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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Mar 10. 2021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인가?
제3부 한국전쟁

제16장 춘계 공세, 거제도 포로 수용소, 문재인의 고향

중공군 춘계 공세


영국군 그로스터 연대

1951년 4-5월에 중공군은 남한에서 유엔군을 몰아내고 한반도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총공격을 감행 했다. 이를 중공군 5차공세 또는 춘계공세라고 한다. 마오 제둥이 청천강과 장진호 전투에서의 승리에 도취되어 미군을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었다.   


마오의 명령에 따라 야전사령관 펑더화이는 중공군 3개 야전군과 인민군 3개 군단을 재정비 집결 시켰다. 무려 70만 대군이었다. 제3, 제9, 제19군집단 27만명을 서울 방면 공격에 동원 했다. 214,000명은 지원 및 수송등을 맡은 전략 부대로 제외하고 나머지 병력은 다른 지역에 분산 배치 했다. 마오 쩌둥은 제3군과 19군에 4개의 야포 사단, 2개의 장거리 포 사단, 1개의 다연장 로켓포 사단과 4개의 전차여단을 2월부터 보냈다. 중공군 개입이래 최대의 화력이 었다. 팽은 서울 점령을 단기적인 목적으로 하고 마오에게 노동절 선물로 서울을 약속 했다. 


그러나 빈약한 장비로 북쪽 산악지대에서 유리 했던 중공군은 비교적 평야 지대인 남쪽에서 유엔군의

화력과 공군력에 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국군과 미군은 전쟁이 진행 되면서 전투력이 향상되어 전쟁초기의 적만 보면 무서워서 도주 하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국군은 150,000명 유엔군은 도합 418,000명이었다. 그러나 서해에서 동해 까지 펼쳐져 있는 긴 방어선에 빈틈없이 진을 치기는 불가능 했다. 


1951년4월22일 중공군은 임진강 남쪽 연안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 군을  공격 했다. 이곳을 방어 하고 있던 영국군과 벨기에 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을 맞이 하여 선전 했다. 3일 동안 위치를 사수하여 일단 중공군을 격퇴 시켰다. 중공군 사상자는 1만명이 넘었다. 그러나 영국군 사상자는 1000여명 이었다. 영국군은 필립핀 군대의 도움으로 퇴각하여 서울 북방 5마일에 방어선을 쳤다. 무명전선이라고 했다. 중공군의 공격은 이 방어선에서 저지 되어 서울 함락에 실패 했다. 그러나 유엔군은 서쪽에서 상당한 38선 이남의 영토를 북한에 내주었다. 


영국군 제27보병여단은 가평협곡에 주둔하여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을 방어하고 있었다. 4월23일 오스트랄리아 군대와 캐나다 군대가 급하게 영국군에 합류 했다. 세나라 군대는 중부전선이 뚫리는 것을 막고 중공군 공격의 예봉을 꺾어 놓아 서 중공군 전체의 공격을 정지 시켰다. 


4월의 중공군 공격은 일단 실패 했다. 그러나 마오의 고집으로 펑은 할 수 없이 1951년5월15일 다시 총 공세를 폈다. 중공군10만명이 소양강 동쪽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과 미 10군단을 공격 했다. 5월21일 중공군은 용문산 전투에서  국군에게 패하여  소양강 근처로 후퇴 했다. 5월 말에 중공군은 38선 이북으로 후퇴 했고 미8군은 중공군 180사단을 완전 포위 섬멸 했다. 5,000명이 항복 했다. 


중공군은 38선 이북에서 방어선을 치고 유엔군이 한치도 점령 할 수 없도록 방어 했다. 6월1일 이후에는 유엔군의 공격도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중공군은 서울 함락에 실패 했고 유엔군은 서울 북방 서쪽에서 38이남의 영토를 인공에게 내주었다. 특히 개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 했다. 


1951년7월10일  중공과 미국은 개성에서 휴전 회담을 시작 했다. 이후로는 전쟁은 답보 상태

에 돌입 했다.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아무런 실효 없이 인명과 재산 피해만 발생하는 허망한 전쟁으로 

변했다.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 질 때까지 국지적인 땅 빼앗기 전쟁 노름은 무려 2년동안 계속되었다. 양측이 합의를 보지 못한 가장 큰 문제는 포로 송환이었다. 이들은 대한민국, 인공, 중공, 중화민국(타이완)중 하나를 골라 잡아야 하는 기로에 섰다.


거제도 수용소(This Kind of War 번역)


거제도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1951에는  부산에서 배로 5시간이 걸렸다. 2010년12월 거제 부산사이에 거가대교가 개통 되어 1시간 정도 면 갈 수 있다. 수려한 경치로 관광이 활발하고, 조선업, 어업이 발달 하여 풍요로운 거제도는 슬픈 역사를 간직 하고 있다. 


비교적 높지 않은 산이 많고 그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계곡 사이사이에 있는 논에는 벼가 자라고 있었다. 거제도 사람들은 16세기 임진왜란 때나 20세기 한국전쟁 때나 이 아름다운 섬에서 농사 짓고 고기 잡으며 살아 왔다. 


