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캠퍼스 구석에 위치한 검도장에서 부원들과 함께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습 도중에 갑자기 처음 보는 할아버지
한 분이 검도장에 불쑥 나타났다.
그 수상한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도복으로 갈아입더니 마치 원래부터 검도부원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우리가 연습하는데 동참하시는 것이었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아무리 봐도 우리 학교 학생 같진 않은데...
옆에 있던 검도부 동기에게 혹시 저 할아버지가 누군지 아냐고 물었다.
동기는 그 할아버지가우리 대학 검도부 OB라고 했다. 그것도 나보다 나이가 45살이나 많은대선배님이었다.
'선생님'이나 '어르신'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잠시 고민했지만,검도부 사람들은 그 할아버지를 편하게 '선배'라고 불렀다.
#2. 이상한 선배
그 할아버지.. 아니 그 선배는 좀 이상했다.
그 선배는 검도장에 올 때마다 삐까뻔쩍한 스포츠카를 타고 등장하곤 했다.
옷차림은 방금 밀라노를 순회하고 온 듯한 쫙 빼입은 맞춤 정장 차림이었고,
종종 멋스러운 청바지를 입고 나타나기도 했다.
그 선배는 슈퍼맨 같은 강철 체력의 소유자였다.
20대 혈기왕성한 젊은이가 해내기도 벅찬 검도 훈련을 거뜬하게 소화해냈고, 한 번도 지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70에 가까운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엄청난 체력을 자랑했다. 매번 도핑을 하고 검도 연습에 오시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 선배는 (비싼) 밥을 잘 사줬다.
검도 연습이 끝난 후 종종 눈 돌아갈 정도로 고급스러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비싼 코스 요리와 고급 와인을 사주셨다. 태어나서 와인을 마셔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신에게 득 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항상 베풀기만 하셨다. 그 선배의 지갑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무엇보다 가장 신기했던 건 나이 차이가 45년이나 나는 데도 대화할 때 세대 차이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개그맨이 많기로 유명한 오사카 출신인 그 선배는 유머감각과 재치가 넘쳤다. 최신 트렌드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용어도 훤히 꿰고 있었다. 손주뻘 되는 후배들한테도함부로 말을 놓는 법이 없었고,'라떼는 말이야~ 요즘 애들은~'등 훈계하는 듯한 말을 입에 올린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항상 유쾌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밥도 잘 사주는데 재밌기까지 하니 그 선배를 싫어할 수가 없었다.
그 선배는 항상 돈과 시간, 그리고 자신감과 여유가 흘러넘쳐 보였다.
도대체 어떤 회사를 다니다가 은퇴했길래 저렇게 돈이 많은 걸까?
도대체 그동안 어떤 인생을 살아왔길래 저렇게 젊게 살 수 있는 걸까?
그 선배의 정체가 궁금했다.
#3. 슈퍼 토마토를 파는 괴짜 사업가
검도부 동기는 그 선배가 농업 관련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현역사업가라고 했다.
토마토의 유전자를 편집해 몸에 좋은 효능을 강화한 슈퍼 토마토를 만들어서 판매한다고 한다.
'슈퍼 토마토?'
사진 출처: 픽사베이
직접 토마토 농사를 지으신다는 말인가?
유전자 편집은 또 뭐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단어에 내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찼다.
'토마토 농사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그런데 유전자 변형 토마토는 위험하지 않나..?'
'애초에 멀쩡한 토마토를 왜 조작하는 거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회사가 만든 유전자 조작 토마토를 과연 누가 사줄까?'
'그런 수상한 토마토로 어떻게 돈을 번다는 거지? 말도 안 돼!'
점점 내 머릿속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찼고,
어느새 그 선배가 수상한 사기꾼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식견이 좁고 무식했던 나는 남들이 다 알만한 대기업에 다니는 것만이 인생의 정답이라고 생각했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검도부 OB들이 가끔 주말에 검도장에 오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회사 이름이 크게 박힌 명패를 찬 선배들이 눈부셔 보였다.
수상한 토마토나 파는 그 사업가 선배는 평일·주말 할 것 없이 허구한 날 검도장에 오는데,
대기업 다니는 선배들은 주말에만 가끔씩 검도장에 방문했다.
당시 내 눈에는 당연히 대기업 다니는 선배들이 사회적으로 훨씬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다.
대기업도 아니고, 듣도 보도 못한 작은 농업 회사를 운영하는 데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사업은 그냥 취미로 하는 거고,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금수저일 거라 어림짐작했다.
#4. 괴짜 사업가 선배의 근황
그로부터10년의 세월이 흘러 서른 살이 된 나는
해외 주재원 신분으로 20대의 절반을 보냈던 도쿄에 다시 돌아왔다.
일본과의 연이 질기긴 질긴가 보다.
얼마 전 대학 검도부 동기들과 오랜만에 만났다.
그동안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을 공유하다가
일본 대형 은행에 다니던 검도부 동기가 최근
'그 선배'가 운영하는 벤처기업으로 이직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선배 아직 살아계시니?"
나도 모르게 실언이 나왔다.
지금쯤 70대 중반 정도 되셨을 텐데 아무리 체력이 좋다고 해도 나이가 있으니 예전 같진 않으시겠지..?
동기는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아직도 너무 건강하게 잘 살아 계시고, 10년 전과 변함없이 활발히 사업가로 활동하고 계시다고 말했다.
요즘은 검도장에는 안 나가지만 그 대신 매일같이 골프장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고 한다.
골프장에서 몇 시간씩 라운드를 돌고 나서도 성에 차지 않아 헬스장에서 3시간씩 운동을 하고 귀가한다는 후문이다. (보통의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체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