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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Feb 16. 2021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국가일까요?
제3부 한국전쟁

14장 삼수갑산과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

개마고원과 장진호


박하의 북한 읽기 blog.naver.com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정상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내가 오래전부터 이루지 못한 꿈이 있는 데 바로 백두산과 개마고원을 트레킹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백만전에 백두산 화산이 폭발하여 정상에 천지가 생기고 개마고원이 형성되었다. 해발 700-2000미터 면적 4만 평방 킬로 미터에 달하는 방대한 지역이다. 기가 막힌 풍광을 자랑한다. 겨울에는 섭씨 영하 40도까지 내려 가지만 여름에는 섭씨 15도의 선선한 날씨이다. 북한에서 백두산 구경 갈려면 반드시 거쳐야 한다. 높고 방대한 위용을 뜻하여 한반도의 지붕이라고 했고,  사람 살기 힘든 오지였기 때문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라는 속담이 생겨 났다.  


삼수갑산(김소월)

삼수갑산(三水甲山) 내 왜 왔니 삼수갑산이 어디뇨.

오고 나니 기험(奇險) 타 아하 물도 많고 산(山) 첩첩이라 아하하


내 고향을 도로 가자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삼수갑산 멀다더라 아하 촉도 지난(蜀道之難)이 예로 구하 아하하


삼수갑산이 어디뇨 내가 오고 내 못 가네

불귀(不歸)로다 내 고향 아하 새가 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내 못 가네

오다가다 야속타 아하 삼수갑산이 날 가두었네 아하하


내 고향을 가고 지고 오호 삼수갑산 날 가두었네

불귀(不歸)로다 내 몸이야 아하 삼수갑산 못 벗어난다 아하하 

<신인문학 (1934)>


삼수와 갑산은 함경남도 개마고원에 있는 산골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들었기 때문에 유배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화산재로 형성된 개마고원은 비료를 주지 않아도 여러 가지 농작물이 잘 자랐다.  부천 강, 장진강, 허천강이 압록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다시 말하면 개마고원은 압록강 쪽으로 가면서 낮아지고 동해 쪽으로 가면서 높아 저서 개마고원에 내린 비와 눈 녹은 물은 압록강으로 흘러서 서해로 빠진다. 동해 쪽은 함경산맥(부전령 산맥)이 해안을 따라 동서로 달리고 있다. 


동경제대 전기과 출신 바로 모리타는 이 세강의 물을 북쪽에서 막아 압록강 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저수지를 만든 다음 높은 부천 령 산맥에서 동해로 흐르게 하여 수력 발전소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장진호가 탄생했다. 1926년에 만들어진 조선 수전 주식회사는 1944년까지 무려 24개의 발전소를 건설하여 1,723,910 킬로 왓트의 전력을 생산했다. 그의 동급생 노구치는 흥남에 질소 비료공장을 건설했다. 물론 농사에 비료도 필요했지만 부산물로 폭약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장진호 등 개마고원의 수력 발전은 흥남에 공업지대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거대한 호수는 개마고원의 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 미국이 후버 댐을 건설하여 라스 베가스를 만들어 냈다면 일본은 개마고원에 댐을 건설하여 흥남 공업지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장진호 전투


cbs news

해방 후에 남북이 갈라지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개마고원과 장진호 지역은 관광, 여름 피서지 그리고 흥남 공업 지대의 에너지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했던지, 중공군, 미군, 유엔군, 국군의 피를 얼리는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여름에 낙동강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전쟁은 겨울에 장진호에서 젊은이들의 피를 꽁꽁 얼어붙게 했다. 


뉴욕과 비슷한 위도 상에 있지만 높은 지역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북극 같은 추위가 닥쳐온다. 최저 기온이 섭씨 영하 30-45도 까지 내려간다. 여기에 거센 바람까지 몰아 친다. 야전삽으로 땅을 파면 땅이 꽁꽁 얼어붙어서 삽이 부러 졌다. 깡통 속에 폭약을 넣어 땅 속에서 폭파시켜 참호를 만들었다. 작업을 하면 땀이 나고 곧 땀이 얼어서 죽는 병사들이 있었다. 옷을 벗어 가며  작업을 해야 했다. 낙하산에서 보급품이 얼어붙은 땅에 떨어지면서 부서지는 일이 허다했다. 너무나 추어서 총이 발사되지 않았다. 엠 1 칼빈은 무용 지물이었다. 그래도 엠 1 그랜드는 쓸만했다. 차량은 2시간마다 시동을 걸어 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뢰도 작동하지 않았다. 대포도 불발이 되는 때가 많았다. 바테리가 약해저서 통신이 두절되기고 했다. 통조림이 얼어붙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추운데 설사병까지 번졌다. 강추위에 쉴세 없이 엉덩이를 까발리고 일을 보는 고역을 겪어야 했다. 미군들은 겨우 투시(초콜릿 시탕류)를 먹고 연명했다. 혈액과 모르핀 등은 얼어서 쓸 수가 없었다. 


