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후반전. 무엇을 해야 하지?
나를 찾아가는 시간 - 조향 공부
휴직 종료 시점까지는 채 반년이 남지 않았다.
전반전엔 일상을 회복하기까지 시간을 썼다면 , 후반전엔 정말 힘을 내야 한다.
다 나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인생은 계속되고 나는 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성인이었다.
물론 기댈 가족도 있고 사람도 있지만...언제까지 기대 살 수는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 하고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낼" 수 있는지였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수 없는 "생계".
세상에 과연 내가 뭘 하며 살고 싶은지, 그리고 어떻게 먹고살고 싶은지를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성인은
얼마나 되려나? 나 역시도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굉장히 막막했다.
내가 뭘 잘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무엇이 필요한지도 잘 모르겠었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운동을 했다. 꽃꽂이를 했고 글을 썼다. 모두 생계와 관련이 없이 한 행동들이었다. 딱히 회복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아무 목적 없었다. 단순히 하고싶은 것을 한 것이다. 이제는 거기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뭔지를 고민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어려웠지만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추려보았다.
잘하는 것. 일단 시작을 잘 한다.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것. 그리고 트렌드(패션 말고)에 민감한 편이다. 낯은 가리지만 어떤 환경적 변화에 적응하는 것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지 않는다.
못하는 것. 사회성이 없다. 돌려서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 남에게 신세지거나 뭘 시키거나 부탁하는 것을 못한다. 흥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고리타분한 규칙에 얽매이는 거 싫어한다.
많은 것들이 있지만 특징을 설명하자면 저렇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남들과 발맞춰 하는 일들이 유달리 스트레스였다. 조율하고 협의하고....10년 넘게 일을 해서 지금에 이르렀지만 스트레스가 크다. 아예 사람 관계를 안 할순 없지만 최소화된 일이어야 좋겠다. 혼자 집중할 수 있는 일. 조직에 얽매여 있지 않아도 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기술을 연마해서 혼자 해내는 일이면 참 좋겠는데... 그래서 또 생각했다. 아예 분야를 바꿔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나는 향기를 좋아하고, 공간과 사람에게 입히는 향기가 주는 힘을 경험한 적이 많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주는 분위기와 감정의 힘은 대단하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음식점, 호텔, 부띠끄, 서점 등 고급 상업시설들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한결같이 그 브랜드의 시그니처라고 할수 있는 고유한 향들을 쓴다. 그 향이 없을 때의 공간을 떠올려 보라. 확실히 다를 것이다.
그 무렵 나는 향수에 빠져 살았다. 처음엔 잠이 오지 않아서 향초를 피우기 시작했던 건데 점점 바디제품이나 향수쪽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차피 시간도 있겠다. 책을 보고 들이 파야 하는 일도 아니니 한번 공부해볼까 해서 인터넷을 열심히 뒤졌다. 그러다 조향사 자격증에 대해 알게 되었다.
조향(아로마 등 향료를 조합해서 새로운 향기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분야가 넓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화장품이나 향수도 있지만 식료품에도 조향기술이 들어간다. 경험한 만큼이나 장소마다 맞는 향기를 내기 위한 작업도 활성화되어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향기도 아이덴티티를 입히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해외 전문 대학원이나 학교에 입학해서 국외 공인 자격증을 따는 것이 아닌 이상 국내에서는 딱히 공인 자격이 없고 민간자격만 있었다. 코시국에 또 내가 어떻게 학교를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온라인으로도 조향 자격증 수업이 있어 탐색 차 듣게 되었다.
아로마키트라고 불리는 기본 향조 30개 정도가 집으로 배달되었고, 향수의 역사부터 향조별 특징까지 이론을 조금 공부하고는 매 회차마다 아로마를 조합해 향수를 만들었다. 그냥 맡으면 조금은 느끼한 동물성 향료가 이런 저런 향료와 섞이면서 우아하고 분위기 있는 향수로 변모하는 것이 매우 신선했다. 일단 기초(주니어) 자격증은 취득했다. 이왕 이럴 거 공부를 더 해볼까 해서 해외도 알아봤다.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2년정도의 학업을 마치면 공인된 기관으로부터 자격을 부여받고 관련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 공방을 낼 수도 있고, 화장품 관련자격 하나만 추가로 더 취득하면 내가 만든 향수를 온오프라인에서 판매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국내외 유수한 향수 화장품 관련 기업에 들어가 관련 일을 할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이 쉽지. 보통은 공방 창업을 통해 자기 브랜드를 내는 것이 현실적 결론이었다. 향수를 그정도로 내가 좋아하나? 냉정히 고민해보게 되었다. 아닌 거 같았다.
그런 것들을 "즐기는" 것과, 그런 것들을 내가 "만들어" 내고 플러스 "수익을 창출"해낼 수 있는가? 아니, 능력은 키운다 치더라도 그런 일련의 일들과 내 나이 등 이미 마이너스인 나의 핸디캡, 시련 등을 뛰어넘을 정도로 좋아해서 자신이 생기는가? 라는 질문에는 YES, 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향수 전문가에 대한 꿈은 접었다. 대신, 취미로는 계속 만들며 지인들에게도 선물하고 나만의 고유 향수도 만들어 쓰고 있다. 그리고 이왕 배우는 거, 시간 날 때 완전 전문가 자격까지 취득할 계획이다.
향수가 아니더라도 나는 나 혼자 일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오롯이 내가 콘텐츠가 되고 만들고 해서 나만이 할수 있는 그런 일. 회사원은 그런 직업이 아니었다. 특히나 나같은 사무직은 그렇다. 나사못 취급은 어찌보면 필연적이었다. 회사원의 아이덴티티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전제로 나사못 취급을 뛰어넘을 정도의 "대체불가한" 그 무엇을 갖추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했고 야근도 했다.(아, 그게 내 입장에서 최선이었지만 회사입장에서는 부족했을 수 있다. 어쨌든!) 그 대체불가함을 위해 추가로 학습을 하거나 학위를 준비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법률, 회계, 금융, 외국어. 이게 사무직 회사원인 내가 전문성을 갖출 수 있는 몇 안될 분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원도 지원하고 강좌도 듣고 혼자 학습도 하면서 그것들을 갖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데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는 그렇게 계산적이고 법적으로 하나하나 나의 신경과 뇌를 가동시켜 따지고 드는 일들이 몹시 피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이다. 공황발작은 정말 죽겠구나 라는 물리적 정신적 상태까지 갔다 오는 것이다. 공황장애를 만나면서 나는 죽음은 내 짐작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저런 것들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자. 내가 고통받던 것들과 비슷한 사연들을 클라이언트들에게 받아들고 해결하기까지의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의 반복을 겪고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10년 넘게 가졌던 그 학습에의 욕구는 그렇게 간단하게 꺾어버렸다.
세상사가 한치 앞을 모르듯이 나도 내 자신을 모르겠다. 언젠가는 생각이 또 바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때 도전하면 되지. 하고싶어지거나 흥미가 생기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보자. 늦었다면 늦은 것이고 빠르다면 빠른 것일 것이다. 나중에 뒤돌아볼 때에서야 알게 되겠지. 그러다 보면 아직은 찾지 못했어도 이길이구나, 하는 나만의 길을 발견하게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