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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Mar 01. 2021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제3부 한국전쟁

15장 1.4후퇴, 워커, 리지웨이, 피난민

1.4 후퇴, 워커, 리지웨이 중장, 피난민

리지웨이 중장


청천강 전투에서 패한 미8군은 임진강 유역으로 퇴각하고 서울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 했다. 1950년12월23일,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자기 아들 샘 워커 대위가 은성 무공훈장을 받게 된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동중 도봉구 도봉동(당시 양주군 노해면)근처에서 국군 6사단 소속 차량과 추돌하여 자신이 타고 가던 지프차가 전복하는 바람에 차에서 떨어져서 사망 했다.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는 충실 한 군인 이었다. 과묵한 그는 맥아더 처럼 자신의 전과를 과시하지 않았다. 주어진 임무를 최선을 다 해서 수행 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유역 방어선을 인민군의 공격으로 부터 훈련이 부족하고 싸울 의욕이 없는 병력을 그 특유의 불독 같은 추진력으로 독려하여 훌륭하게 막아 냈다. 인천상륙 작전을 가능하게 한 것도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뚫고 북으로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의 가장 큰 공은 그에게 돌아 갔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도 인천 상륙 작전은 맥아더와 함께 신화 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국전쟁을 하나의 그림에 비교하자 면 그림의 바탕은 워커의 작품이었고 덭칠로 그림을 빛나게 한 것은 맥아더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세상은 항상 공평하지 않다. 


워커가 비운 자리를 Matthew Ridgway 중장이 매꾸었다. 공수부대 출신인 그는 워커와 달리 끼가 있는 장군이었다.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는 미군에게 안성맞춤인 인물이었다. 금상첨화로 군인이 꼭 갖추어야 할 작전능력에도 줄충 했다. 그가 부임할 무렵 미군은 싸울 의욕이 완전히 상실 된 상태였다. 북한을 지구상에서 없애고 크리스마스 전에 집에 갈 기대에 부풀어 있던 장병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튼튼한 체격에 부리부리한 코는 리지웨이에게 독수리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당시의 8군이 꼭 필요한 지휘관이었다.  “전쟁이란 다 병사들의 정신력(mind)과 열정(heart)에 달려 있지, 전투는 작전계획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병사들의 열정(heart)으로 이기는 것이야” 라고 말하곤 했다. 리지웨이는 강한 사람이면서 달변가였다. 그는 생각할 줄 알았고 자기 생각을 글로 써서 또는 말로 표현하여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This Kind of War 에서)


중공군의 개입은 한국전쟁을 인공과 유엔군(미군)의 전쟁에서 중공과 유엔군의 전쟁으로 바꾸어 놓았다. 청천강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유엔군이 패퇴 하자 맥아더와 투루만 정부는 크게 당황하여 한동안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전개 되었다. 맥아더가 만주 폭격, 원폭 투하, 대만으로 하여금 중국본토 공격등 확전을 주장하자 트루만도 이에 동조 하는 듯 했다. 그러나 세계 여론은 이에 냉담 했다. 2차대전이 끝난지 겨우 5년만에 또 세계대전을 치루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트루만 행정부도 유엔의 결정에 따르기로 가닥을 잡았다. 

1950년12월11일 유엔은 38선에서 중국에게 휴전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12월23일 저우엔라이는 유엔 휴전 협정 제의를 거절하고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철수 할 것을 요구 했다. 


유엔군이 청천강과 장진호에서 후퇴 했지만 이전투에서 중공군의 피해도 막심 했다. 약 40%의 병력이 전투 불능 상태였다. 자동차, 항공기와 배로 이동하는 유엔군을 도보로 추격할 수도 없었지만 병력 손실로 도망가는 적군을 바짝 추격하기는 무리였다. 더구나 부족한 보급은 중공군을 괴롭혔다. 남으로 갈 수록 보급거리는 점점 멀어 졌다. 