1951년 거제도는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로 북적 거렸다. 부산이 만원이어서 밀려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년초에 예상치 못했던 불청객들이 나타 났다. 8만여명의 유엔군이 잡은 포로 들이었다. 먼 바다에서 보면 아름답게 보이지만 안에 들어오면 육지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1951년 1,2월은 중공군의 뜻하지 않은 개입으로 미군이 황급히 퇴각하던 시기 였다. 미국은 남한을 포기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포로 문제는 뒷전 이었다. 포로 수용소 관리를 부산에 있는 제 60 일반 창고 부대(General Depot)가 맡았다. 이 부대는 후에 제2 군수 사령부가 되었다. 


포로 관리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먹이고 입히고 감시하고 말잘듣게 길을 들여야 했다. 그들은 보급장교 였지 헌병이 아니었다. 더구나 포로들은 문화와 환경이 다른 동양인들 이었다.

또 한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다. 사상문제 였다. 


미 당국은 10만명에 달하는 오리엔탈을 국내로 들여와서 가두어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오리엔탈은 니거와 같이 동양인을 비하하는 말임)


노스 캐롤라이나가 고향인 윌리람 그레고리 소령은 조달 장교에 임명 되었다.  부산에서 무려 4만명의 포로가 거제도에 실려 왔다. 모두 논바닥에 모여 놓았다. 막사는 커녕 주위에 철조망도 없었다. 이들을 지키는 병력은 겨우 200명이었다. 다행이 춥고 배고파서 아무 표정이 없는 그들은 조용히 가만히 있었다.  


그레고리 소령은 거제도를 속속들이 뒤져서 쌀을 있는 대로 사들였다. 공병이 지어놓은 창고 가득히 쌓아 놓았다.  쌀, 생선, 채소등이 사들이기가 바쁘게 없어 졌다. 굶주린 포로들은 대식가 들이었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거제도의 식품이 동이 났다. 그때 마침  일본에서 보급이 들어 왔다. 식량문제가 해결되자 그레고리 소령은 수용소 건물을 짓는 임무를 맡았다. 건물을 짓고 주위에 철조망 울타리를 쳤다. 그리고 하수도를 바다로 빠지게 설치 했다. 수용소 공사에 거제도민 반이 고용되었고 미군이 주는 임금은 호재 였다.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은 미군과 거래하여 돈을 벌 었다.


예산이 부족하여 충분한 막사를 짓지 못해서 좁은 방에 많은 포로가 기거 했지만 포로들은 조용 했다.

첫 포로가 거제도에 도착한 지 5주 후에 포로관리를 특별히 훈련받은 헌병대가 본국 조지아에서 거제도에 도착했다. 


헌병대장 피처랄드 대령은 참모회의 에서 “이 사람들은 우리와 평등하다. 우리들의 임무는 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이다” 라고 말 했다. 미국정부는 민주주의가 공산주의 보다 좋은 제도라는 것을 포로들에게 각인 시키려고 했다.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인간대접을 해줄 것입니다. 포로들을 학대하거나 말을 듣지 않는 다고 폭력을 행사하면 군사재판에 넘길 것이다. 우리는 이사람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처 줄려고 왔다. 우리는 이일을 강압적으로 해서는 안된다.”라고 훈시를 마쳤다.


보급을 맡은 빌(윌리암) 그레고리에게  포로들이 달라고 하는 것은 전부 주라는 명령이 떨어 졌다. “우리는 너희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여기 왔다. 무엇이든 필요 하면 말해라.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 공산주주의자가 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우리가 하는 대로 하면 너희들은 세상에서 제일 잘 살 것이다.” 라고 포로들에게 말 했다. 


포로들을 부추기는 데는 미국외에도 적십자, 유엔 코미숀도 한몫 했다. 포로들은 민주주의를 설명한 책과 미국헌법을 읽었다. 그러나 포로중에는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군들이 쓰고 버린 운동기구도 주었고 병원을 짓고 필요한 약과 의료기구도 보급되었다. 인공과 중공의 의사들이 진료를 담당 했다.


포로들이 모두 모여서 식사할 수 있는 커다란 식당도 지었다. 포로중에서 주방장을 뽑았다. 그는 돌과 흙으로 한국식 부엌을 만들고 수저 젓가락 등 한국식 식사 용품도 마련해 주었다. 더많은 쌀, 생선과 채소를 주었다. 그들은 90%의 포로들이 일생동안 먹어보지 못한 양의 음식을 먹고 지냈다. 


포로들에게 새 옷이 지급되었다. 물론 양말과 군화도 주었다. 포로들은 그들을 감시하는 미군 보다 더

근사하게 보였다. 미군 장교들은 복장을 사서 입어야 했지만 이들에게는 공짜로 지급되었다.