추운 날씨는 중공군과 미군을 가리지 않고 괴롭혔다. 중공군은 심각한 보급 문제를 겪고 있었다. 얼어붙은 감자를 먹어야 했다. 설사병은 중공군에게 도 퍼졌다. 눈에 엎드려 있다가 그대로 몰사하는 중공군 부대도 있었다. 



Armyhistory.org


원산 상륙작전,  맥 아터와 정일권

1950년 9월 29일, 맥아더는 서울 환도 식후 시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조이 해군 제독, 워커 8군 사령관, 일몬드 10 군단장 등에게 또 다른 상륙 작전 계획을 밝혔다. 원산 상륙작전이었다. 이미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한 미 해병 1사단과 10군단 병력을 인천에서 원산까지 바다로 이동시켜 원산에 상륙한다는 계획이었다. 맥 아터는 전쟁의 총지휘권은 자신이 가지고 동쪽을 담당하는 상륙 병력은 아몬드 중장이 지휘하고, 서쪽에서 북쪽으로 진격하는 8군은 워커 중장이 지휘한다고 선언했다. 원산에 상륙한 병력은 원산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평양을 8군과 합세해서 공격한 다는 작전이었다. 


맥아더는 적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여 적을 이해한 다음에 작전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그는 작전계획을 짜 놓고 그 작전계획에 맡는 정보만 선별 적으로 받아 드리는 실수를 반복했다. 과대망상적인 자기 과시에 비롯된 과오였다. 가짜 옥수수 담뱃대를 물고 썬 그래스를 낀 체 상륙선에서 육지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미국 시민들을 매료했다. 그는 신문기자들과 만나서 그의 작전계획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소련과 중국은 미군이 어떻게 중공군을 공격할지를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자기 과시에 눈이 어두운 우매한 결과였다. 


일본은 물론 전 아시아의 최고 권력자였던 맥아더를 거역할 장군은 아무도 없었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여 서울이 수복되자,  미국 국민은 그에게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그는 기고만장했다. 해병 1사단과 10군단 병력은 10월 6일 인천을 출발하여 부산을 거처 835 해리를 항해해서 10월 19일에 원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10군단 7사단은 육로로 부산으로 가서 원산 앞바다에서 합류했다. 좁은 인천항은 아수라 장이 되었다. 떠나는 병력을 배에 실어야 했고,  8군 군수물자를 하역하는 일을 동시에 해야 했다.


미군이 원산에 상륙할 것을 알고 있었던 소련은 원산 앞바다에 3000여 개의 기뢰를 깔아 놓았다. 당시의 기술로는 기뢰의 위치를 파악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군과 국군의 소해함과 8척의 일본 해군 소해함까지 동원해서 기뢰를 제거했다. 작업 도중 미군 소해함 두척과 국군 소해함이 침몰되었다. 소련군이 기뢰를 설치할 때 웅도 섬 주민들에게 위치를 알려 주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협조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상륙 병력은 군함을 바다에 세워 놓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울릉도까지 12시간 걸리는 항해를 반복하면서 일주일을 견뎠다. 그들은 이 것을 요요 항해라고 비아냥댓고 병사들은 뱃멀미에 시달 렸다. 


국군 참모총장 정일권의 명령으로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넘어 양양을 점령했다. 이 날이 국군의 날이 되었다. 10일 만에 원산을 점령했다. 이미 아군에게 점령당한 원산에 상륙 작전을 벌린 다는 것은 코미디에 가까운 일이었다. 맥 아터는 흥남으로 상륙 지를 변경 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련은 흥남 앞바다에도 기뢰를 깔아 놓고 있었다. 미군은 10월 26일 경에 원산에 상륙했다. 물론 아무런 저항이 없는 행정 상륙이었다. 