중공군 야전사령관들이 휴전을 원했던 반면에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의외의 미군 격파에 크게 고무 되었다. 중공군이 청천강 전투에서 승리하자 마오 제동은 김일성에게 또 한번 남침을 시도 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마오는 미국과 유엔의 휴전 제안을 유엔군의 한반도 철수로 받아들이고 3차 총공세를 명령 했다.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을 무시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한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아마 이 두사람의 오판은 백만에 가까운 생명을 더 앗아 갓을 것이다.  계산 할수 없는 재산과 국토의 피해는 차치하고 라도 말이다.                                                                                                   


3rd battle of Seoul(Wikipedia)

서울은 38선에서 겨우 35마일 남쪽에 있다. 북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은 3개이다. 33번국도는 한탄강에서 시작하여 의정부를 지나 서울에 도착하고,  이보다 조금 서쪽 임진강에서 시작하는 길은 개성-문산-고양을 거쳐 서울로 통하고, 동북쪽에서 춘천을 거처 서울로 들어오는 길이다. 


서울의 12월 말 1월초의 날씨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였다. 모든 강은 꽁꽁 얼어 붙었다. 중공군이 남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중공군 야전사령관 팽 두후에이는 1950년12월7일 마오에게 중공군 사상자를 보충하고 보급을 확보 하고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데 적어도 3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전문을 보냈다. 중공군은 전쟁 시작 부터 부족한 보급을 현지에서 조달할 계획이었지만 38선 근방의 주민들은 중공군에게 냉담했고 때로는 이들을 공격 했다. 적의 총탄 보다는 기아와 한파가 더 무서운 적이었다. 


1950년12월26일 도쿄에서 맥아더에게 신고한 다음 한국 전선에 부임한 리지웨이는 부하들에게 적군(중공군)의 상황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나 대강 약 170,000병력이 남진하고 있다는 것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무런 싸울 의욕이 없이 집에 갈 생각만 하고 있는 장병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전방을 시찰한 후 리지웨이장군은 미군 1군단과 9군단에게 고양과 의정부를 잇는 서울 방어선을 구축하게 했다. 서울에서 빠져나올 때 한강을 건널 시간을 벌기 위해서 교두보(bidgehead line)을 설치 한 것이었다. 


워커 장군은 사망하기 하루전인 12월22일에 미8군 예하의 미군 1군단, 9군단과 국군3군단을 38선을 따라 배치하는 것을 완료 했다. 1군단과 9군단은 임진강과 한탄강을 방어하고 국군3군단은 춘천지방을 지키고 있었다. 33번국도 양쪽에 1군단과 9군단, 서쪽(문산 쪽)은 국군1사단이 동쪽(춘천 방향)은 국군 3군단이 맡았다. 

전쟁초기에 대규모의 사상자를 낸 국군은 충분한 훈련을 시킬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전투능력이 떨어지고 화력과 보급이 미군에 비해서 취약 했다. 중공군은 청천강과 장진호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를 보충할 시간이 없었고 식량과 방한에 필요한 군복의 조달이 형편없는 실정이었다. 중공군은 미군과의 전투를 피하고 한국군 방어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950년12월31일은 다음날이 새해여서 공휴일이었다. 마침 보름이었다. 그날 저녁, 중공군은 총공격을 개시 했다. 한탄강 과 임진강 유역에서 국군 1사단을 섬멸 했고 6사단을 후퇴하게 했다. 춘천 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국군 3군단도 후퇴 할 수 밖에 없었다. 1951년1월1일 38선 방어선이 무너지자 리지웨이는 1월3일 서울에서 총 퇴각할 것을 명령 했다. 


춘천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3군단이 후퇴하자 리지웨이는 서울 북방의 미 8군이 중공군에게 포위 될  것을 우려 했고 유엔군의 전투 능력에 자신이 없었다.  한편 중공군이 서울을 장악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 하고 있던 중공군 사령관 팽은 유엔군이 서울에서 후퇴하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반가운 일이었다. 중공군 13군에게 후퇴하는 유엔군을 추격하라고 명령 했다. 


군부대가 후퇴 할때는 가능한 많은 무기와 보급품을 가지고 가지만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파괴하고 떠난다. 군과 군수물자 수송이 모두 끝난 후 김포공항과 인천항은 은 철저히 파괴 되었다. 인천에서 김포까지 깔아 놓은 가솔린 수송관도 폭파 했다. 인천상륙 작전 때 첫 상륙지였던 월미도는 가장 늦게 파괴 되었다. 인천시도 적이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은 모두 폭파 했다. 


