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너는 저 멀리, 나는 아직 여기.

by 잠실섹시

'우리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담담했고 냉소적이었다. 모질지만 예의 없지 않았다.
나지막이 전한 말에는 그것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안절부절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나에 비해 너는 차곡차곡 정리한 네 마음을 조심스레 풀어냈다.

'오빠가 변했다는 말은 믿어. 그렇지만 와 닿지는 않아. 그리고 달라졌다고 해도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그대로 존재하잖아.
나도 많이 힘들었어. 죽을 만큼. 그렇지만 이제는 괜찮아. 물론 나도 문득 오빠 생각이 나고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워.
그렇지만 이제 다시 누가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 준다는 사실을 알아. 그 사람이랑 있으면 더 이상 오빠 생각이 나지 않아.'

차분히 건넨 네 마음은 소리도 무게도 없이 새벽녘의 눈처럼 단어 하나하나 귀를 통해 내 마음에 차갑게 쌓여갔다.

얼마간의 정막이 흘렀다.
빈틈없이 정리된 네 말에서 우리가 헤어진 시간이 실감 났다. 너는 하루하루 아픔을 감내하며 스스로 마음을 정리해갔고,
나는 시간이 약이라는 주변의 위로만 찾아다녔다. 사는 것에 집중하니 슬프지만 네 생각이 나지 않았었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한 너, 그리고 막연히 시간만 흐르길 기다렸던 나. 대조적이었던 정리 방식.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렇게 다른 길에 서있다.

너는 저 멀리 나는 여기 그대로.

늦은 밤 술에 취해 간헐적으로 나를 찾는 너를 보며 나는 안심했다. 너는 정리 중인 것이었는데 나는 아직은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차분히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던 소중한 통화 시간이었는데 나는 두서없이 궤변을 늘어놓았고 그 와중에 자존심을 세웠다. 네가 아직도 날 그만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병들어 있었어, 용서해줘. 지금의 나는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모든 게 끝이 났다. 단단한 고목나무 같았는데 똑 부러졌다.
차라리 한껏 서로 밀고 당기다가 끊어졌었더라면.
차라리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일에서 고통을 받다가 헤어졌었더라면.

'네가 날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아무리 할 말이 없었어도 그렇게 멋없고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할바엔 가만히나 있을걸.

그리고 너는 또 연락이 없었다. 슬슬 짜증이 났다. 진전 없이 술 취해 서로의 목소리만 찾는 시간이 지루했다.
진심을 전한 적도 없으면서, 마냥 붙잡기만 했으면서 노력했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해 붙잡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널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통화에서 확신했다. 나는 너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늦었지만 풀어내고 싶었다. 내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내 마음을, 그리고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는지를.


맞다. 널 붙잡을 수단이다. 그렇지만 돌아오지 않아도 이 여정의 끝에 내 모습도 그만큼 궁금해졌다.

네가 가졌던 정리의 시간을 나도 내 방식대로 가져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