한편 서부전선의 국군과 미 8군은 10월 19일에 평양에 입성했다. 21일에 평양비행장에서 점령 축하 열병식이 거행되었고 10월 30일에 평양시민 환영식에서 이승만이 압록강 물이 담긴 수통을 선물로 받았다. 원래 작전대로 라면 원산으로 들어온 해병 1사단과 10군단 병력이 8군과 같이 평양으로 진격해야 했었다. 그러나 두 병력의 엇박자 북진과 중공군의 개입은 이 작전 계획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향후 서쪽의 미 8군과,  동쪽의 미 해병 1사단과 10군단은 각각 압록강 쪽으로 북진했다. 이들 사이에는 낭림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들 사이의 소통은 점점 어려워졌다. 보급도 따로따로 해야 했다. 산은 점점 험악 해지고 길은 외길이 되어 갔다. 병력은 아예 한 줄로 서는 수밖에 없었다. 트럭, 전차, 포 등 바퀴 달린 이동 수단이 점점 어려워졌다. 


중공군의 전략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인해전술로 중공군이 국군을 물리쳤다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듣고 자랐다. 마치 수백만명의 중공군이 수만의 유엔군과 국군을 압도한 것처럼 믿고 있었다.  처음 압록강을 넘어온 중공군 병력은 약 15만이고 북진한 유엔군은 약 20만이라고 한다. 전쟁시기에 따라 총 병력 숫자는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양 쪽 병력 숫자의 차이는 별로 없었다. 그러면 왜 "인해전술"이라는 말이 퍼졌을 까?


Fehrenbach는 그의 저서 "This Kind of War"에서 어떤 시기에 동원된 중공군의 총병력은 300,000 정도였지만 실제로 유엔군과의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6만에 불과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 줄로 서서 북진하는 유엔군과 싸우는 데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엔군이 직면하는 중공군의 숫자는 전투할 때마다 월등하게 많았다. 한두 개의 기관총이 수백 명의 중공군을 상대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을 것이다. 하얀 눈이 쌓여 있는 데 쏘아도 쏘아도 끝임 없이 달겨 드는 중공군이 사람이 이룬 바다처럼 보였던 이유이다. 


유엔군과 국군이 양쪽으로 갈라져서 북으로 진격하고 있는 동안 벌어진 사이로 중공군이 산 능선을 타고 들어 올 수 있었다. 양군의 연락을 차단했다. 미군이 중공군의 움직임을 모르고 있었던 반면에 중공군은 미군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맥아더의 잦은 기자 회견은 작전 계획이 중공군에게 누설되는데 한몫했다. 


미군은 차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산비탈 길을 일열로 서서 북으로 올라왔다. 중공군은 도보로 산 능선과 언덕을 타고 내려와서 올라오는 미군을 거꾸로 세운 V 자로 속으로 유인했다. 낮에는 V 자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밤이 되면 포위 공격했다. 


중공군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무기 박물관 전시장 같았다. 소련과 중국에서 만든 무기 외에 영국, 미국제 무기도 소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병사들 모두가 소총을 소지하게 할 수가 없어서 어떤 병사들은 수류탄만 가지고 전투에 참여했다. 앞에서 전사한 병사의 소총을 주워서 사용하기도 했다. 중공군은 미군의 보급 창고를 공격하지 않았다.  창고 안에 있는 탄약과 먹을 것들은 그들의 부족한 보급을 메워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중공군에게는 계급이 없었다. 장교들은 조그마한 배지를 달아서 구분했다. 전 병력에게 공평하게 작전계획을 알려 주었기 때문에 병사들도 사단의 작전계획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미 해병대 1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와 미 육군 10 군단장 에드워드 아몬드 