1951년1월4일 오후 중공군이 서울에 들어 왔다. 그러나 서울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빈도시였다. 6월 부터 9월 까지 인공치하에서 공산당 맛을 본 시민들은 중공군이 들어온 다는 소식에 근교의 시골이나 남쪽으로 떠났다. 120만이 살던 서울은 20여만명으로 줄었다. 남한 정부도 부산으로 미리 옮겼다. 서울은 잿더미에 타다 남은 화염이 여기저기 보이는 폐허 였다. 패배한 것은 중공군도 아니고 미군도 아니었다. 한국사람들이었다. 1월4일 오후 1시, 인민군은 서울 시청에 인공기를 계양 했다. 9월28일 서울을 내준지 3개월여 만이었다. 1월7일 중공군 사령관 팽더이는 유엔군 추격을 멈추고 치처빠진 병사들을 휴식하게 했다.


리지웨이는 1월7일 미 1군단과 9군단을 평택-안성 라인 까지 후퇴 시켰다. 재빠른 후퇴로 유엔군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중공군에게는 큰 승리였다. 미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리지웨이는 미군의 전투능력에 크게 실망 했다. 그는 곧바로 사기진작을 위한 노력을 시작 했다. 


1951년2월1일, 유엔은 중국이 유엔의 휴전 협정 제안을 거절한 것을 이유로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 했다.

이로인해서 중공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극심한 경제난과 유엔에서의 역활을 타이완 정부(중화민국)에게 내주는 불이익을 보게 되었다. 


미공군의 1950년12월15일 중공군 보급로 폭격은 중공군 보급에 치명타를 주었다. 중공군 군수물자 보급 부족과 끝임 없는 전투는 병사들을 지칠대로 지치게 해서 더 이상 전투를 계속 할 수가 없었다. 마오는 야전사령관들의 청원을 받아들여서 2,3개월 휴식을 취하고 보급을 충분히 한 다음에 1951년 봄에 총공세를 펼 것을 허락 했다. 그러나 리지웨이 는 1951년1월25일에 반격을 시작 했다. 


1951년1월15일 리지웨이는 미 1군단에게 중공군 동향을 알아보기위한 정찰 임무를 주었다. 정찰 임무를 맡은 25사단은 1월20일, 수원-금양리 남쪽에는 중공군이 없고 그 북쪽에 중공군이 진을 치고 있다고 보고 했다. 리지웨이는 1월22일 똑 같은 정찰을 위한 공격을 지시 했다.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 미션은 평택-안성 라인에 있는 미1군단 전방 10 마일이내에는 대규모의 중공군이 없으며 중공군의 주력 부대는 서울 바로 남쪽에 대기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지웨이는 같은 기간에 동부 전선 춘천지역 정찰을 시행 했다. 그 결과 중공군이 양지리-이천-여주를 잇는 국도20번 선상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지웨이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1월31일에서 2월20일 까지 총 공격을 개시 했다. 서쪽 미1군단 전방은 비교적 용이하게 공격이 진행 되어 인천과 김포 지역을 아군이 되 찾을 수 있었다.  동쪽 미 9군단 전방은 중공군이 총력을 기울여서 방어 했지만,  2월15일 경, 지평리와 원주에서 미군과 국군의 끈질긴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중공군은 후퇴하기 시작 했다. 

