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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Aug 10. 2023

과연 원폭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겼을 까?

소련의 진공이 일본을 항복하게 했다.

히로시마 원폭 후


원자폭탄을 처음으로 제조한 오펜하이머 박사의 일생을 극화 한 영화 “오펜하이머”가 성황리에 상영 중이다. 한국에서는 8월15일에 개봉한다고 한다. 코비드19 유행 이후 3년만에 처음으로 영화관에 가서 이 영화를 보았다. 3시간이나 되는 영화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나의 관심은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꼭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트려 수많은 민간인을 살상했어야 했는 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미국 측의 설명은 원폭이 없었으면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려야 했기 때문에 전투하는 동안에 희생되었을 수많은 미국인들과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일본이 원폭 투하가 아니었더라도 같은 시기에 항복했을 것이라고 하면 이것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오펜하이머가 주도했던 만하탄 프로젝트는 나치 독일 보다 먼저 원폭을 만들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프로젝트가 진행중 소련이 핵 경쟁에 뛰어들면서 미국은 나치와 소련 보다 먼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박차를 가 한다. 1945년7월16일 미국이 인류 최초로 핵실험에 성공했을 때는 독일은 이미 항복해서 핵무기를 사용할 대상이 아니었다. 미공군과 해군의 대량 폭격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아직도 항복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막대한 예산, 수많은 인력,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하여 만든 인류 최초의 최고로 강력한 폭탄의 위력을 실전에 옮겨 그 위력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일본이었다.

 

미국은 1945년11월1일 지상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점령 작전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7월16일 미국이 원폭 실험에 성공하고 8월6일에 히로시마, 8월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8월10일에 일본 천황이 포츠담 선언에 따르겠다고 하여 사실상 항복의 뜻을 밝혔다. 


1965년 역사가 Gar Alperovitz는 원폭이 실제로 전쟁을 즉시 끝나게 했지만, 일본의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아도 항복하려고 했고, 11월1일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기 전에 항복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은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6명의 최고 권력자들로 구성된 최고회의에서 결정했다. 8월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지만 최고회의는 소집되지 않았다. 무조건 항복을 논의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최고회의가 열린 날은 8월9일이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회의 중에 원폭이 투하되었고 회의에 참여했던 지도자들이 이 소식을 들은 것은 회의가 끝난 후였다. 


그러면 왜 6명의 일본 최고의 지도자들은 무엇 때문에 하필 그때 무조건 항복을 논의하고 있었을 까? 

일본은 지고 있는 전쟁의 말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강경파 지도자들 까지도 전쟁을 지속핳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을 계속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유리한 조건으로 끝내느 냐가 관건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소련은 일본과 1941년 4월부터 1946년까지5년 동안의 중립조약을 맺고 있어서 중립이었다. 일본은 전범재판을 피하고, 현정부의 형태를 유지하고 전쟁 동안에 점령한 지역의 일부를 유지하는 등의 조건을 성취해볼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첫번째 전략은 외교적으로 중립적인 소련으로 하여금 연합국과 일본을 중재하여 일본이 원하는 조건을 달성하려는 방법이었다. 소련에게도 미국이 아시아에서 많은 이권을 차지하면 불리하다는 점을 이용하려 했다.

두번째는 미군이 상륙하면 일본제국육군을 동원하여 미군에게 많는 사상자가 발생하게 하여, 미국이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고 전쟁을 끝내게 한다는 전략이었다. 이것은 육군장관 아나미 코레치카의 아이디어였다.


8월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 때만 해도 두가지 전략이 살아 있었다. 스탈린에게 중재를 부탁할 수 있었고 미군에게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할 수 있었다. 8월8일에 외무장관 토고 시게노리는 수상 수주키 칸타로에게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한 토의를 하기 위해서 최고회의를 소집하자고 제의했으나 칸타로 수상은 이를 거절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무조건 항복을 고려할 만한 사건이 아니었고 아직도 일본은 스탈린의 중재로 조건부 항복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날인 8월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전에 무조건 항복에 대한 토의를 하기 위해서 최고회의가 열렸다. 


소련군의 일본 만주 관동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은 8월6일과 8월9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1945년8월8일 바이칼 시간 오후 11시에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8월9일에 만주와 사할린으로 처들어 왔다. 

1941년4월에 소련이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은 이유는 서쪽에서 독일과 전쟁을 하는 동안에 일본이 소련을 침략하면 동과 서에서 적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일본 또한 만주에서 소련 태평양에서 미국과 전쟁하기는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5년8월에는 이미 독일이 항복했기 때문에 소련은 동북 아시아에 전선에 병력을 보낼 여유가 있었다. 실제로 소련은 독일이 항복한 이후 동부로 병력을 이동하고 있었다. 


이제 일본은 본토 상륙을 기다리고 있는 미군과 사할린을 점령하고 혹가이도로 들어오는 소련군을 상대해야 했다. 하나의 강대국도 힘든 데 두개의 강대국은 일본이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일본 지도층의 두가지 조건부 항복 전략은 소련군 침공으로 인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1945년8월9일 오전10시30분, 소련군이 만주와 사할린으로 처들어 오고 있는 동안 일본 최고 지도자 6명은 최고 회의를 소집하고 무조건 항복을 논의하고 있었다. 6명 외에 의정원원장과 천황이 참석했다. 11시 2분, 회의도중에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했던 최고 지도자들이 이 사실을 보고 받은 것은 회의가 끝난 후 그날 오후였다. 포츠담선언을 수락하느 냐 거부하느 냐를 놓고 표결에 붙였더니 3:3 이었다. 천황 히로희또가 직접 나서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고 결정했다. 포츠담 선언은 1945년 7월26일에 미국, 영국, 중국이 일본에게 일본의 처참한 파괴를 원하지 않으면 당장 무조건 항복하라는 내용의 선언이었다. 이 선언을 인정하는 것은 무조건 항복을 의미했다. 소련은 일본과 중립조약이 유효 했기 때문에 이 선언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이후에 서명했다. 


다음날 1945년8월10일 이른 아침, 일본제국 외무성은 스위스를 통해 미국에 “천황의 대권을 손상시키는 어떤 조건도 없다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겠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미국은 이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B-29 400대를 동원하여 일본 각지에 대량으로 폭격을 계속했다. 


8월14일 에야 일본제국 외무성은 미국에게 포츠담선언의 항복조건을 수락하겠다는 전문을 보냈다.


원폭투하가 일본을 미군이 본토에 상륙하기 전에 항복하게 했 다기 보다는 소련의 만주와 사할린 진공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다면 세계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 까? 일본에서 원폭의 위력을 경험한 인류는 “핵 보복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핵을 가진 나라를 먼저 공격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 처럼되었다. 냉전시대는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큰 전쟁 없는 장기간의 평화 시대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들 덕분이다. 이들을 제물로 바친 인류는 핵 덕분에 장기간의 전쟁 없는 냉전시대를 평화롭게 살수 있었다. 


핵을 만든 인류는 그것을 한 번도 쓰지 않고 쌓아 놓았을 리는 없다. 일본에서 실전에 사용하지 않았다면 다음으로 써볼 가능성이 높은 전쟁은 한국전쟁이었지 않을 까 하고 상상해 본다. 그 위력과 잔악성을 아직 모르는 미국이 중공에게 패퇴 할 때 만주에 핵공격이라는 카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참고:

1. 개벽예감 407; 재안불러온 포츠담의 검은 그림자, 한호석 2020.8.20 충청메시지

2. The Bomb didn't beat Japan. Stalin Did.; Have 70 years of nuclear policy based on a lie?; Ward Wilson, FP May 3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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