Smith

Almond

미 해병대 1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군사 작전 교본에 충실하게 따르는 명장이었다. 반면에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은 전투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영달에 눈이 어두워 맥아더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했다. 해병 1사단은 10군단에 소속되어 있어서 스미스는 아몬드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11월 3일, 미 해병대 1사단 7 연대는 원산에서 함흥을 지나 수동리에 도착하자 중공군 124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이중에는 344 인민군 전차 부대 잔존 부대가 있었다. 이들은 평양에서 퇴각하여 중공군과 합류했다. 중공군 사단장 쑹수룬은 "만세 돌격"을 감행했다. 병사들이 미군의 사격에 파리 목숨처럼 죽어 나가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모한 작전이었다. 철저한 훈련을 받고 이미 한국전에서 경험을 쌓은 미 해병대에게는 너무나 쉬운 상대였다. 더구나 포병과 공중 지원은 중공군의 화력을 압도했다. 이틀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중공군 124사단은 완전히 괴멸되었다. 미군 해병 1개 연대가 중공군 1개 사단을 섬멸한 전과였다. 연대 병력 약 3000명 중에 전사자는 단 50명, 부상자는 200 명이었다. 중공군 사망자는 1500명 부상자는 이 두배를 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후로 중공군 124사단은 한국전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수동리 전투에서 포로가 된 중공군은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에 대해서 소상히 알려 주었다. 그러나 맥아더 극동사령부 정보 과장 Charles Willoughby 소장은 북한에 들어와 있는 중공군은 3만 명 정도라고 맥아더에게 보고 했다. 윌러비는 아몬드 소장과 같이 맥아더에게 아첨하는 부류의 장군이었다. 맥아더는 대규모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그들이 북한에 들어오기 전에 북한을 완전히 점령할 계획이었다. 윌러비는 맥아더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중공군 3십만 명이 북한에 들어와서 미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낙동강 전투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해병대를 투입했고, 이들은 주어진 임무를 훌륭하게 해냈다.  잘 훈련된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미 해병대는 장진호 전투에서도 세계 제일의 막강한 병사들임을 여실하게 증명해 주었다. 


11월 25일에 미 해병 1사단은 수동리-진흥리-(황초령)-고토리-하갈 우리에서 장진호 서쪽에 있는 유담리에 도착했다. 하갈 우리에서 장진호 동쪽으로 가면 후동리이다. 미 해병 1사단은 서쪽 미 8군의 우측에 중공군이 끼어들지 못하게 유담리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미 8군과 만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11월 27일 미 8군은 이미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후퇴하고 있었다. 하갈우리 우측(장진호 동쪽)은 7사단 31 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스미스 소장은 중공군 주력 부대가 아직 북한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는 정보에 많은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맥아더의 크리마스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무작정 빠른 속도로 북진하는 작전을 크게 우려했다. 북한의 지형 때문에 병력이 한 줄로 늘어서서 포위되기 쉽고 숫적으로 항상 아군보다 많은 병력을 상대해야 하는 싱황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보급을 확보하지 않고 무조건 병력을 진격시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추운 날씨에 방한복 조차 충분하게 지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공병을 동원하여 하갈우리에 활주로를 건설하게 했다. 곳곳에 보급기지를 설치하였다. 진격을 가능한 한 천천히 했다. 하루에 1.5킬로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몬드의 재촉을 무시했다. 헬리콥터를 타고 공중에서  황초령의 다리가 파괴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중공군이 미군을 유인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미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다리를 파괴했어야 했다. 


그는 중공군 포로로부터 중공군이 미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려 한다는 정보를 귀담아 들었다. 진흥리와 고토리에 각각 대대 병력을 남겨 놓고 전 사단 병력이 지프로 한 시간 거리 이내에 머물 토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120킬로에 사단 병력이 늘어서 있었다. 아몬드의 명령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미 해병1사단의 선전

서쪽 청천강에서 압록강 쪽으로 북진하고 있는 미 8군보다 이틀 늦은 11월 27일 동쪽 장진호의  미 10군단과 해병 1사단에게도 크리스마스마스 대공세 명령이 떨어졌다. 한 달 안에 북한을 멸망시켜야 집에 가서 크리스마스를 쇨 수 있었다. 맥아더와 아몬드는 북진을 재촉했다. 해병 1사단 5 연대는 88 키로 떨어져 있는 서쪽의 8군과 연결하기 위해서 낭림산맥 쪽으로 향 했다. 그러나 미 8군은 11월 26일에 예상 밖의 중공군의 2차 공세로 곤경을 겼고 있었다. 


11월 25일에 유담리에 도착한 미 해병대 1사단 7 연대는 중공군 3명을 포로로 잡았다. 한국군 통역관과 한국 경찰대가 심문을 했다. "중공군은 이미 6일 전에 장진호 지역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유담리와 하갈우리 사이의 도로, 하갈우리와 진흥리 사이의 도로를 차단할 것이다. 공격 시기는 미 해병 2개 연대가 덕동 고개를 통과할 때고 미 항공기의 지원을 피하기 위해서 밤에 공격할 것" 이라고 상세히 알려 주었다. 