  

리지웨이는 도망가는 중공군을 빠른 속도로 추격하여 섬멸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기후가 급변하여 진격은 한없이 더디었다. 공교롭게도 공격 날인 2월21일 부터 갑자기 날씨가 따듯 해 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2월21일 부터 사흘 동안 비까지 왔다. 얼었던 강이 녹고 길은 진흙 바닥이 되었다. 산사태로 길과 터널이 막혔다. 차들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산비탈길이 많은 한국의 지형에서 바퀴달린 차량을 이용하는 군대의 진격은 지렁이 걸음 이었다. 중공군에게는 다행이었다. 중공군은 뒤에 작은 규모의 병력을 남겨두어 지연작전을 펴 면서 여유있게 퇴각 했다. 2월21일 부터 3월7일 까지 미군은  20번국도 북쪽, 2번국도 근처 양평-형성 라인 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4th battle of Seoul(Wikipedia)-Operation Ripper

1951년3월6일, 리지웨이는 4차 서울 탈환 작전을 시작 했다. 서울, 홍천, 춘천 근처의 중공군과 인민군을 섬멸하는 것이 작전의 목적이었다. 서쪽은 미 1군단과 9군단이 서울과 홍천을 맏고,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이 동쪽에서 진격하여 38선 바로 남쪽에 방어선을 치는 작전이었다. 


1951년3월14-15일 밤 국군 1사단과 미 3 보병사단은 서울을 탈환 했다. 1950년6월27일 대한민국에서 인공, 9월28일 인공에서 대한민국, 1951년 1월4일 대한민국에서 인공, 3월15일 인공에서 대한민국으로 서울의 주인이 바뀌었다. 손이 바뀔 때마다 할 수 없이 주둔 세력에 협조 했던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 되었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자주 뇌까렸던 소위 부역이었다. 이 딱지는 나의 부모 세대를 일생동안 괴롭혔다. 빨갱이와 같은 낙인이었다. 


서울을 내준 중공군은 봄이 되어 녹아서 진흙 바닥이 된 산길을 교묘히 이용하여 유엔군의 추격을 지연시키면서 퇴각 했다. 미 10군단이 산이 많은 동쪽에서 고전 했지만 북쪽의 청천강이나 장진호 근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대포, 탱크, 트럭 등이 이동하기 힘들고 대규모 병력이 한꺼번에 전면 대결하기 힘든 깊은 산악 지대에서는 도보로 이동하는 중공군이 훨씬 유리 했었으나 남쪽의 평지에서 는 우세한 미군의 기동력과 화력이 중공군을 압도 했다. 더구나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국군의 전투 능력도 전쟁이 몇개월 동안 진행 되면서 크게 향상 했다. 3월15일에 홍천이 함락되고 22일에 춘천을 확보 했다. 유엔군은 3월 말에는 38선 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원래 리지웨이의 목적이었던 중공군 섬멸에는 부족한 결과 였다. 중공군은 대체로 유엔군이 추격하여 공격하기 전에 병력의 손상을 최소화 하면서 후퇴 했다. 중공군의 보급창고가 있었 던 춘천도 텅텅 비어 있었다. 중공군은 여유 있게 군수물자를 가지고 떠났다.


운 좋은 뮤노즈 대위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 크리스마스를 지낼 희망에 차 있던 미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살아서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싸워야 했다. 견딜 수 없는 추위가 그들을 귀롭혔고 밤마다 엄청난 숫자로 피리를 불고 고함지르며 공격해 들어오는 중공군은 그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었다. 미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 졌다. 

군우리에서 남쪽으로 퇴각한 뮤노즈 대위는 미군이 중공군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좀 불만이었지만  명령대로 퇴각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본국에 있는 딸에게 “생일 축하 해, 난 잘있다.” 라고 전보를 쳤다. 

 

보충병 12명이 도착 했다. 모두 한국전에 보내진 것에 불만이었다. 전쟁 경험이 있는 병사들과 섞어서 배치 했다. 수많은 피난민이 후퇴하는 미군과 같이 남하 했다. 유엔 방어선 남쪽으로 인민군이 피난민 행렬에 숨어들어 온다는 정보가 들어 왔다. 뮤노즈 대위는 피난민을 방어선 남쪽으로 통과시키지 말라고 명령 했다. 민간인 시절 개인 사업을 했던 한 하사가 “대위님, 전 민간인을 쏘아 죽일 려고 여기 온 것 아닙니다.”라고 항의 했다. 뮤노즈는 눈을 부릅뜨고 “여기 막 와서 그러는 지는 아는 데, 너 죽지 않을 려면 조심해야 돼” 라고 나무랐다.  어느날 그 병장은 검문소 근무중 행방불명이 되었다. 뮤노즈는 피난민에 섞여 있던 인민군이 그를 죽여서 길가 도랑에 쌓여 있는 눈 속에 버렸을 것이라고 추정 했다. 다음해 봄, 길가 도랑의 눈이 녹으면서 많은 해골이 노출 되었다. 

