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쳐와 스파이더맨

고전 이야기하기 방식의 전복과 그것에서의 해방, 그 결과에 대하여

by 제이미

 스파이더맨 홈커밍이 개봉했다. 톰 홀랜드와 ‘마블’의 새로운 피터 파커, 스파이더맨은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 또 다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캐릭터가 있었으니, 바로 마이클 키튼의 애드리언 툼즈, 벌쳐이다. 이 매력적인 안타고니스트의 사연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와 공감하게 하였고, 눈물짓게 만들었다.




스타크의 아이언맨 가면을 바라보는, 애드리언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이야기는 애드리언 툼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화 어벤져스 이후 철저히 파괴되어 폐허가 된 뉴욕을 재건하기 위해 뉴욕시는 우주 쓰레기를 모아 처리하려 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애드리언의 사업체를 고용한다. 애드리언은 자신의 사업체에 도래한 이러한 사업적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업 확장을 꾀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는 좌절되는데, 이 재난의 범국가적 성격과 외계에서 유입된 진보한 테크놀로지가 쓰레기에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고려한 연방정부가 뉴욕시와 애드리언 사업체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쓰레기 처리의 독점권을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애드리언의 사업체는 재건 사업에서 제외되어진다. 애드리언은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며, 시스템에서 배제되어지는 소자본의 고통에 대해 역설한다. 모든 것이, 스타크 인더스트리와 같은 대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그들을 위해 설계되어지며 결국 그들의 것이 되어버리는, 대자본의 증식 논리 속에서, 애드리언의 사업체와 같이, 실제적 삶의 근간이 되는, 노동자의 가정을 지지하는 선의의 소자본은 착취되어질 뿐 고려의 대상이 되질 못한다는 것이다. 애드리언은 애원한다. 그의 사업체는 단순히 시장주의 경쟁에서의 대자본의 대립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이를 구성하는 개별적 개인들의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이러한 결정에서 자신들을 배제하지 말기를 간청한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비정한 결정에, 그들에게 닥친 생존의 위험 속에서, 애드리언은 더 이상 시스템의 착취적 억압에 굴복하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그가 지탱해야하는 삶의 무게를 위해 그는 기꺼이 체계의 윤리를 거스르리라 결심한다. 그렇게 그는 빌런, 악당, 벌쳐로서 다시 탄생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이 심오한 프롤로그는 다소간에 이례적이다. 보수적 내러티브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할리우드 영화, 그 보수적 산업의 총아로 불리는 프랜차이즈 영화, 그중에서도 가장 근래에 발달하여 여러모로 산업의 첨단에서 제작되어지는, 그래서 더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에서라면, 보통 안타고니스트 이전에 프로타고니스트, 즉, 영웅의 이야기가 먼저 다루어지는 게 상례이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히어로 캐릭터가 이야기의 핵심이니만큼 말이다. 그것도 새로이 시작하는 시리즈에서라면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영화가 우리의 주인공을 소개하는 것이 먼저일 것인데,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그러한 관습적 글쓰기 방식을 따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야기하기 방식에서의 차이는, 현대 영화를 특징짓는 탈중심 내러티브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포스트모던 이전 시대의 고전적 서사에서 프로타고니스트는 그저 악한으로 그려지기 일쑤였다. 그의 이야기는 늘 스크린 이면에 존재했으며, 이야기의 주요한 시공간적 배치에서는 늘 배제되어지곤 했다. 그는 프로타고니스트의 대립자로서만 존재했으며, 그리 존재하기 위해서만 구성되어졌다. 