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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자의 휴식 Jun 09. 2020

일드기록3_#저, 정시에 퇴근합니다

수습기자 시절 (무려 생일날) 밤에 쓰러졌었다. 경찰서 마와리를 돌다가 열이 나기 시작했고 참던 와중에 30분만에 뒤로 쿵 하고 넘어졌다. 다행히 롱패딩이 충격을 완화시켜줘 머리는 다치지 않았고 제정신을 차렸다. 울면서 병원으로 가는 택시를 잡았던 기억. 무지 추웠던 밤에 나는 왜 울었을까?쓰러진 내 몸 상태가 걱정돼서도 앞에 있던 경찰들에게 창피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선배에게 내가 '이 정도에' 쓰러졌다는 사실을 보고하는게 두려웠던거다.


인생에서 그렇게 '리터럴리' 쓰러져보거나 주마등이 스쳐가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가치관이 굉장히 크게 바뀐다는 것을.  내 경우는 '이제 건강을 챙겨야겠다' 수준이 아니었다. 마음의 한구석을 아예 통째로 버려버렸다. 더 열심히, 더 미친듯이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한웅큼 뽑아 길바닥에 던졌다. 나의 희생를 감수하면서까지 최선을 다해야하는 일은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한때 내 핸드폰 배경화면. 보기만해도 행복해지는 사진이자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다.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의 히가시야마 유이도 1화에서 놀랍게도 나랑 똑같이 쓰러진다. (제목에 끌려 봤는데 상황이 똑같아서 정말 놀람. 나랑 업계는 다르다.) 무지 바쁜 광고회사에서 더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계단에서 균형을 잃고 크게 넘어진다. 나보다 훨씬 크게 다쳤으므로 유이가 받은 충격은 당연히 더 컸다. 이후, 퇴사하고 워라밸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홍보대행사로 이직. 유이의 신조는 6시 땡치면 바로 퇴근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드라마는 유이의 이런 습관을 이방인처럼 묘사한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에서 대체 '칼퇴'란 불가능에 가깝고 (물론 케바케 회사바이회사다) 홍보대행사에선 더더욱 그렇기 때문. 유이는 그런 시선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정시 퇴근을 포기하지 않는다. 회사 근처 상하이 반점에가서 샤오롱바오와 맥주를 마시면서 오히려 그런 시선을 훌훌 털어내곤 한다.


에피소드들도 비교적 단순한편. 유이의 그런 습관이 왜 만들어졌는지 이게 어떤 파란을 일으키는지가 주 골자고, 전남친(무려 상사다)과 현남친(무려 경쟁업체 담당자)과의 밀당게임+회사 구성원들 1명 씩의 고민해결로 구성되어있다. 10부작짜리 일드의 룰을 그대로 따라가고있다. 다소 답답한 등장인물들 캐릭터가 나오지만 다행히 애초에 유이가 워라밸을 중시하는 마인드의 회사로 이직했기때문에 최악의 '고구마' 레벨까지는 없다. 아무래도 그런 사내 정신이 있다보니 회사 사람들도 정시 퇴근에 대해 비난하기보단 갸우뚱 하는 수준으로 나온다.


전남친 고타로는 유이와 상반되는 인물. (일단 본체인 무카이 오사무가 너무 잘생겼기 때문에 이 드라마를 추천...) 한마디로 일중독자다. 죽을 듯이 열심히 일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일거라는 망언을 일삼는 종족이다. 유이와 헤어진 이유는 고타로가 무리하게 일하다 어느날 자취방에서 쓰러졌기 때문. 체력이 약해서 헤어진거냐고? 유이가 고타로가 죽은 줄 알고 울면서 깨우자 일어나서 다시 일하러 갔기 때문이다. 일이 삶보다 중요한 사람 곁에선 살수 없다고 판단한거다. 극중 고타로는 극단적인 사례지만 우리 주위엔 이런 워커홀릭들이 꽤나 많다. 고타로가 회사에서 알아주는 팀장이듯, 워커홀릭들은 우리네 직장에서 신임받을 확률이 매우 높다. 나도 입사 사령장을 받은 이래 쓰러지던 밤 전날까지는 고타로의 삶을 동경했다. 극한의 상황까지 나를 몰아세우는 데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편이었다. 밤을 꼬박 새고 무언갈 끝냈을때 새벽 귀가길이 즐겁기까지 했었다. 일이 주는 쾌감+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게 인생의 목표였던 셈. 무리한 밤샘으로 오는 피로, 잠시 접어둔 취미, 소소한 일상 속 행복들에 대해선 흐린 눈을 하며 언젠가 일로 성공하고나면 으레 따라올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일할 땐 하는 유이. 참고로 이 드라마는 영화 [서치]에 버금가는 본격 맥북 영업 드라마다.


 유이는 드라마를 통해 그렇지 않다고 지금의 바뀐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줬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당연히 월급...도 있겠지만 결국 그 월급을 맘편히 쓰고 맛있는걸 먹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태기 위해서다. 즉, 내 삶을 위해 일을 하는 것. 회사가 곧 나일수 없고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적당히 일하며 적당히 내 삶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유이는 드라마 내내 '퇴사하고 싶다', '내일 출근하기 싫다' 따위의 (내가 정말 자주하는) 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일 매일 계획표를 짜서 책상에 붙여두고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체크리스크를 해내는 타입으로 나온다. 잔뜩 일을 미루면서 칼퇴만 해버리는 타입이 아니라 일할때 일하고 퇴근할땐 퇴근한다는 주의. 때문에 회사 사무실에서의 유이는 반짝반짝 빛나고 멋있다. 퇴근 후에 맥주를 마셔주는 모습도 멋있다. 어떤 업계든 일로 인한 스트레스로 잔뜩 찌든 사람이라면 유이의 하루를 꼼꼼히 지켜보길 바란다. 나 역시도 부족하리만큼 일에 쫓긴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퇴근 후 맥주 하나는 기분 좋게 마시기 위해 마음가짐을 바꾸고 있다. 몇년 전 쓰러지긴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달라져서, 아마 이제는 과거의 열정으로는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 대신, 현재의 여유와 미래의 행복을 향해 조금이나마 걸어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보고 나면, 아마 높은 확률로 맛있는 샤오롱바오 집을 찾아보게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하되, 나를 잃어버리지는 말도록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 거다. 오늘 저녁부터 한 번 무사히 외쳐보자.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 わたし、定時で帰ります。(2019, 일본TBS)

※본 감상은 N회차 관람시 변경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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