원주 남쪽으로 후퇴 한 뮤노즈 부대에게 원주 쪽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이 하달 되었다. 하루는 버밍햄 중령이 지휘본부로 그를 불렀다. 그는 “프랭크 어제저녁에 내 꿈에 네가 전투 중에 행방 불명이 되는 꿈을 꾸었다” 라고 하면서 뮤노즈 대위를 G4 보급부대로 발령했다. 1951년 1월7일이었다. 그해 2월에 뮤노즈가 지휘 했던 부대는 중공군의 총공세로 유명한 지평리 전투에 투입되었다. 미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양측에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 했다. 

평생 군인을 직업으로 삼을 려고 했던 그는 높은 애국심으로 열심히 싸웠다. 수많은 치열한 전투에 투입되었지만 어디하나 다친 데 없이 비교적 안전 한 보급부대로 전출 되었다.  억세게 운 좋은 장교였다. (This Kind of War 에서) 


1.4 후퇴, 한 소년의 피난 이야기


1boon 카카오

요즈음 인터넷을 뒤져 보면 수많은 육이오 사변 체험 담 포스팅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를 따라 1.4 후퇴 때의 상황을 알아 보기로 한다. * (참고; dae6.tristory.com, 대륙으로 가는 길, 14세 소년이 겪은 한국전쟁, 민병설, 이 싸이트는 현재 포스팅이 중단 되었음)


1950년12월24일, 서울의 밤은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사람들은 거의 다 서울을 빠져 나갔다. 전기가 끊어져서 칠흑 같이 어두웠다. 적막을 깨고 가끔 포성 소리가 들렸다. 14살 난 소년 철수(가명)는 서울을 탈출 할 결심을 했다. 그냥 있다가는 죽을 것 같은 불길 한 예감 때문이었다. 


며칠동안 어머니를 졸라서 겨우 허락을 받았다. 1951년 1월5일,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동네 친구 2명과 동생 2명 도합 5명이 시흥 외갓집으로 출발 했다. 창덕궁, 운현궁, 종로, 서울역, 삼각지를 지나 용산에 이르니 해가 졌다. 한강가에 도착하니 피난민이 잔뜩 모여 있었다. 한강은 꽁꽁 얼어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건너가기 시작했다. 철수 일행도 따라 나섰다.  얼음이 깨질 까봐 무서웠다. 머뭇 거리면 어른들이 괜찮다고 위로해 주어서 용기를 얻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강건너 흑석동에 이르니, 빈집 천지였다. 피난민들은 이집 저집 들어가서 휴식을 취 했다. 철수 일행도 어느 한집에 들어 갔다. 누군가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주었다. 따뜻한 방에 들어가 골아 떨어 졌다.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가려고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윗목 방바닥에 일을 보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영등포를 지나 시흥 으로 향했다. 대포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 왔다. 외가에 도착하니 외삼촌 네는 모두 피난가고 낯설은 할머니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는 더운 밥을 해주었다. 허기진 판에 배불리 먹고 따뜻한 방에서 자고 있는 데 기관총 소리와 인기척에 잠이 깨었다. 밤 12시였다. 집 앞 뒤에서 못알아듣는 말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을 통해서 보니 중공군 들이었다. 그들은 문을 열어 제치고 방으로 들어 와 총뿌리를 겨누었다. 곧 모두 어린아이 들인 것을 확인하고 헌책을 찾아 담배 말아 피우고 사라졌다. 

만약  중공군이 마을에 들어온 것을 미군이  알면 마을을 폭격할 수도 있었다. 철수 일행은 해뜨기 전에 떠나기로 결정했다. 할머니가 만들어 준 주먹밥을 싸들고 황급히 외삼촌 집을 나섰다. 무작정 남쪽으로 향했다. 1월 새벽공기는 무척 차가왔지만 중공군에게 잡힐까 두려워서 등에 땀이 났다. 


