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책하는 '내면 일기'를 덮고, 관찰하는 '바깥 일기'를 펴자
"이제, 내면 일기를 쓰면서 자아를 성찰하기보다는 외부 세계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더욱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확신이 선다."
- 아니 에르노, 《바깥 일기》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의 이 문장은 요즘 워크숍에서 수많은 직장인을 만나며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는 독립적인 섬이 아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나를 깊이 이해하려면, 내 안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맥락'을 함께 살펴야 한다.
최태성 작가의 《역사의 쓸모》를 읽으면서 이 생각은 확신으로 변했다. 역사란 위대한 영웅의 단독 질주가 아니다. 그 시대의 상황과 맥락이 한 인간을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연구자의 언어로 말하자면, 역사는 무수히 많은 '변수들의 기록'이다.
어린 시절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꽤 많은 친구들이 '훌륭한 사람', '좋은 부모'라고 답하던 기억이 난다. 나 또한 군자가 되고 싶었다.
중국보다 더 유교적이라는 한국 사회는 유독 내면의 수양을 강조한다. 그 뿌리에는 성리학이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세상 탓을 하기 전에 내 몸과 마음부터 닦으라는 가르침은 우리 DNA에 깊이 박혀 있다.
나는 오래도록 문화의 모범생이자 죄수였다. 꽤 오랫동안 인품이 훌륭한 사람, 어디서나 칭찬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갈등이 생기면 화를 내다가도 "내가 좀 더 참았어야 했나?", "내 그릇이 이것밖에 안 되나?" 하며 스스로를 검열했다. 타인의 시선과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문제는 항상 '나의 부족함'으로 귀결되었다.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이 질문에 답을 찾고 싶었다. 뼛속까지 이과생이었던 나는 정답이 없는 심리의 세계가 궁금해졌고, 결국 공부를 시작했다. 1+1=2라는 똑 떨어지는 수학 공식의 세계가 아닌,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복잡계를 이해해보고자 발을 들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과적 두뇌를 가진 나에게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말은 무척이나 화나는 말이었다.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정답이 없다니. 당시의 너무나 성의 없는 변명처럼 들려 분노를 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말이 과학적인 진실이었음을.
과학의 세계에서 물과 얼음을 살펴보자
이것은 자연의 섭리다. 물이 얼음으로 변했을 때, 우리는 물에게 "너는 왜 그렇게 차갑고 딱딱해졌니? 인격(물성)이 변했구나"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온도가 영하로 떨어졌구나"라고 날씨를 탓할 뿐이다. 즉, 물의 모습은 그때그때 다르다.
하지만 유독 사람에게만은 이 과학적 원리를 적용하지 않는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업무 환경(영하의 날씨) 속에 있는 동료에게 "요즘 왜 그렇게 까칠해(얼음 같아)?"라며 그의 성격을 비난한다. 혹은 그런 자신을 보며 "나는 왜 이렇게 인내심이 부족할까"라고 자책한다.
이것은 비과학적이다. 상황 변수를 무시하고 개인의 기질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영하의 날씨에 수영복을 입고 나가서 "왜 춥지? 내가 나약한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직함은 미덕이다. 하지만 주변 맥락을 살피지 않고 한길만 고집하는 태도는 변화무쌍한 현대 조직 사회에서 '맥락맹(Context Blindness)'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우직하게 실행하는 것과, 상황을 못 보고 고집부리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은 B = f(P, E)라는 공식을 남겼다.
행동(B, Behavior)은 개인(P, Person)과 환경(E, Environment)의 함수라는 뜻이다. 조직심리학에서도 개인과 환경의 적합성(P-E fit)을 중요하게 다룬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변수 분리(Variable Separation)'다.
물을 얼음으로 변하게 하는 변수가 '영하의 기온'이듯, 나의 행동이라는 결과물을 개인과 환경의 변수로 분리해 보는 것이다. E라는 환경변수를 추가해보자.
일이 잘못되었을 때, 혹은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무작정 '내 탓이오'하는 습관을 멈추고 이렇게 질문해 보자.
"나(P)라는 변수는 그대로인데, 어떤 환경 변수(E)가 개입해서 이런 결과값(B)이 나왔을까?"
당시의 맥락, 조직의 압력, 시스템의 부재라는 '환경 변수'가 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하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적) 성찰이다.
특히 그동안 스스로에 대한 내면 성찰을 할 만큼 했다면, 그럼에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고 느낀다면,
이제 시선을 밖으로 돌려 '바깥 일기'를 써볼 때다.
아니 에르노가 그랬듯, 이제는 나를 파고드는 대신 나를 둘러싼 외부를 기록해 보자.
바깥 일기를 쓸 때 비로소 진정한 객관화가 시작된다.
나의 '성격이나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처한 '온도'가 핵심이었음이 명확해진다.
[내면 일기]
"오늘 회의에서 부장님께 화를 냈다. 그동안 그렇게 마음 수양을 하고 명상을 했는데도 그걸 못 참고 화를 내다니... 나는 아직도 감정 조절이 안 된다. 수양이 부족하다."
결론: 나는 아직도 멀었다.
[바깥 일기]
"오늘 회의에서 부장님께 화를 냈다(나의 행동).
중요한 보고서를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데 아직 마치지 못했었다. 사전 귀뜸도 없이 추가 업무를 받은 상황이었다. 마감 압박감이 높았던 상황(E)이라 평소와 달리 화를 낸 것 같다."
결론: 나는 압박 상황에서 예민해지는 사람이니, 다음엔 마감 일정을 미리 조율하자. (대안)
역사의 쓸모가 과거의 맥락을 통해 현재를 살아갈 지혜를 얻는데 있듯이, 우리의 일기에도 나를 둘러싼 상황적 변수를 함께 담아보자.
지금 얼어붙어 있다고 느낀다면, 당신의 내면이 아니라 바깥 온도를 점검해보자.
그럼 알 수 있다. 내가 원래 차가운 얼음이 아니라, 그저 영하의 날씨에 있는 물이었다는 사실을.
당신은 여전히, 흐를 수 있는 물이라는 점도
[조직심리학자 Dr. Jamie's Note]
'나'라는 복잡계(Complex System). 다양한 변수를 고려할 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성원 각자가 '자신에게 맞는 온도를 찾도록, 그리고 그 환경을 만들어 가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