식 경제개발을 했지만 그는 하늘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짖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잘 살고 볼일이다. 만사는 경제로 통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