누군가가 주먹밥을 먹자고 했다. 벌판에 앉아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주먹밥은 꿀맛이었다. 소풍온 기분이었다. 앞에는 수많은 피난민이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 앞에 새댁 같은 두여자가 나타 났다. 남편이 수송대 소위인데 차가지고 온다고 하고는 무소식이어서 자기들 끼리 피난가고 있다고 했다. 고맙게도 같이 가자고 했다. 


군수물자 수송열차 폭격, 처참한 피난민 죽음 목격


철수 일행은 안양 쪽으로 가는 철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중공군이 들어오기 전에 군수물자를 실을려고 했던 열차에 수많은 피난민이 타고 있었다. 갑자기 비행기에서 “여기는 적군 점령 지역 입니다. 곧 열차를 폭격 할 테니 열차에서 내리십시오.” 라고 방송 했다. 피난민들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폭탄이 떨어 졌다. 수십미터 날아가 죽은 사람, 창자가 튀어나온 사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  여기에 신음소리 까지 겹처 그야말로 아비규환 이었다. 


자기몸으로 아기를 감싸 안고 엄마는 죽어 있었다. 살아있는 아기는 엄마의 젖을 물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냥 묵묵히 지나 갔다. 철수는 가슴이 메어 왔다. 그러나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수원쪽으로 내려 가는 데 주위에 포탄이 여기저기 떨어 졌다. 엎드렸다 일어서서 가기를 반복 했다.  수원역이 미공군 비행기 폭격에 화염에 쌓이는것을 보았다.  그들의 어린걸음은 유엔군의 퇴각속도보다 느렸다. 좀더 빨리 가야 했다. 


가다가 밤이 되었다. 초가집 두채가 있어서 들어가 보니 피난민들로 만원이었다. 김장독에거 김치 꺼내어 밥을 먹고 방안에 들어가 자려니 어른들이 끼어 주지를 않았다. 처마밑에서 쭈구리고 앉아 밤을 세웠다. 새벽에 새댁들과 같이 출발했다. 


폭설속의 피난민들, 미군의 강간

눈이 한없이 내렸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강행군 하려니 허기에 지칠대로 지쳤다. 헌 운동화 속 구멍난 양말로 감싼 발과 다리에는 이미 아무 감각이 없었다. 새댁이 아무 집이나 보이면 들어가서 쉬자고 했다. 

얼마가지 않아서 집에 들어 갔다. 김장독에서 김치꺼내서 김치찌개 까지 해먹고, 더운물에 발 씻고, 양말 빨고 푹 쉬고 내일 강행군 할 것을 생각하니 힘이 저절로 났다. 


마루에 앉아 새댁들과 오손도손 이야기 하고 있는 데 멀리서 미군 2명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반가왔다. 그러나 그들은 가까이 오자 “손들어” 하고 외쳤다. 

곧 여자와 아이들인 줄 알았던지 웃으면서 “부산 트럭” 하는 것 같아서 트럭에 태워 부산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뜻으로 알아 들었다. 갑자기 그들은 두 새댁을 낚아채듯 방안으로 끌고 들어 갔다. 얼마지나지 않아 “사람살려, 사람살려”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철수 일행은 밖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해가 질무렵 집을 막 나서려는 데, 지뢰 탐지기를 든 한국인 통역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여기 미군들이 왔다 갔다는 데 무슨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뢰가 많으니 위험하다고 하며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천안에 도착하다.

새 동네에 도착하여 이집 저집 기웃거렸으 나 모두 피난민으로 꽉차 있었다. 물이 없어서 눈으로 밥을 지어 먹고 돼지 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철도를 따라 가는 것이 남쪽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철도가 절단 된 지점에 도달하면 한 없이 돌고 헤메기도 했다. 


매섭게 추운 날씨에 눈까지 오는데, 철도가 강을 건너는 지점에 도달 했다. 침목사이로 10미터 밑에 얼어 붙은 강이 보였다.  아이들은 서로 등짐을 움켜 잡고 침목을 하나하나 건넜다. 오금이 저리고 맥박이 정신 없이 뛰었다. 모두 무사히 건넜다. 