현대 영화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경향이 반전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면서, 거시 세계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미시 세계가 지닌 가치에 대한 탐구기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탐구가 그간에 억압되고 차별되며 가려져 있던 것들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지면서 반전이 발생한 것이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벌쳐가 그저 빌런으로서 이야기되어지는 게 아니라, 그 사연이 조명되어지게 된 것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기인한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반전이 슈퍼히어로 장르의 태동과도 연관되어 있음은 자연한 일이다. 기존의 코믹스에 대한 세계의 관념은, 그것이 그저 유치한 아이들의 상상놀이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열등한 정신을 소유한 청소년 이하 어린이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며 성인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열등한 정신의 아이들을 미혹하기 위해 그저 폭력과 섹스를 전시하는 비윤리적인 저열한 방식으로 제작되어지고 그렇기에 배척되어야할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코믹스는 그저 청소년 이하 어린이들의 서브컬처로서의 지위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을 뿐 결코 진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코믹스가 편견을 극복하고 자본 증식을 위해 보수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할리우드 시스템의 첨단에서 슈퍼히어로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로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코믹스를 보고 자라나 코믹스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베이비붐 세대가 장성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그간 무시되고 조롱거리로서 여겨졌던 코믹스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를 주류 문화에 편입시키며, 사회적 억압에서부터의 해방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의 일례를 만든다.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는 그러한 사상적 전복과 슈퍼히어로 장르의 탄생 이후, 슈퍼히어로 장르가 할리우드의 주요 장르로서 자리매김 하게 되는 과도기에 발생한 시도 중 하나였다.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 시리즈와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의 성공 이후 슈퍼히어로 장르의 상업적 잠재성에 대해 할리우드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CGI 기술의 발전이 기상천외한 만화적 상상력을 영상화하는 데에 있어서 기존에 존재하던 물리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에,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슈퍼히어로 장르를 주도적으로 개발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소니의 컬럼비아 스튜디오가 제작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그러나, 그러한 외부적 변화, 사회적 변화에 부응하는 내부적 변화를 지니는 이야기로 보기에는 다소간에 무리가 있다. 그간에 차별되어온 코믹스의 슈퍼히어로 서사가 메인스트림 안에서 제작되어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그 안에서 이야기 전개의 논리는 기존 과거 세계의 이분법적 구성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여전히 주인공은 선하고 악당은 악하며, 악당은 안타고니스트로서, 그저 주인공 프로타고니스트의 대립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스파이더맨이 커다란 힘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정의에 관한 내적 갈등을 하는 와중에, 그린고블린과 뉴고블린은 그저 그러한 내적 갈등을 외적으로 끌어내는 방해요소로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 빌런들의 사연이 들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연은 늘 과장되어졌고 이들은 왜곡된 존재로서, 그저 타자로서, 악의로서, 악한으로서의 인물로 구성되고 말았다. 메인플롯의 핵심은 언제나 스파이더맨의 내적 갈등이고, 악당들의 이야기는 그저 서브플롯으로 그들의 고통과 고민은 차별되어진다. 그린 고블린은 장르 관습적인 매드 사이언티스트로서만 묘사되고 뉴 고블린은 그저 피해의식 속에 왜곡된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 방탕한 자본가 2세로서만 묘사되는 것이다. 소니와 컬럼비아 스튜디오의 프랜차이즈 리부팅 계획이었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또한 이와 같은 내적 한계를 지니고 있았다.




