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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er Nov 24. 2021

일본 대기업 퇴사자의 한국 대기업 취뽀기(뽀개진 후기)

ep4. 한국 대기업 취업 뽀개려다 뽀개진 후기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원하는 걸 손에 넣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취업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원하는 기업에 합격해서 친구들과 축하파티를 열 때, 다른 누군가는 도서관으로 돌아가서 다시 문제집을 펼친다.


'이번에는 진짜 느낌이 좋아..!'


내심 합격을 기대하며 중고서점에 모조리 팔아버린 인적성 문제집을 비싼 돈을 주고 다시 사야 하는 비참함.

친구들은 멀끔한 정장 차림으로 첫 출근을 할 때

후줄근한 츄리닝 차림으로 도서관에 출근해야 하는 착잡한 현실.


그렇다.

바로 내 이야기다.





#1. 환장의 콜라보

  


일본에서 멀쩡한 대기업에 다니다가 1년 만에 때려치우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스펙 알거지였다.


한국 친구들이 '가쓰오부시' 대학으로 잘못 알아들을 정도로 국내에선 인지도가 없는 듣보 일본 국립대 출신에 학점마저 2점 초반대.

환장의 콜라보다.

먹음직스러운 가쓰오부시.. 오코노미야키 먹고 싶다. (출처: https://itakura-fdfish.com)


한국에서는 대기업은커녕 중소기업 취업도 어림없는 스펙이다.

출신 학교와 이미 조져버린 학점을 되돌리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단기간에 만들 수 있는 스펙 쌓기에 집중했다.


 3개월 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토익 940/토익스피킹 Lv.7/JLPT 1급/한국사 1급이라는

4가지 무기(스펙)를 장착했다.


든든한 무기(몽둥이) 장착!
유스펙 취준생으로 새롭게 태어난 필자 (캐릭터 사진 출처 : 메이플스토리)


우수한 K-취준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엔 한참 부족한 스펙이었지만,

휴학생도 아 백수 신분이었기 때문에 공백이 길어지는 건 부담스러웠다.

서류 지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스펙 요건만 갖춘 후, 대기업 하반기 채용 시즌에 맞춰서 취업시장에 문을 두드려 보기로 했다.



#2. 우문 노답

  


막상 이력서와 자소서를 쓰려니 덜컥 겁이 났다. 내 스펙으로 대기업 서류 통과가 될지 안 될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국 취준생들이 많이 모이는 취업카페에 가입했다. 허구한 날 취업카페에 들락거리며 나랑 스펙이 비슷한 취준생들이 올린 스펙 평가 요청 글과 취업 후기를 찾아 헤맸다. 틈만 나면 질문 게시판에 들어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주구장창 올려댔다.


'학점 2점대도 대기업 취업 가능할까요?'

'대기업은 학점 많이 보나요?'

'해외 대학 출신도 대기업 취업 가능할까요?'

'자소서로 학점 커버 가능할까요?'

'공모전이나 수상경력이 없어도 괜찮나요?'

....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질문이지만, 희망고문이라도 좋으니 '스펙이 안 좋아도 노력하면 대기업 취업이 가능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질문 자체가 우문이다 보니 명쾌한 답을 얻을 리 만무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우문 노답'이라고 하나 보다.


한 가지 신기했던 건, 나보다 스펙이 훨씬 좋으신 분들이 오히려 더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는 점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건가..!! 그만 숙여도 될 것 같은데...


K-취준생들은 스펙도 좋으면서 겸손하기까지 했다. 다들 스펙이 출중한데도 여전히 본인이 어떤 스펙을 더 채워야 하는지 평가와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 질문자 : 학점이 3점 초반대인데 대기업 합격 가능할까요?ㅠㅠ (기타 자격증, 대외활동 빵빵함)

- 댓글러 1 : 학점이 많이 약하네요.. 다른 스펙에서 커버하셔야 할 듯..
- 댓글러 2 : 학점이 부족한 만큼 직무 관련 경험에서 만회하셔야겠네요.
- 댓글러 3 : 인턴이나 직무 관련 자격증 좀 따시는 게 안전하실 듯..


예.....?