눈이 오고 추운 날도 있었지만 가끔 제법 따뜻한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양지 바른 데 앉아서  쉬려고 했다.  그러나 조금 앉아 있으면 온몸이 가려 웠다. 이를 잡으려고 옷을 벗었다. 곧 그동안 못 먹고 피곤해서 몹씨 말라 있는 것을 알아 차릴수 있었다. 


걷고 또 걷고 한없이 걸었다. 포탄소리사 없어지고 점점 조용해 지더니 기차소리가 들렸다. 최전선을 지나 안전한 지역에 들어 왔다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해질 무렵 마을로 들어 가니 모두 빈집이 아니었다. 

철수 일행은 어느 집앞에서 서성거렸다. 집주인 아줌마가 대문 밖으로 나와서, “저기가 천안인데 오늘저녁 여기서 자고 내일가라” 고 했다. 너무나 고마웠다. 


다음날 천안역에 가서 남행열차를 찾아가니 지붕있는 화물칸은 모두 만원이었다. 석탄 실은 무개차에

탔다. 마분지를 깔고 석탄위에 앉았다. 어느 아저씨가 미군 칸에서 훔쳐 왔다고 하며 큰 박스를 들고 

다니며 식빵을 나누어 주었다. 꿀 맛이었다. 하루 종일 석탄위에 앉아서 기다렸지만 기차는 좀처럼 출발하지 않았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가다가 기차가 굴속으로 들어 갔다. 기차가 뿜는 연기가 굴 속에 꽉 차서 숨을 쉴수가 없었다. 1월 추운 날씨에 달리는 기차 안에서 지붕없는 칸에 앉아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같이 탄 피난민 끼리 서로 붙어 앉아  온기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난방이었다. 서로 안부 물으며 위로 했다. 


역마다 서며 거의 이틀 걸려서 종착역에 도착 하자 역무원이 내리라고 했다. 서대전이었다. 새댁이 남의 집 부엌을 빌려서 아침밥을 지어 주었다. 밥을 먹는 듯 마는 듯 한 새댁이 그만 헤어 지자고 했다. 눈 오던 날 미군에게 당한 일이 자꾸 생각 났다. 섭섭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로 울 면서 헤어졌다. 


서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라지는 역이었다. 호남은 인민군에게 점령 당 했고 영남은 낙동강 전선에서 방어 했기 때문에 피난민들은 모두 영남으로 가려고 했다. 물론 일자리도 영남 쪽에 많았을 것이다. 

헌병이 길을 막고 피난민들을 호남 쪽으로 가라고 했다. 지나치게 영남 쪽에 피난민이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다. 철수는 대구로 가야 했다. 좋은 수가 없나 궁리 하던 중, 민간복 입은 사람과 군북 입은 사람이 섞인 행렬이 눈에 들어 왔다. 재 빨리 그 행진 대열로 섞여 들러 갔다. 아저씨들은 소년들을 보호 해 주었다. 철수 일행은 대구-부산행 열차에 탈 수 있었다. 


철수 일행은 대전역에서 기적적으로 용산 철도국에 근무하던 외삼촌과 그 가족들을 만났다. 외삼촌 가족들이 화물차에 미리 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번엔 지붕 있는 차에 타고 무사히 대구에 도착 했다. 

그들은 일년 후 서울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다시 합류 했다. 


국민방위군 사건


소년들이 숨어들어간 행렬은 국민 방위군 부대 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4후퇴 후 제2국민병 500,000명을 모집했다. 그러나 고위장성들이 이들에게 보급되어야 할 군수물자를 착복 했다. 추운 날씨에 방한 복, 장갑, 양말등이 지급이 되지 않았다. 물론 급식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병들어 죽거나 얼어 죽은 군인들이 무려 120,000이었고 동상으로 손가락 발가락이 절단된 군인이 무려 200,000이었다고 한다. 이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파면 되었고 부통령 이시영이 사임 했다. 윤보선과 조병옥이 이승만과 결별하고 야당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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