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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돈 Jan 14. 2019

헨드릭스 진

그리고 오이

헨드릭스에는 오이를.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주인공 그레이가 진토닉을 주문하면서 하는 대사다.


오이 가니쉬는 칵테일에 막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던 나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레몬, 라임, 사과, 파인애플, 체리, 올리브 말고는 다른 채소/과일류는 가니쉬로 들어갈 일이 없다고 자연스레 생각했었다.

물론 블러디 메리에 샐러리가 들어가지만 그건 블러디 메리니까...


처음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했을 때, 텅 빈 냉장고가 안타까웠던 나는 저렴한 가격에 큰 부피를 자랑하는 오이를 1000원에 4개씩 구입하였고, 냉장고 한 층을 모두 오이로 채웠다.


매우 훌륭한 야식이었고, 초기에 찍어먹던 쌈장도 오이 맛에 익숙해지니 필요 없어졌다. 자취방에서 노트북으로 영화를 상영할 땐 항상 책상 위에 오이가 2~3개씩 올려져 있었다.


다만 그때의 나는 자취방에서 절대 혼술을 하지 않았다. 신림동 고시촌, 발 뻗으면 방이 꽉 차 버리는 공간에서 혼자 맥주캔을 따고 있는 나를 3인칭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너무 초라해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오이와 술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근데 진토닉에 오이 가니쉬라니. 그게 내가 헨드릭스 진에 관심을 갖게 된 첫 번째 계기였다.


두 번째 계기는 당연히 너무 이쁜 병의 디자인. 술에도 외모지상주의가 있다고 믿는 나는 처음 헨드릭스 진 술병의 디자인을 봤을 때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3월 두바이로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면세점에서 헨드릭스 진 & 티 컵 패키지가 꽤나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앞뒤 안 보고 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헨드릭스 진 & 티컵 패키지 구성품. 이쁘다..!


헨드릭스 진은 오이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집착을 보인다.


얘네는 1년에 한 번씩 영국에서 World Cucumber Day를 개최한다. 공식 사이트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We wish to spread love, understanding and appreciation for cucumbers everywhere.


대체 정체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가보고 싶은 축제의 느낌이다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가보고 싶다. World Cucumber Day.


진성 오이 덕후...


헨드릭스 진 & 티컵 패키지를 봐도 얘네가 얼마나 오이에 미쳐있는지 알 수 있다.


지금은 이사하느라 버렸지만 포장박스의 디자인도 온통 오이에 대한 찬양 밖에 없었고, 찻잔에서는 대놓고 오이를 홍보한다. 근본 없이.


오이는 우주를 보는 망원경이지만 이유는 알려주지 않는다.


진 하면 진토닉이고, 소설 속 그레이도 오이를 넣은 헨드릭스 진토닉을 주문했지만,


나는 진토닉보다는 스트레이트로 마시는걸 더 좋아한다.


일단 술에 달달한 음료가 섞여 들어가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굳이 칵테일을 만들어야 한다면 토닉워터 대신 탄산수를 넣은 진 리키를 만들어 마신다.


다만 헨드릭스 진의 경우에는 얘네들의 오이 사랑에 주입당해 안주로 오이를 생으로 잘라먹을 뿐이다.


헨드릭스 진을 맛있게 마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맛 팁은 적당한 가격대의 진을 한 잔 먼저 마신 후, 헨드릭스 진을 마시는 것이다.


나의 경우엔 만만한 고든스 진을 한 잔, 그리고 다시 헨드릭스 진 한 잔을 마신다.


고든스 진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고든스 진도 훌륭한 진이고, 그 저렴한 가격에 그 정도 퀄리티를 자랑하는 진은 찾기 힘들 것이다. 다만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를 뿐이다.


고든스 진이 뚜렷하고 깊은 솔향을 자랑한다면 헨드릭스 진은 넓고 은은하게 퍼지는 오이 & 장미향을 품고 있다.


그래서 헨드릭스 진의 풍부한 향은 고든스 진을 마시고 난 뒤에 더 극대화될 수 있다.


고든스 진과 헨드릭스 진. 둘 다 술병이 이쁘다.


고든스 진이 입 안에 들어오면 첫 느낌은 너무나 강렬하다. 독주의 쓴 맛이 혀를 강타한다. 그리곤 솔 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저급하게 표현하자면 솔의 눈에 주정을 탄 맛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느낌이 나쁘지 않다. 느끼하거나 찝찝한 느낌을 모두 씻어버리는 독주의 강렬함에 더해진 청량한 솔향. 세상에 이보다 더 깔끔한 술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다. 그때 나의 혀와 입 안은 영점으로 회귀한다. 막 세상에 나왔을 때와 같다. 어떤 맛이 미뢰를 자극하든 온전히 모두 느껴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차오른다. 바로 그 순간 헨드릭스 진이 이어서 들어온다. 독주의 강렬함이 없지 않지만 다르다. 알코올의 쓴 맛이 느껴질 때 이미 오이/장미향이 입 안에 퍼져 들기 시작한다. 머릿속에 혼란이 온다. 두 개의 술을 같이 진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것인가. 헨드릭스 진의 풍부한 향미는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입 안에서 옅어진다. 한 잔만 더 마시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그러나 두 번째 잔은 방금 마신 잔으로 인해 그 맛이 왜곡될 것을 알기에 가까스로 참을 수 있다.


사실 헨드릭스 진은 내가 너무나 애정을 갖고 있는 술이기에 쉽게 꺼내 마시지 않는다.


구입한 지 9개월가량 지났지만 아직 반의 반의 반도 안 마셨다.


올해 맞이한 내 생일 즈음에 이 술을 개봉하면서 이건 오늘 하루가 사랑스러울 때 또는 너무나 미울 때만 한 잔씩 하기로 결심하였다.


25살 이후로 내겐 항상 그런 술이 있었다.


나를 같이 축하해주거나 위로해주는 술.


아무리 술이 고플 때여도 그 술만큼은 집구석에 숨겨놓고 마시지 않았다. 개봉할 때를 기다리면서.


대학원 시절의 잭다니엘이 그랬고, 작년의 태국 럼 샘송이 그랬으며, 올해는 헨드릭스 진이 그렇다.


한 가지 규칙이 있는데 마지막 잔은 꼭 기쁨으로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뭐 어쩌다 보니 스스로 그런 규칙을 만들게 되었다.


지금은 헨드릭스 진의 알코올 증발을 막기 위해 파라 필름으로 술병 입구를 밀봉한 뒤 다시 보관해두었다.


기쁨으로 또는 미움으로 한 잔 씩 마시게 될 헨드릭스 진이 다 비워질 즈음에는 기쁨의 잔 지분이 더 많았으면 한다.


그리고 얼른 한바탕 웃음으로 마지막 잔을 비워낼 날이 오기를 바란다.


201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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