11월 27일 중공군은 유담리 북쪽에 79사단, 유담리 서쪽은 89사단, 유담리 남쪽 신흥리 근처의 59사단이 유담리에 있는 미 해병 5, 7 연대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장진호 동쪽 후동리 북쪽에서 중공군 80사단은 미 10군 7사단 31 연대와 32 연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중공군 9병 단장 쑹수린은 미군 모르게 밤에 만 이동시켰다. 미군은 이들의 움직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중공군은  동경에서 맥아더 사령부가 매스컴을 통해서 발표하는 뉴스만 들어도 미군의 작전계획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장진호 서쪽과 남쪽의 미 해병 1사단은 중공군의 동태와 그 의도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고 사단장 스미스의 용의주도 한 작전 계획으로 중공군의 포위공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준비를 한 상태였다. 반면에 장진호 동쪽의 7사단 31 연대와 32 연대는 지휘관의 무능과 병사들의 훈련 부족으로 인한 졸렬한 전투를 벌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11월 27일 밤 중공군은 나팔과 피리를 불고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 들어왔다. 이미 포위당하여 전략 상 불리한 상황에 있었지만 미 해병은 방어진 지를 크게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5 연대와 7 연대는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방어진지를 축소하고 서쪽으로 진출하여 8군과 만나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무모한 돌격적인 공격, 미군의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은 중공군 10명이 죽으면 미군 1명이 희생되는 비율로 중공군의 피해가 월등하게 많았다. 미 해병은 높은 곳에서 병력의 이동을 감제할 수 있는 터키 힐과 폭스 고지를 중공군에게 내주지 않았다.


11월 28일 스미스 미 해병 사단장은 5 연대는 유담리를 지키고 7 연대는 유담리에서 하갈 우리로 통하는 도로를 확보하며 1 연대는 고토리에서 하갈 우리로 가는 도로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실상의 후퇴였다. 맥아더와 아몬드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늦었더라면 미 해병 1사단이 온전하게 후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밤 중공군은 하갈 우리를 공격했다. 하갈 우리에는 해병 1사단 사단 본부를 비롯한 각종 병과의 본부가 있었다. 공병대는 활주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방어준비를 철저히 해 놓고 있었다. 중공군은 의외로 전투보다는 보급품 약탈에 열심이었다. 수많은 중공군 병사들이 죽었다. 그들은 동상 때문에 피부가 육포와 같았다. 중공군은 미군 시체에서 옷을 벗겨 갔다. 미군들은 즐비한 중공군의 시체를 참호의 모래주머니 대용으로 사용했다. 


장진호 동쪽 7사단의 붕괴

1950년11월28일, 장진호 동쪽 후동리와 풍유리 안곡 지역에서 싸우고 있던 10군단  7사단 31,32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고전 하고 있었다. 28일 아침 10군단장 아몬드는 하갈우리의 미 해병1사단장을 방문하고 현 상황을 협의 했으나 아몬드는 미군이 얼마나 위태로운 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몬드는 하갈우리에서 장진호 동쪽 후동리에 있는 31연대장 맥클린 대령과 32연대장 페이스(Faith)중령을 만나 중공군은 "북으로 도주하는 패잔병"에 지나지 않는 군대라고 하며 페이스 중령과 그 주위에 있는 병사 두명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 한다음 수송기를 타고 떠났다. 화가 난 페이스 중령은 가슴에 단 훈장을 잡아 떼어 땅에 팽게 쳤다. 


31연대장 맥클린 대령은 2 대대 병력이 도착하면 아몬드가 원하는 대로 북진하겠다고 아몬드 앞에서 장담 했다. 그러나 2 대대 병력은 아직도 함흥에 있었다. 그는 앞에 나타난 중공군을  2대대 병력으로 오인하고 그쪽으로 혼자 달려가다가 부상을 당하고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사흘 후에 사망 했다. 페이스 중령이 31연대와 32연대의 지휘를 모두 맏게 되었다.  그러나 통신 두절로 두 연대를 한꺼번에 지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했다. 


페이스 중령은 두 감제고지(높은 지역에서 경계 할 수 있는 진지) 확보에 실패하고 11월29일 새벽 3시경 모닥불을 펴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자 있다가 중공군의 급습을 받고 견디다 못하여 철수 하기로 결심 했다. 주둔지에 있는 모든 보급품과 장비를 포기하고 전사자의 시체도 버려둔 체 떠났다. 


