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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May 27. 2023

1979.10.26-1980.5.17

2. 전두환

2. 전두환

https://timshorrock.com/2022/09/01/key-foia-documents-on-gwangju-5-18/



미국의 대통령은 4년 내지 8년간 머물다 가는 손님이고 사실상의 미국의 외교 정책은 펜타곤과 미국무성 관리들이 수행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박정희은 현실의 변화에 따라 차가운 변신을 하는 경력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 였다.  친일파, 공산주의자, 친미 반공주의자로 그때 그때 바뀌었다. 그러나 그는 일편 단심 민족주의자라고 생각 한다. 다만 현실의 변화에 적응 하여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변신을 해 왔기 때문에 항간의 의심을 받아 왔다.  


죽기전 박정희는 닉슨과 마찰을 빋기 시작 했다. 닉슨의 중공과의 밀월 관계, 우방 월남을 헌신짝 처럼 버리고  미군을 철수 시키는 닉슨, 월남에서 자국군은 철수 시키면서 한국군은 남겨 놓으라는 요구, 한국 주둔 미군 감축 등등은 박정희의 민족주의 적 내심을 들어 나게 했다.  


믿을 수 없는 미국에 대처 하기 위해서 자주국방 정책을 노골 적으로 펼치기 시작 했다. 물론 원폭 제조도 포함 되었다. 그와 동시에 불안 요소가 많은 민주주의를 버리고 좀더 독재적인 유신을 감행 했다.  


마키아벨리식 정치를 했던 닉슨이 인도주의를 앞세우는 선량한 카터로 바뀌었지만 미국의 칼날 같은 무자비한 정책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카터는 그저 점잖은 사랑방 손님이었다.  


소문대로 미국정부가 인권을 무시하고, 야당탄압을 하고, 독재정치를 하고, 원자폭탄을 만들려고 하는 한국대통령 박정희를 소문대로 제거 했다고 가정하고 이후 전개되는 한국의 정국을 분석 해 보기로 한다. 


박정희 제거 이후 미국은 한국에 민주주의를 다시 복귀 시킬 계획이었을 것이다. 간선제였던 헌법을 개정하여 직선제로 하고 당시에 국민의 인기기 높았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소위 3김 중 하나가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물론 이 야당 지도자들이 핵무장을 원하지 않음을 확인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암살 일주일 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터 졌다. 1979년11월4일, 이란 무장 학생들이 테헤란 미국 영사관을 점령하고 외교관 52명을 인질로 잡았다. 당시 이란에서는 친미 팔레비왕 정권을 타도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사망이후 벌어지는 학생 데모를 미국 정부가 이란의 학생 데모에 비교해서 판단 하게 만들었다. 


카터 정부는 한국의 민주화와 정국 안정 그리고 북한의 위협으로 부터의 안보를 놓고 우왕좌왕 하기 시작 한다. 12월6일 최규하는 당시 헌법에 따라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그의 임기는 1984년 12월6일 까지 였지만 조속한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하여 직접선거로 새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약속 했다. 그러나 12.12 사태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사실상의 권력을 가지에 되어 민주화가 불투명 해지자 전국적으로 학생 데모가 퍼졌다. 이 학생데모가 이란 처럼 반미운동으로 퍼질 까봐 카터정부는 불안해 했다. 물론 남한에 소요가 일어 날 때마다 통상적인 북한의 책동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여기에 카터의 민주와 인권 보호라는 이미지가 맏물려, 최규하를 전적으로 지지하여 헌법 개정과 직접선거로 새로운 정부를 만들게 하지도 않고 12.12 사태로 군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에게 최규하를 축출하고 전권을 주어 새정부를 구성하게 하지도 않았다. 미국의 불분명한 태도는 전두환으로 하여금 극단의 조치를 하게 만든다. 전혀 국민의 인지도가 없고 부당한 12.12 사태를 일으킨 그는 도저히 선거로 권력을 장악할 수 가 없었다. 


1980년 봄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학생데모와 야당 지도자들의 활동, 개헌하려는 국회의 움직임은 신군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계엄이 해제되면 군인들은 실권을 상실하게 된다. 1980년5월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조치를 이용해서 최규하를 바지 대통령으로 만들고 전두환이 전권을 장악 했다. 그리고 다음날 5월18일 광주에서 학살극을 벌렸다. 광주에서 북한이 사주한 내란이 일어 났다고 하고 이 지역 출신인 김대중이 내란을 음모 했다고 조작하여 그를 체포 했다. 이외에도 야당 지도자 20여명을 구속 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박정희 암살 후 부터 일어 났다. 만약 박정희 암살을 미국이 기획 했다면 이후의 사건들에 대한 미국의 책임도 막중하다고 생각 한다. 1979년10월26일 부터 1980년 5월17일 까지의 미국은 암암리에 전두환의 행위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관망하여 그가 정권을 잡도록 했다. 광주 시민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미국에 호소 하려 했어도 미대사관은 수수방관 했다. 군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주한미군 사령관도 신군부가 한미연합사 병력, 전방 부대, 특수부대를 동원해도 내버려 두었다. 