취업카페 댓글러들의 살벌한 스펙 평가 글을 보고 있자니 고작 어학점수와 한국사 1급 딴 거 가지고 의기양양했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제목 : 25/여/스펙 평가 부탁드립니다


- 학교/전공/학점 : 일본 가쓰오부시..국립대/경제학과/2점 초반대

- 어학점수 : 토익 940점, 토스 Lv.7, JLPT 1급

- 자격증 : 한국사 시험 1급

- 경력사항 : 일본기업 IT사업부 예산관리 1년

- 대외활동/공모전 : -

- 수상경력 : -


하...

도저히 쪽팔려서 취업카페에 스펙 평가 요청 글을 올릴 수가 없었다. 작성해둔 글은 내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해두기로 하고 조용히 삭제 버튼을 눌렀다.


냉정하게 따지면 내 스펙으로 대기업 취업은 어림도 없는 걸 너무도 잘 알지만,

인간이란 참 간사한 게 남한텐 엄격하면서 자기한텐 한없이 관대해진다.

눈에 보이는 스펙이 아닌 내 가능성과 잠재력을 알아봐 줄 대기업이 어딘가엔 있을 거라고 믿었다.



#3. 스펙보다 자소서라고?



사람인, 잡코리아 등 취업 포털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물론, 대기업 채용 홈페이지, 채용 전용 SNS 채널, 현직자 인터뷰 영상, 취업 성공 후기 등등.. 대기업에서 직접 발신하는 취업 관련 정보까지 모조리 뒤졌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나 현직자 인터뷰를 찾아보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 같이 '무의미한 스펙보다는 자소서를 더 중시한다'라고 말했다.

자소서에서 꾸미지 않은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해진 세상이라고 강조했다.


"무의미한 스펙보다는 자소서를 더 중시한다"라는 말이 내 귀엔

"스펙이 거지 같아도 자소서를 잘 쓰면 대기업 서류전형에 합격할 수 있다!"라는 말로 들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떠오른 한 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일본에서 취준을 하면서 자소서를 작성해본 경험이 많았고, 일본 대기업 서류 전형에서 떨어진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자소서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일본 대기업에서 원하는 인재상은 적당히 스마트하면서 조직에 잘 융화될 수 있는 인재,

바꿔 말하면 같이 일하고 싶은 동료에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일본 기업은 화려한 스펙자랑하는 지원자보다 대학 시절 좋아하는 무언가에 열중했던 경험이나 팀워크 경험을 가진 지원자를 훨씬 선호했다. 자소서와 면접에서 묻는 것도 1) 지원동기, 2) 학창 시절 열정을 쏟아부은 경험이나 어려움을 극복한 경험, 3) 팀워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 경험 정도였다. 신입 공채 지원자에게 직무 관련 경험을 묻지는 않았다.


결국 회사라는 조직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거기서 거기일 테고, 한국 대기업에서 원하는 인재상도 일본 기업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한껏 충전한 상태로 하반기 공채를 진행 중인 대기업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4. 슈퍼 인재를 원하는 한국 대기업



당시 하반기 공개 채용을 진행하는 대기업 홈페이지에는 다 들어가 봤다.

그런데... 한국 대기업에서 요구하는 자소서 문항을 쭉 훑어보고 솔직히 많이 놀랐다.

기업마다 요구하는 자소서 문항이 다 다른 건 기본이고, 요구하는 분량도 말도 안 되게 많았다.

심지어 한 문항 당 몇 천자씩 요구하는 기업도 있었다. 게다가 자소서 문항 자체도 좀 이상했다.


"귀하가 직무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본인의 역량 및 직무 관련 경험근거로 서술하시오."

"△△기업의 과제 해결을 위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시오."

"군대 경험이나 신체 경험(운동), 개인 취미 등 직무 역량을 판단할 수 없는 경험은 가급적 작성을 삼가주시오."


'신입사원 채용'이라고 명시해놨으면서 경력직 채용에서나 할 법한 '직무 관련 경험'을 묻는 문항부터,

자기네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의 해결 방안을 취준생한테 묻는 문항까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이 수두룩했다. 더 어이없는 건 군대 경험이나 운동 경험 등 직무 역량을 판단할 수 없는 경험은 작성하지 말라고 대놓고 명시한 곳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 도대체 뭘 적으라는 건지.. 자소서가 아니라 자소설을 쓰라는 건가?