의외로 중공군의 공격이 없어서 순조롭게 남쪽으로 내려 갈 수 있었다. 페이스 중령은 후동리에 있는 전차 부대와 함께 하갈우리에 있는  해병 1사단과 합류 할 계획이었다. 중공군은 미군과 싸우기 보다는 미군이 버리고 간 군수물자를 노획 하는 데 바빳기 때문에 풍유리강 하구 까지는 무사하게 후퇴 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는 이미 하갈우리로 후퇴 한 후 였다. 


당황한 맥아더

1950년11월28일 맥아더는 워싱톤 합동참모본부에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해 있다. 우리 전투 병력의 현 상태는 중국 공산당이 선전포고 없이 시작한 또 다른전쟁을 치를 준비가 확실히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본 사령관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 했으나 본관의 통제능력을 벗어나는 상황에 즉면 해 있다"는 전문을 보냈다. 인민군과의 전쟁을 준비한 미군은 예상치 않은 중공군을 적으로 맞이하여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새로운 적에 대한 조치를 하려고 해도 미국정부에서 자신에게 준 제약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을 부정하여 미정부로 부터 38선이북 진격 허락을 받은 맥아더의 철면피한 변명이었다.  그날 저녁 맥아터는 주일 미대사관에서 극동군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극동 해공군 지휘관, 작전참모와 정보 장교 윌러비, 야전 사령관 워커와 아몬드가 참석했다. 8군 사령관 워커는 평양 북방 청천강 근처에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제안  했고 아몬드는 장진호에서 서쪽과 북쪽으로 진격할 것을 것을 주장 했다. 회의가 끝난 후 맥아터는 아몬드와 워커를 따로 불러 "8군은 평양 방어를 해 보다가 측면이 위협 받으면 바로 후퇴 하고 10군단은 장진호에서 철수하여 함흥과 흥남 해안에 병력을 집결 시켜라"라고 명령 했다. 


맥아터의 철수 명령을 받은 아몬드는 11월30일 까지 해병 1사단에게는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아몬드는 해병대가 중공군과 교전하는 동안 미 육군 10군단 병력이 무사히 후퇴 할 수 있는 시간을 벌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라고 군사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미 해병대 1사단의 철수와 페이스 중령의 전사

1950년11월30일 아침 트루만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맥아터가 원자폭탄을 쓸 수 있게 허락 할 수 있다"라고 폭탄 선언을 했다. 이로 인해서 미국내 뿐만아니고 전 세계 여론이 들 끌었고 유엔 각국은 한국전쟁을 조속히 끝내기 위해서 휴전 할 것을 제안하기 시작 했다. 


같은 날 10군단장 아몬드는 경비행기를 타고 하갈우리에 나타나 해병대 1사단장 스미스 장군에게 전 병력을 하갈우리에 집결한 후 편제화기와 장비를 파괴 하고 수송기로 후퇴 하라는 명령을 하고 떠났다. 그러나 그는 수송기로 후퇴 시키라는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면 끝까지 남아서 활주로를 지켜야 하는 병력을 수송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미스 소장은 10군단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그들의 협조 없이 해병대 자체의 힘으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 하겠다고 작전참모에게 자신의 결심을 토로 했다. 당시의 미국언론과 정부는 미 해병대를 포기 한 상태였다. 


7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은 아몬드가 스미스를 방문 할 때, 동쪽 페이스 부대를 방문하고 철수명령을 하달 했다. 페이스 중령은 철수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고 해병대의 도움을 요청 했다. 특히 수백명의 부상자 수송을 위해서 항공기 지원이 필요 했다. 이 요청을 받은 스미스 소장은 병력지원은 거절하고 항공기 지원만 허락 했다. 


페이스 부대가 후동리에 도착 했을 때, 크게 기대 했던 전차부대가 이미 하갈우리로 떠난 후 였다. 여기서 페이스 부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 했다. 페이스 중령은 수류탄에 맞아 전사 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7사단장 바 소장이 전차 부대를 미리 철수 시키고 페이스 부대를 중공군의 미끼로 던저 준 것으로 추측 된다. 이미 망가진 부대를 구제하기 위해서 더 많은 병력 손실을 낼 필요는 없다는 판단 이었을 것이다. 페시스 부대에는 카츄사로 미군에 소속된 한국인들이 많았다. 