분투하는 스파이더맨과 벌쳐


 스파이더맨 홈커밍이 이전의 시리즈와 구별되어지는 지점이 바로 이러한 내적 논리의 변화에서이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현대적인 영화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을 그 내적 논리에서부터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프롤로그의 벌쳐의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벌쳐의 짠내 나는 사연 기저에 존재하는, 현실의, 자본 증식 논리의 약육강식 세계는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세계관을 구성한다. 세계는 거시적 대자본의 논리 속에 일그러져있고, 우리와 같은 미시적 존재들은 그저 부차적인 존재로 억압되고, 그저 대상물로서만 존재하며, 그리하여 우리의 주체적 시도는 늘 항상 시련에 닥치고 좌절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벌쳐의 이야기는 스파이더맨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단초가 된다.




 우리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슈퍼히어로로서 지니는 그 고유의 특성을 제외하고서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평범한 열다섯 학생일 뿐이다. 그의 최대의 관심사는, 우리의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대기업, 스타크에서의 인턴쉽으로, 그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여 주류 사회, 어벤져스로의 계급적 상승을 욕망한다. 이러한 현실 세계와의 상동성을 지닌, 핍진한, 영화의 묘사는, 피터의 욕망의 충족 여부에서도 그대로 현실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우리 세계의 욕망의 결말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의 욕망은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좌절은, 피터가 자신의, 정의와 선의에 대한 고유한 고민이 발견되어지고 인정되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스타크 인턴쉽의 과정이, 사실은 그를 그저 합목적성에 맞추어 재단하고 평가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피터의 정의와 선의에 대한 믿음이 지닌 가치는 스타크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이언맨이 스파이더맨을 스카우트한 것은 시빌 워에서의 이념전쟁, 그 헤게모니 싸움에서 세력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아이언맨에게 스파이더맨이 지닌 가치는 자신의 헤게모니를 증식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 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는 앞선 프롤로그의 애드리언의 이야기에서 대자본의 논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스타크와 어벤져스로 대표되는 거시 세계의 대자본은 자기 증식에 대해 고민할 뿐, 미시 세계, 현실 세계의 우리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피터의 이야기는 애드리언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그렇기에 애드리언의 이야기는 피터 이야기가 어떠한 과정에 봉착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미리 이야기하는 예언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빌런의 이야기, 그 관점을 통해 슈퍼히어로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게 되는, 이러한 플롯에서의 전복은 그러나, 기존 플롯에서 벗어났다는 형식상의 특이성을 떠나 내러티브적 측면에서의 질적 도약을 이룩해낸다는 점에서, 나아가 주제적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스파이더맨의 빌런인 벌쳐는, 기존의 내러티브에서라면 그저 안타고니스트로서 존재하기 위해 쓰였을 것인데, 그리하여 그저 타자화 되어 우리와는 다른 괴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었을 것인데, 홈커밍의 내러티브에서는, 우리와 같은 현실적 억압에 봉착한 개인으로서 그려지고, 나와 같은 고민을 공유하는, 그리하여 함께 공동의 적을 향해 싸워나갈 동지로서,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자리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의 이야기는 소외되고 배제되고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고 재평가되며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의 내러티브가, 프로타고니스트가 안타고니스트를 갈등으로 맞이하여 싸움을 통해 이를 해결하는, 단선적인 성격을 띠었다면, 새로운 플롯으로 새로이 발생한 내러티브는,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가 서로간에 충돌하면서도 공동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다층적인 성격을 띠게끔 변화되며 질적인 측면에서 도약하게 된다. 이것은 다시 주제에서의 변화로 이어진다.




 기존의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의 주제는 그저, 선의가 왜곡되어져 슬픔이 되는 비극이었다.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노동을 착취한 자본가를 징벌하기 위해 그의 자본을 강탈한 강도를 저지하지 않는다. 그러한 그의 ‘선의’(선의와 악의를 구분하는 것에는 여러 관점과 판단이 존재하고, 때문에 정의구현의 일반적 윤리를 떠나 사적 복수를 따르는 듯한 스파이더맨의 행동을 악의로 규정하는 일반적인 관점 외에도 이를 선의로 구분하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그러나 그가 사랑해마지않는 엉클 벤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그는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교훈을 얻게 되고 정의구현에 힘쓰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선의는 다시 비극의 원인이 되는데, 그가 정의구현을 위해 저지하는 그린고블린이 사실은 자신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자신을 정서적으로 지지해준 자신의 후원자였고, 동시에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해리 오스본의 아버지인 노먼 오스본이었던 것이다. 이 비극적 사건은, 다시, 피터 파커와 해리 오스본 두 친구로 하여금 대립하게 하는 불행의 씨앗이 된다.


 이러한 운명적 굴레로서 존재하는 비극에 대한 기존의 주제는, 우리를, 비극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며 그저 그 슬픔을 감내해야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서 그린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 저항할 수 없는 존재로 그저 삶의 슬픔을 견뎌내며 서로 대립하게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새로이 발생하는 주제는, 이러한 수동적 인간상을 지워내고 해방으로의 열의 속에서 전진하는 능동적 인간상을 세운다. 우리는 슬픔을 극복하고 대립이 아니라 화합과 연대로서, 비극을 생산해내는 사회 시스템에 대항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스파이더맨을 좌절시키는 것은 운명적인 비극이 아니라, 그를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주류 사회 시스템으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견디고 감내해야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극복하고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발전시켜야할 구체적이고 물적인 대상이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빌런인 벌쳐는 대립자로서 스파이더맨을 방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지만 다른 방법론을 따를 뿐인 존재로 그려지고, 그렇기에 대립하고 저지해야할 타자가 아닌, 토론하고 화해하고 연대할 동지가 된다. 그리하여 스파이더맨은 자본의 결여라는 비극을 극복하고 정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실현해 나아가며, 자신의 동지인 벌쳐를 사랑하고 연민하여 잘못된 방식의 저항에서 그를 구원해내며, 이를 통해 세계의 발전을 이룩해 나아가는 것이다.




피터 파커에게 자신의 입장에 대해 설명하는, 애드리언 툼즈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벌쳐는 이렇듯,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이웃으로서, 우리의 고민과 고통을 대변한다. 그리고 그의 악당으로서의 그러한 특이성은 자칫 공허해질 수 있는 슈퍼히어로의 이야기 속에 깊이를 부여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상을 담는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새로워야 한다. 새로운 빌런, 벌쳐의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우리의 새 시대를 반영하는 새로운 이야기로서의 슈퍼히어로 장르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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