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도쿄로 상경한 그녀는 '마루노우치'에서 멋지게 일하는 커리어우먼을 표방하지만, 현실은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 파견사원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녀는 리켄베커 620 일렉 기타를 사러 악기상이 많은 오챠노미즈에 가지만, 19만 엔(200만 원)이나 하는 기타를 살 돈이 있을 리 없다. 방구석에서 비싼 마샬 앰프를 사용한 밴드 음악을 틀어놓고 절정에 달하는 것이 유일한 낙인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타 장비라고는 싸구려 랫(RAT) 이펙터 하나가 전부다.
도쿄로 상경한 직장인 여성의 팍팍한 도시생활과 애환을 담은 <마루노우치 새디스틱>은 일본의 90년대 노래 중 최초로 빌보드 재팬 차트에서 스트리밍 누계 조회수 1억 회를 돌파한 곡이다. 이 곡은 일본을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이자 록밴드 '동경사변(東京事変)'의 리더 시이나 링고가 18세 때 작곡한 노래다.
#1. 마루노우치 새디스틱
10년 전 일본 유학 시절,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1999년에 나온 곡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감각적인 멜로디에 한 번 놀랐고,
팍팍한 도시 생활의 애환을 이상야릇하면서도
참신하게 표현한 가사에 두 번 놀랐고,
이 곡을 사회생활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18살짜리 소녀가 작곡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뭐든 쉽게 질려하는 성격 때문에
연예인이나 가수 덕질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던 나는 이 노래를 계기로 시이나 링고의 음악에 푹 빠져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중2병을 대학교 2학년 때 겪게 된 것이다.
('대 2병'이라고 해야 하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트렌디하고 힙한 한국 노래에 귀가 익숙해져 일본 노래를 거의 듣지 않고 있다가
며칠 전,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시이나 링고의 10년 전 라이브 영상을 보게 됐다.
데뷔 이후 꾸준히 천재 아티스트로 불려 온 그녀는 재즈, 록, 일렉트로닉, 팝, 보사노바 등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음악을 만들어왔다. 보컬은 물론, 기타와 키보드,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룰 수 있으며 작곡, 작사, 편곡, 무대 연출까지 해내는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인 그녀는 가히 천재라 불릴만하다.
#3. 엽기적인 그녀
시이나 링고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다.
20년 전이 아니라 20시간 전에 찍은 거 아닌가요?^^ (출처: 엽기적인 그녀, 2001)
<엽기적인 그녀> 속 전지현을 보면
20년 전이 아니라 20시간 전에 찍은 영화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시간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독보적인 매력과 분위기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엽기적인 그녀'를 전지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연기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장르가 전지현'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영화 속 그녀는 대체 불가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시이나 링고의 음악은 마치 <엽기적인 그녀> 속 전지현 같다.
링고가 만든 음악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보통 노래에는 그 시대의 감성이 조금이라도 묻어나기 마련인데, 링고의 노래는 아무리 들어도 언제 만들어진 건지 도통 가늠할 수가 없다. 20년 전에 나온 링고의 노래를 들으면 20시간 전에 나온 노래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그녀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새롭고 신선하다.
링고의 음악은 재즈, 록, 팝, 일렉트로닉, 보사노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기 때문에 어떤 장르라고 딱 정의 내릴 수도 없다.
시이나 링고는
언제 들어도 세련되고 감각적인 멜로디,
귀에 착착 감기는 개성 강한 보컬,
언뜻 보기에는 난해하고 은유적이지만
의미를 찾아보면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인 가사,
신선한 충격을 주는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세련된 무대 매너
그 모든 것을 한데 모아
'시이나 링고'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한 마디로
'장르가 시이나 링고'인 것이다.
(장렬한 덕밍 아웃...)
#부록. 추천 플레이리스트 ♬
혹시나 여기까지 읽고 시이나 링고의 음악 세계가 조금이라도 궁금해지신 분들을 위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이나 링고의 노래 몇 곡을 소개하며 마무리 짓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