미 해병대가 예상을 뒤엎고 무사히 중공군의 포위망을 똟고 탈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잘 훈련된 미해병대의 전투력 외에 중공군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약점이 중요한 역활을 했다. 

1. 중공군은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같은 지점으로 반복해서 돌격하는 작전을 되풀이 했다. 

2. 미군의 월등하게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의 쉬운 목표물이 되었다.

3. 중공군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여러가지여서 탄약등 보급이 어려웠고 작동하지 않는 무기가 많았다.

4. 중공군은 형편없는 보급을 미군기지를 약탈하여 충당하려고 했다. 따라서 보급기지를 공격하지 않았다. 

5. 보급이 부족한 중공군은 미군보다 추운 날씨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 결과 중공군의 전사자 수는 미군의 10배내지 50배에 달 했다. 스미스 소장이 하갈우리에 건설한 횔주로는 미군철수에 구세주 같은 역활을 했다. 보충병 500명이 수송기를 타고 들어올수 있었고 특히 부상자들은 이 활주로가 없었으면 대부분이 사망 했을 것이다. 동쪽 페이스 부대가 전우의 시체들을 모두 버리고 황급하게 퇴각 했던 반면에 미 해병대는 낙하선 천에 싸인 시체 85구를 매장하고 철수 했다. 이 시체들은 북한으로 부터  회담을 통해 나중에 모두 돌려 받았다. 


하갈우리 주민들의 협조

이종연 중위는 통역장교로 미해병대 1사단과 같이 인천상륙 작전과 서울 수복에 참전하고 11월14일 하갈우리에  도착하자 마자 인사차 하갈우리 이장을 찾아가서 앞으로 협조해줄 것을 부탁 했다. 


하갈우리에서 13킬로 떨어진 곳에 산하리라는 마을이 있었는 데, 11월24일 이 마을 주민이 하갈우리 사단 본부에 나타나서 중공군이 자기들의 집을 다 차지 했다고 제보 했다. 어느날 북한 공산당에 협조적인 마을 간부가  중공군의 숙소가 필요하니 모두 집을 비우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방한준비를 충분히 하지 않고 급하게 진격한 중공군은 밖에서 자면 모두 얼어죽을 판이었다.  마을에 머물면 미공군의 폭격을 피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이 제보를 받고 미공군은 즉시 산하리를 폭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집을 잃은 주민들은 모두 하갈우리 미군 주둔지로 몰려 왔다. 미군은 이들을 막사에 머물게 한 다음, 군에 필요한 작업을 시키고 후한 임금을 주었다. 


미공군은 보급품을 낙하산에 매달아서 떨어트렸는 데, 하갈우리 사단본부외에 주위 산악지대에 떨어지는 보급품이 많았다. 이 보급품 수거에도 주민들이 동원되었고 작업중에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숨지는 사람들도 많았다. 


집을 빼앗긴 하갈우리와 그 주변 마을주민들은 화가나서 미군에게 중공군의 규모, 주둔지, 공격시기등 중요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알려 주었다. 케어리 소위는 주민 12명을 선정하여 정보대을 만들고 통역장교인 이종연중위와 같이 일 했다. 이종연 중위와 케어리 중위는 중국말에 능숙한 주민 두명을 중공군에게 접근하게 했다. 중공군이 11월28일 해가 지면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동하기 시작 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중공군이 서남쪽 8 킬로 지점에 주둔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공격 시간을 계산 할 수 있었고 공격지점이 서남쪽임을 알고 병력을 이곳에 집중 시켰다. 중공군은 예상 했던 시간에 예상 했던 지점으로 처들어 왔고 미군은 이들을 잘 막아 낼 수 있었다. 넓은 벌판이었던 하갈우리는 사방이 적에게 노출되어 있어서 적은 병력으로 방어하기 힘든 주둔지 였다. 정확한 주민들의 정보없이는 수적으로 크게 우세한 중공군을 막아 낼수 없었을 것이다.  주민들이 수 많은 미군 병사들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황초령고개에서 버려진 피난민들

1950년12월5일 미해병들은 하갈우리에서 떠나기 시작했다. 막사에서 생활하던 주민들과 주위 마을 주민들도 이들을 따라 나섰다. 미군에게 협조 했던 주민들과 예수교 신자들이 많았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신자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제 각각 피난 보따리를 싸들고 부대 후미에 붙어서 따라 왔다. 인민군이 피난민 대열에 끼어들어 있다가 안심하고 가까이 접근하는 미군을 사살 하는 전술을 써왔기 때문에 피난민을 미군 대열 중간에 넣어 주지 않았다. 