https://jacobin.com/2020/06/gwangju-uprising-korean-war-seventieth-anniversary


1979년 12월14일, 전두환과 신군부가 군을 장악한지 이틀 후, 주한 미 대사 글라이스틴은 미중앙정보부 한국 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의 교섭으로 전과 미대사관 관저에서 만났다. 보안대장이었던 전두환은 브루스터의 친구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미국이 전의 쿠프를 인정한다는 신호 였다. 이 회합 후, 글라이스틴은 12.12 사태 직후 본국에 보냈던 전문에 "이름만 제외하고는 사실상의 쿠프" 라고 했던 것은 경솔 했다고 하면서 쿠프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본국정부에게 충고 했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이 어떴든 아직도 정부의 구조가 건전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쿠프는 아니다."라고 했다. 글라이스틴은 미국이 남한이 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전두환 장군의 군을 동원하는 긴급조치를 인정 해주었다고 믿었다. 


주한 미군 사령관이었던 존 위크함에 의하면,  전이 그의 부하들에게 미대사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미중앙정보부 한국지부장 부르스터를 이용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이 권력을 장악한 다음, 브르스터는 위크함에게 전은 "거리를 두어야 할 인물이지만, 한국에 있는 오직하나의 쓸만한 인물(the only horse in town)"이라고 말 했다. 미국정부가 일개 군 정보 요원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만의 보고에 의지하여 박정희를 다루었 듯이 아마 전두환에 관한 모든 미국의 정책이 로버트 부르스터의 충고에 의해서 결정되었지 않았나 의심해 본다. 


1980년5월22일(한국시간 5.21), 백악관 상황실에서 "정책검토회의"가 열렸다. 국무장관 Edmond Muskie,

국방장관 워랜 크리스토퍼,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외무 차관 리차드 헐부루크, 백악관 안보 고문 Zbugniew

Brezezinski, 중앙정보부 스텐스필드 터너 원수 등이 참석 했다. 1시간15분 동안 계속된 회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광주에서 학살이 한참진행된 후의 일이다. 광주 시민은 미국의 호의적인 반응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의 상황에 대한 토론 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책에 동의 했다. 광주의 질서 회복이 기장 중요하다. 이것은 나중에 광범위한 무질서를 초래할 원인 제공을 하지 않도록 필요한 최소한의 무력을 동원하여 한국 기관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브르제진스키 박사(Security Advisor)는 이와 같은 대처 방안을 '단기적으로는 (신군부를) 지지, 장기적으로는 정치개혁에 대한 압력'"이라고 요약 했다. 


그날, 주한미군 사령관 위크함은 자기 지휘하에 있는 두 보병사단을 광주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서 한국군에게 내주었다. 미국 정부는 인도양에 있던 항공모함 "코랄 씨"를 북한의 도발을 방지 하기 위해서 한반도 근해로 이동 했다. 


1996년, 탐정 신문기자 Tim Shorrock은 미국이 전의 시민을 탄압할 특수 부대 동원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폭로 했다. 1980년5월23일 고위 직원 국가안보위원회 내부 메모에 의하면 워싱톤이 한국군 이동 현황과 지역 "반란"의 뒤에 있었음을 인정했다. 


아직 확실한 증거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미 중앙정보부 한국 지부에서 부터 백악관 까지, 모든 정책 기관 상하를 막론하고, 미국은 자국 시민들을 탄압하는 악랄한 쿠프 지도자를 보호 했을 뿐만아니라 더 나쁜 행위를 하도록 도와 주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1980년 8월27일 전두환은 서울 장충 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서 대통령에 선출 되었다. 1981년 1월20일 로날드 레간이 40대 대통령에 취임 했다. 1981년1월28일, 레간 대통령은 취임 첫 외국 정상 손님으로 전두환을 초청 했다. 전두환은 그 댓가로 김대중을 살려 주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미국으로 망명 했다. 다 미국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브르제진스키 박사의 "장기적인 정치 개혁을 위한 압력"의

시작이었다. 독재에 항거하는 야당지도자를 지지 하면 독재자 전두환을 흔드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1945년 부터 오늘날 까지 한국에 미국의 흔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대구 10월 항쟁,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4.19,  5.16, 12.12, 5.18, 6월 항쟁의 결과는 항상 미국이 지지하는 쪽으로 결정 되었다. 미군정의 힘으로 나라가 만들어 졌고 북한과 공산 세력으로 부터 미국이 보호 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식의 국가 운영이 영구적으로 계속 될 수는 없다. 더구나 이분법으로 세상이 돌아가던 냉전시대에서 미국이 유일한 슈퍼 파우워였던 시대를 지나 중국과 미국이 대립하는 시대로 변한 현 시점에서 "미국 보호령"에 가까운 국가로 존재해서는 않된다. 


다행히 한국의 국력이 신장하여 세상 어떤나라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우선 안보 미국, 경제 중국을 기본으로 한 정책으로 현실에 대응 하고 궁극적으로는 힘을 바탕으로 한 중립국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핵무장, 핵 잠수함. 그리고 항공모함을 보유한 자주국방을 이룩 해야 한다. 한국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추구 한다고 해서, 미국이 박정희 처럼 암살을 기도할 정도로 이제 한국은 약하지 않다. 

남한이 이쯤되면 북한은 존재가 미미하거나, 한반도에는 한국 주도로 통일 된 한 나라만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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