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직업의식을 조금 더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경찰
언니들이랑 셋이서 염리동에 살 때의 일이다. 아직 대학생이었고 휴학 중이었는지 방학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집에서 빈둥거릴 무렵이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한마디로 대중없는 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그날도 11시쯤 여유 있게 일어나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오늘은 뭘 하며 하루를 낭비해볼까 생각하면서 한참 씻고 있는데 뭔가, 뭔가가 이상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욕실 창문을 쳐다봤다. 뭐가 휙 지나가는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안 보였다. 고양이인가? 다시 샤워를 하는데 조금 뒤 분명히 시선이 느껴졌다. 그 순간 보라색 조끼에 뿔테 안경을 쓴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홀딱 벗고 샤워하다가 모르는 사람이랑 눈이 마주쳤을 때의 경악을 표현할 단어가 세상에는 아직 없다. 그 단어가 없어서 째지게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질렀다기보다는 몸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무렇게나 옷을 집어 입고 울면서 112에 신고를 했다.
얼마 안 있어 경찰 두 명이 집으로 찾아왔다. 엉엉 울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 놀랍게도 설명하는 내내 몸이 덜덜 떨렸다. 살면서 사시나무를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사시나무가 나처럼 떨겠거니 싶었다. 자초지종이라 봤자 한 줄로 요약하면 "샤워하는데 누가 들여다봤어요"였고 내 이야기를 들은 경찰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빌라 주변을 한 바퀴 죽 돌아봤다. 죽 돌아본들 뭐가 나올 리가 있나. 별로 해줄 것이 없었던 그들은 가기 전에 고맙게도 욕실 창문을 꼭 닫아 잠가주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내가 지금 창문 잠글 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지 않냐고 지랄하기에 내 정신은 이미 반쯤 육체를 떠나 있었다. 경찰 둘은 "순찰을 더 자주 돌겠다"라는 전혀 위로 안 되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사건의 전말을 들은 꼭대기층 집주인 부부는 더 기가 막힌 반응을 보였다. "아휴, 동네 학생들이 호기심에 그랬을 거야~, 응 아가씨들끼리 사니까 그냥 애들이 호기심에~" 그들은 눈은 울고 입은 웃는 얼굴로 이 일이 혹시라도 집값이나 임대사업에 영향을 미치면 어쩌나 하는 의중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이는 말만 내뱉었다. 호기심이 뭐, 어쩌라는 건가. 나에게 동네 학생들의 호기심을 양해해줄 의무라도 있다는 건가. 애초에 이건 귀여운 호기심이나 아량을 베풀고 말고의 문제가 전혀 아니지 않나! 며칠 뒤 집주인 부부는 대문에 번호키를 달았다. 변태가 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욕실을 들여다봤다는 전언을 그새 잊어버린 걸까. 창문을 잠가주고 떠난 경찰만큼이나 형식적인 제스처였다. 그냥 적당히, 조용히, 원만하게 넘어가 주기만을 바란 그들에게 꼭 억울하고, 소름 끼치고, 정신적으로 타격이 되는 일이 생기길 바랐다.
평소 상상 속의 나는 이런 일이 생기면 변태 새끼를 잡아다가 고추에 끓는 기름을 부어버리는 기개와 의욕을 가진 멋쟁이였는데 실제 나는 사건이 준 충격과 공포를 전혀 이기지 못하고 몇 달을 파들거렸다. 굳게 닫힌 욕실 창문에 햇빛만 어른거려도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밖에 누가 있는 것 같다"며 회사에 있던 당시 남자 친구를 헐레벌떡 달려오게 만들었고 밤에는 누군가 이 집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범인은 분명 오랜 관찰 끝에 여자들만 사는 집임을 확신하고 욕실 안을 들여다봤을 것이었다. 샤워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데 귀신 같이 알고 나타난 것을 보면 물소리가 들리는 거리에 사는 사람 같았다. 명탐정 코난이 아니어도 당연히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인데 애초에 범인을 잡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던 경찰은 아무 도움이 안 됐다. 이 나라는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직접 구청에 전화를 걸어 골목에 시시티브이를 달아달라는 민원을 넣었다. 욕실 쪽에는 가짜 시시티브이를 사서 달았다. 슈퍼 아주머니, 수선집 아저씨에게 이런 인상착의의 사람을 보면 말해달라고 이야기도 해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출하는 게 무서웠던 나는 근처에 사는 남자 동기들에게 데리러 와라 데려다줘라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해댔다.
스물몇 살의 봄 한 철이 그렇게 불신과 신경과민 속에 지나갔고 얼마 안 가 우리 자매는 이사를 했다.
얼마 전 '여자의 자취방'이 SNS에서 화제가 됐었다. 주제는 대강 두 가지 정도였다.
1. 여자의 자취방이 얼마나 혼돈의 카오스인가.
2. 여자의 자취방이 얼마나 위험한가.
1번은 집안일에 소홀하다 보면 흔히 만들어지는 새로운 생태계에 대한 사례들이 주를 이뤘다.(나도 베란다에 내다 놓고 잊어버린 냄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꼭 한 번 기록할 생각이다.) 2번에 대한 간증은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것부터 생명을 위협하는 것까지 범위가 다양했다. 특히 전에 다니던 미용실 언니의 경험은 '데자뷔인가?!' 할 만큼 내 경험과 비슷했다. 주방 창문으로 누가 들여다 봄 - 112에 신고 - 경찰이 다른 건물 가서 "경찰입니다!" - 범인 이미 도망감 - 범인은 같은 건물 사는 남자로 추정됨 - 집주인한테 말했더니 "아니 남자애들이 여자가 이사 와서 궁금해서 봤을 수도 있지!" - 언니 방뺌. 이건 무슨 매뉴얼인가 싶을 정도로 똑같은 일을 전혀 다른 동네에 사는 여자가 겪은 것이다. 내 친구 휴는 여자애 2명과 함께 빌라 1층에 사는데 지난달 어떤 남자가 창문에 손을 집어넣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아가씨들 남자 친구 아니야?"라는 개 짖는 소리를 하고 그냥 돌아갔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전에 염리동에 있던 경찰이 연남동으로 옮겨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직업의식을 이렇게까지 엿이랑 바꿔먹은 경찰이 또 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자취방은 그 자체로도 위험하고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서 더 위험하다. 이런 일상의 위협은 '좋게 좋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는 에피소드'나 '소소한 해프닝'이 아니다. 별 거 아닌 일인 것처럼 피해자의 공포심을 축소하고 가해자의 범죄를 가볍게 만드는 경찰의 태도는 성 범죄를 해결하는 데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운동화 만드는 사람의 희박한 직업의식은 발을 좀 아프게 하는 정도지만 경찰의 직업의식 부재는 사회를 위험하게 만들지 않나. 112에 신고를 하고도 백주대낮에 남자 친구한테 맞아 죽은 여자가 있는 세상이다. 적어도 직업이 경찰이라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며 손 쉽게 체념하지 않길 바란다. 이런저런 위험을 어쩔 수 없는 것은 자취방에 사는 여자지 공권력을 가진 경찰이 아니다. 다만 먹고살기 위해 경찰이 됐다고 하더라도 근무시간 중에는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최선이 뭔지 모르겠다면 글로라도 배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