12월10일 오후 3시 미군과 피난민 대열이 고토리와 진흥리 사이에 있는 황초령고개 근처에 도달 했다. 날씨는 영하 45도 였고 바람까지 심했다. 피난민들은 가파른 고갯길을 우마차 까지 끌고 올라 갔다. 어느덧 날이 어두어 지고 자정이 가까웠을 때 이들은 도수관위의 시멘트 길에 거의 도착 했다. 도수관 위에는 있는 수문교가  파괴되어 있어서 미군은 임시다리(답교)를 설치해야 했다.  미군은 무거운 탱크가 통과하다가 답교가 파손 될 것을 염려하여 전차부대를 맨마지막에 통과 시키기로 결정 했다. 피난민 대열은 전차부대뒤를 따라갔다. 다리 건너에서는  병력이 모두 통과하면 답교를 폭파하기 위해서 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 앞 1500미터 지점에서 맨 앞에 가던 전차의 브레이크가 동파되어 정지 했다. 길이 좁아서 뒤에 따라오는 탱크가 우회해서 갈 수가 없었다. 당황한 전차병들은 9대의 탱크를 버리고 다리 쪽으로 도망처 벼렸다. 중공군은 피난민 속에 섞여서 따라오고 있었다. 피난민 대열에서 중국말 액센트가 짙은 영어로 투항 하겠다는 목소리가 들리 더니 기관총으로 무장한 중공군 5명이 앞으로 나왔다. 즉시 전투가 벌어 졌다. 피난민 대열에서는 "많아, 많아" 하는 피난민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피난민 대열과 주위 언덕에 숨어 있던 중공군의 빗발 치는 사격이 시작되었다. 해병들도 응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피난민이 죽거나 다쳤다. 미군이 황급히 다리를 건너자 공병은 답교를 폭파 했다. 1950년12월11일 새벽2시30분 이었다. 이후 피난민이 어떻게 되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흥남 철수

미 해병대 1사단과 10군단 병력이 진흥리에 도착하자, 12월11일 맥아터는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 당시에 미군의 병력은 중공군의 병력보다 많았으며, 화력과 공군력은 비교도 안될 만큼 우세 했다. 미군에 맏섰던 중공군 9군단은 미 해병대의 공격, 추운 날씨, 그리고 부족한 보급 때문에 거의 와해 상태 였다. 중공군 야전 사령관들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지 말고 휴전 할 것을 제안 했으나 머우 제퉁은 적화통일을 고집 했다. 


중공군은 퇴각하는 미군과 국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공격했다면 아마 극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 했을 지도 모른다. 1950년12월15일 미군은 흥남 앞바다에 무려 2000척의 배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철수 작전을 시작 했다. 


김백일 제1군단장과 미10군단 소속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은 10군단장 아몬드를 설득하여 거의 10만명에 달하는 피난민을 수송 하게 했다.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의 레너트 라루 선장은 배에 탐제한 무기와 장비를 내리게 하고 피난민 만사천명을 태워 부산으로 무사히 탈출 하게 했다. 철수 작전의 마지막 날인 1950년12월24일 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이배를 타고 피난 할 수 있었다. 그가 개마고원과 백두산에 대한 애착이 각별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려 10만명의 피난민은 배에 탈 수 없었고 그들은 쓸쓸히 육로로 남쪽으로 향 했다. 남북통일의 꿈을 안고 북진 했던 국군은 잠시 점령 했던 북녁 땅을 뒤로 하고 미군을 따라 퇴각 했다. 지각있는 장군들은 아마 미군이 조금만 성의 껏 싸워 주었더러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을 것이다. 


철수가 완료된 후 흥남부두는 폭파 되었다. 장진호에서 발전된 전력으로 발달된 흥남공업지대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평화로운 시절에 민초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었던 비료공장은 전쟁시에는 적을 이롭게 하는 시설에 불과 했다. 


삼수갑산에서 싸우다가 돌아오지 못한 미군, 국군과 민간인들의 명복을 빈다. 장진호 전투는 세계역사에서 보기드문 비참한 전쟁 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민의 가슴에는 또 하나의 한이 쌓였다. 

https://youtu.be/SS8GftqgFgE


참고: 소피니언 디데아 장진호 전투 시리즈

          This Kind of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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