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무심코 TV를 켠다. 화면 속 소리와 움직임이 백색소음처럼 방 안을 채우고, 나는 소파에 앉아 잠시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문득, 그렇게 TV를 켜두는 내 행동의 이유를 알게 된 적이 있다. 유현준 교수가 ‘알쓸신잡’에서 말했다. 원시시대 인간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긴장감을 풀었다고. 현대 사회에서 그 불은 TV 화면이 되었다. 불꽃처럼 움직이는 화면이 우리의 불안을 잠시 내려놓게 해준다는 것이다.
곧 떠날 8년 만의 유럽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여행에서의 나를 떠올렸다. 숙소를 고를 때면 유난히 창밖의 뷰에 집착한다. 일정이 빽빽해 방에 오래 머무를 일도 없으면서도, 나는 늘 창이 넓고 테라스가 있는 곳을 찾는다. 비싸더라도 상관없다. 처음엔 그저 좋은 경치를 보고 싶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그것은 쉼을 위해 떠난 여행에서도 나의 불안감을 낮추기 위한 선택이었다.
창밖의 풍경은 나를 잠시 멈추게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지나는 사람들, 시간에 따라 변하는 하늘의 색. 자연스럽게 흐르는 그 움직임은 말없이 나를 진정시키고, 마음 한구석을 조금씩 비워준다. TV처럼 빠르게 타오르지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더 깊고 오래가는 쉼을 준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가 사는 집의 창은 그저 작은 틈에 불과하다. 빽빽한 건물들 사이에 가로막힌 시선, 그 너머에는 볼 것이 없다. 시끄러운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창문은 이중 삼중으로 닫아 두고, 암막 커튼을 드리운다. 빛도, 바람도, 움직임도 차단된 채, 창은 외부를 경계하는 장치가 되어버렸다. 특히 나처럼 빌라나 오피스텔에 사는 1인 가구들은 더 이상 창밖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나는 창밖의 풍경을 더 갈망한다. 움직이는 불처럼, 창밖의 움직이는 세상도 나의 긴장을 풀어주는 오래된 본능의 일부일 테니까. 여행지에서 마주하는 창밖은 그 자체로 쉼이 된다. 잠시라도 테라스에 앉아 흐르는 하늘과 바람을 바라보면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다.
TV 화면 속 움직임이 남기는 피로와는 다르게, 창밖의 풍경은 내 안의 불안을 잠재우고 나를 회복시킨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창밖의 뷰를 찾는다. 창가는 나를 잠시 멈추게 하고, 긴장된 일상 속에서 잠시 숨 돌릴 틈을 준다.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도 창밖을 편안히 바라볼 수 있는 환경과 여유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바쁜 삶 속에서도, 창문 하나로도 충분히 내 마음을 쉬게 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