대학 시절에 검도 밖에 안 한 나는 지원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뜻인가? 눈앞이 캄캄했다.


어찌 됐건 일단 아쉬운 건 내쪽이니까 대기업님들의 까탈스러운 요구 사항에 최대한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취업카페나 취업 노하우가 담긴 책을 통해 합격 자소서도 많이 보고, 취업 관련 인강 사이트에서 자소서 쓰는 법에 대한 강의도 들었다.

차별화된 지원동기를 쓰기 위해 기업의 최근 사업 추진현황과 관련 기사도 열심히 조사했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인재상에 최대한 맞춰서 내 경험을 자소서에 녹여냈다. 스펙이 부족한 만큼 자소서에 영혼을 갈아 넣었다.


당시 하반기 채용을 진행하던 대기업 그룹에는 모두 지원했다.

삼성, CJ, SK, 한화, 효성, 두산 등 다 합쳐서 스무 군데 조금 안되게 서류를 넣었던 것 같다.

LG그룹은 '학점 조건이 3.0 이상'이라고 명시되어 있어서 넣지 않았다.


서류 전형에 합격했을 때에 대비해 서점에서 인적성 책도 구입했다.

무슨 회사별로 인적성 시험 책도 다 다른 건지..

다 합쳐서 10만 원 조금 넘게 나왔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돈 없으면 취준도 못하겠다 싶었다.


서류를 넣고 약 한 달 남짓 남은 동안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결과 발표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무리 못해도 세네 군데 정도는 붙겠지 내심 기대했다.



#5. 두근❤두근 대기업 서류전형 발표날



10월이 되자 하나둘씩 서류전형 결과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다음은 대기업 서류 전형 결과 발표날 작성했던 글이다.


일단 눈물부터 좀 닦겠다...




2016년 10월 8일 토요일


하...


효성, 두산, 삼성까지 3개사 연속 광탈...


내 자소서가 문제이거나 스펙이 문제겠지..

특히 낮은 학점..

다음 주는 CJ E&M이랑 SK가스 결과 발표인데

떨어진 세 기업에 넣었던 자소서와 내용이 겹치니까..

서류 통과할 가능성이 굉장히 낮을 것 같다.


인적성 문제집 사놓은 거 진짜 돈 아까워 죽겠다.. 하..

인적성 시험 칠 기회조차 없다니.. 착잡하다..

진짜 한국 대기업 취업이 어렵긴 어렵구나..

아님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거나..

막상 연속으로 서류 광탈하니까..

멘탈이..나가네..ㅠㅠ


역시 내 스펙으로 한국 대기업은 안되나 보다..

25살이나 먹고 언제까지 부모님 집에서 신세 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벌써 일본에서 귀국하고 6개월이나 지났는데

그동안 뭐 하나 이룬 게 하나도 없다...


만약 앞으로 남은 서류 전형에서도 다 떨어지면

앞으로 어떡하지...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렇다.

그 이후 발표된 대기업 서류전형에서도 나는 줄줄이 탈락했다.

기업별로 원하는 인재상에 맞춰 정성스럽게 자소설을 작성하고, 기업 관련 온갖 정보를 다 뒤지며 기업 분석도 정말 열심히 하고,

인적성 시험공부도 하고 별의별 난리를 다 쳤는데 그 결과는...


귀하의 우수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어쩌고 저쩌고...
귀사는 서류 전형에서 불합격하셨습니다.
그간 보여주신 열의와 관심에 감사드리며
귀하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대기업 스무 군데 서류 전형 ALL 불합격"


서류를 넣은 모든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ALL 광탈했다.

내 멘탈도 함께 광탈하고 머나먼 안드로메다로 떠났다.


한국 취업시장의 최강자 대기업 보스를 쓰러뜨리려면 초고스펙 최강 무기를 총동원해도 모자랄 판에 고작 몽둥이 하나로 덤벼들다니... 너무나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국 대기업 취업을 뽀개 보려고

호기롭게 덤벼들었다가

장렬하게 뽀개졌다.


무시무시한 대기업 보스전 (사진 출처: 메이플스토리 M)




To be continued...




지난 이야기 ▶ "취업 게임에 참가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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