의식주를 해결해준 다음 미군은 사상 분류를 해야 했다. 8만명의 한국인 포로 중에는 남한에서 인민군에게 끌려와서 국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북한에서 인민군이 되어 전쟁에 참여한 인민군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공군 포로 6천명 중에는 장개석의 국민당군이었다가 중공군에 강재로 편입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과 이들의 가족은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 수용소 안에서는 이미 새로 만들어 진 집단 끼리 대립하는 분위기가 형성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감시하는 미군은 집단끼리 서로 헤게모니를 잡으려고 경쟁하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군은 공산주의자와 아닌사람들을 똑 같이 대접해 주었다. 


사상분류가 끝난 후 골수 공산주의자들을 모아 한 부대로 만들었다. 미군의 목적은  포로들에게 공산주의의 영향을 최소화 하는 것이었으나, 오히려 힘을 모아 포로들을 분열 시키는 작업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컴파운드 76이 대표적인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있는 막사 였다. 부대장 이학구는 낙동강 전투 말기에 투항한 인물이다. 그 밑에 황철이 있었다. 그러나 실권은 황철이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부대를 장악한지 얼마지나지 않아서 화장실과 수체구명에서 시체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다. 점호에서 누락된 인원은 도망자로 처리되었다.


찍소리 못하고 눈치만 보던 포로들은 미군이 후한 대접을 하는 것을 보고 기가 살아 났다. 새로 선출된 포로대표가 유엔군 대표를 만날 때 마다 여러가지 것을 해달라고 요구 했다. 그러나 미군은 군말 없이 들어 주었다. 그들은 낄낄 거리고 좋아 했다. 백색도료를 달라고 해서 주엇더니 소용소 마당 돌에 중공기, 인공기와 미국기를 그려 넣었다. 유성기, 종이, 잉크, 등사판과 작업도구등등 모두 얻을 수 있었다. 


포로들은 철판, 톱, 망치, 못등을 얻어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어떤것들은 내무반 마루바닥 밑에 감추었다. 자유분망하게된 포로들은 감시병들을 깔보기 시작 했다. 감시병이 좀 강압적으로 나가면 감시병 얼굴에 침을 밷는 포로도 있었다. 어느날 한 상사가 빌 그레고리에게 다가와서 “써, 누가 포로를 구타하면 보고하라고 하셨죠? 오늘 제가 한놈을 때렸 습니다.” 라고 하자

그레고리는 “그런거는 보고하는 게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어느날 수용소 마당에 형용색색의 깃발이 계양 되었다. 흰 매트리스 커버를 벗겨서 만든 것이었다. 깃발에는 공산주의 선전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 병사는 철없이 그레고리에게, “참 예쁘내요. 그들은 재주 꾼 들이예요” 라고 말 했다. 


그레고리는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었다. 하수관 4개를 설치 했는 데 그 중 하나가 바다로 배설물이  나가게 돼 있었다. 배설관의 끝은 55 갤론 드럼통이었다. 비치에서 300 피트 바다 속으로 들어 가게 했다. 그러나 썰물일 때는 드럼통이 육지로 들어 났다. 문제는 포로들의 딱딱한 

대변이었다. 대량의 쌀을 먹어 치워서 만들어지는 대변은 물에 녹지 않고 그대로 비치에 노출 되었다. 

1951년 거제도 해변가는 세상에서 보기드문 경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포로수용소가 틀이 잡혀가면서 거제도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서번트, 하우스 보이, 세탁하는 사람, 이발사등으로 고용되었다. 그들은 아주 후한 임금을 받았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수용소 안 사무실은 미군보다 한국인 고용인이 더 많았다. 아직 고용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철조망 밖에서 안에 있는 미군과 포로들에게 물건을 팔 았다. 


국군 2개 대대가 감시병으로 차출되었다. 이들 가족들은 미군과 포로를 상대로 하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고 미군이 하는 공사에 고용되었다. 


두 영리한 한국인은 부산과 거제도 왕래가 많아 지는  것을 알고 두대의 디젤 바지선을 사서 기존의 페리 운항을 보조 했다. 물론 새 사업은 번창 했다. 


남한정부는 흥남 철수 때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을 거제도에 퍼 내렸다. 이중 많은 여자들이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상상할 수 없는 높은 임금을 받았다. 


장교 클럽도 만들어지고 감시병들의 복장도 말끔해져서 포로 수용소는 제 모습을 찾아 갔다.

포로들은 작업실에서 무엇인가 만드는 데 분주 했다. 그들은 노래도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즐겁게 지냈다. 그러나 가끔 매맞아 죽은 시체가 하수도를 막는 일이 벌어 졌다. 


포로들은 신문을 대량으로 발행 하여 부산까지 배포 했다. 그레고리는 어떤 기사가 실리는 지 통역관에 물어 보았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군이 얼마나 바보인가를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 했다. 큰일이 날 조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아버지 문용형과 어머니 강한옥은 1951년12월23일 메러디스 빅토리아 호를 타고 흥남을 출발하여 거제도에 내렸다. 대통령의 아버지 문용형은  포로수용소 노무자로 일했고 어머니 강한옥은 행상을 했다. 아마 이 때는 비교적 잘 살 았을 것이다. 휴전후에 포로수용소가 없어지면서 살기가 어려워서 부산으로 이사를 가지 않았나 짐작 해 본다. 문재인은 1953년1월24일 거제도에서 태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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