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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Jan 05. 2024

중국어를 못해도 중국에서 영업 1위 달성!

나는 영업의 신이었나?

한국에서 통역을 지원했던 한 싱가포르 업체 고객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말레이시아 지사에서 근무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나는 OK를 해버렸다. 대구라는 곳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본 적 없는 내가, 말레이시아에 근무하러 간다면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밥상을 엎을 거 같았다. 일단 나는 작은 부품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명절 휴일 동안 해외여행을 한다고 하고 근무하게 될 회사와 숙소, 환경을 확인하러 말레이시아로 갔다. 한국으로 돌아와 바로 해외 취업을 결심하고 퇴사 준비를 했다. 


부모님의 설득은 조금씩 충격을 줄이는 방법을 활용했다. 

가장 먼저 “해외 싱가포르 기업에서 연락이 왔는데 나보고 일해보지 않겠냐고 하네!” 로 시작해서 

며칠에 한 번씩 밥 먹을 때마다 조금씩 강도를 더 해갔다. 

“그 회사가 싱가포르에도, 태국에도 중국에도 지사가 있는 괜찮은 회사라네” “ 내가 가봤더니 생각보다 좋더라”, “지금 있는 회사를 다음 달까지만 하고 관둬야 한다” “그 회사에서 비행기 표를 끊으라고 돈을 붙여 주었다.” 등 한 걸음씩 진보하는 방식으로 아버지의 충격 근육을 조금씩 키웠다. 


부모님이 끝까지 반대하면 나는 짐을 싸서 야반도주를 할 계획이었고, 그렇게 갑자기 사라져도 부모님은 결국 일하러 갔구나 알고 있을 거니까, 마지막까지 설득이 안되면 나는 짐을 싸서 밤에 몰래 집을 나갈 생각이었다. 결국 한 달 반 만에 아버지는 해외 취업을 허락했다.  

2년 계약으로 말레이시아에 근무하게 되면 친구들을 만나기 힘들 거라는 생각에 해외로 나가기 전 한 달 동안 모든 친구들을 만나 송별회를 가졌다. 

그리고 시작된 말레이시아에서의 직장생활, 1년 정도 근무 후 갑자기 동남아 경기가 나빠졌다. 경기는 내가 근무하던 설비 업체에 큰 타격이었다. 경기가 나빠지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1년 만에 나는 해고의 위기에 놓인다. 한국으로 가면 친구들 보기 민망하니 1년간 잠수를 탈까, 해고 전 당당히 퇴사를 할까 고민했다. 어렵게 부모님도 설득하고, 환송해를 한 달이나 해놓고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건 너무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결국 내가 내린 결정은 직무 변경이었다. 내가 하던 업무, 사업개발 (business developer)에서 중국 지역 영업(Sales)으로 지원했다. 

중국어 한마디 못하는 내가 중국 지사에 설비 영업으로 지원하니 사장님은 ‘내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이셨다. 내가 중국 지사 근무를 지원했던 이유는 당시 중국 지사는 경기와 무관하게 아주 급성장 중이었기 때문에다. 당시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으로 생산 기지를 옮기고 있었다. 화교계 기업이 많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기업은 다른 글로벌 기업들보다 더 발 빠르게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회사 중국 지사도 자동화 설비 영업과 판매로 빠르게 성장했다.   


결국 싱가포르 사장님은 본인이 데려온 직원이 유휴인력이 된 것이 안타까웠는지 중국지사 3개월 파견으로 일단 보내주었다. 그렇게 3개월 출장으로 가게 된 중국에서 나는 2년 반을 더 근무하고 퇴사하였다. 

퇴사 당시 난 중국 지사 매출액의 반을 담당하는 영업 1위 직원이었다. 당시 중국 지사에 근무하는 영업 사원은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싱가포르 인 그리고 나, 한국인이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 화교계로 중국어가 가능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완전 외국인이며 중국어를 못하는 나로서 수많은 제약 속에 생활해야 했다. 직급이 높지 않은 나에게 통역을 해주는 이도 없었다. 그곳에 영어가 가능한 말레이시아인과 싱가포르 주재원은 모두 높은 직급으로 내가 통역을 요구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어 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한국에서 친구가 보내 준 중국어 책 한 권은 고작, 인사말, 나의 소개 정도였지 내가 일을 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가 찾은 방법은 회사에 있는 설비, 부품 매뉴얼이었다. 영문 번역이 되어 있는 매뉴얼이나 설명서를 찾아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일상에서는 동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외워 슈퍼에 가거나 식당에서 그나마 밥이라도 먹었다. 성조도 몰랐고, 그냥 그들이 말하는 데로 따라 했을 뿐이었다. 


중국 지사에서 나는 타이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성질 급하고 까칠한 한국인! 지금 생각하면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독불장군이었다. 내가 영업에 실적을 내기 시작하자 싱가포르 사장님은 중국 현지 엔지니어 중 가장 성격 좋고, 참을성이 많으며, 나의 어설픈 중국어를 눈치 빠르게 이해하고 기술 역량이 뛰어난 과장급 엔지니어를 붙여 주었다. 그렇게 중국에서 나는 영업 매출 1위의 영업직원이 되었고 그렇게 손뼉 칠 때 그 회사를 떠났다. 


현지어도 안 되는 내가 어떻게 매출 1위 영업사원이 되었을까?  

2000년도 초 한국 기업을 포함해 많은 대기업들이 중국으로 제조업을 이전하고 있었다. 당시 주요 설비는 한국이나 자국에서 가져오더라도 부대설비나 자동화 설비의 현지화의 욕구를 가진 고객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나는 누구도 가지지 않은 장점을 가졌었다.  그건 내가 싱가포르 회사 소속으로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회사에서 중국말을 못 하면서 중국에 근무하는 한국인 20대 청년이라는 점이었다. 누가 봐도 " 이 인간 뭐야? "라는 의문이 드는 존재다.


어떤 고객이든 어렵게 고객과 연락이 닿고 나면 중국말이 어설픈 난 영어나 한국어로 대화를 해야 했다. "넌 누구냐?"는 질문에 나를 소개하면 고객들은 시간을 내어 주었고, 회사 소개를 하러 가면 현지인들은 중국어를 못하는 나를 본사에서 온 직원으로 착각해서 친절히 대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중국 엔지니어와 함께 중국 내 한국, 일본, 유럽업체의 영업을 다녔다. 나의 실력보다는 중국의 경기와 너도 나도 현지 설비 투자를 하던 잠재 고객이 많았다는 환경적 요소가 나의 큰 실적의 밑거름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회와 그곳에 있었던 나! 그런 상황이 중국어를 못해도 나를 최고의 영업 매출 직원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내가 가진 커다란 장애물은 엄청나게 많았다.  중국어, 엔지니어링에 대한 배경 지식, 친구 하나 없는 오지에서 유일한 외국인으로서의 생활! 과연 이러한 장애들은 나에게 진정 걸림돌이었을까? 


내가 가진 이 각각의 한계들을 마주하는 순간 나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그냥 그만두고 한국으로 가던가 아무거나 해보자!  좋은 대안이 없는 상황은 고민 없이 어떤 선택이든 하게 하는 절박함을 주는 가장 큰 에너지였다. 


거나하게 얻어먹은 환송회도, 부모님의 반대에도 큰소리치며 날아온 해외 취업도, 모두 내가 결정한 선택이었다. 부끄럽게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내가 마주한 절박함은 나에게 해보지 않는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가끔은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선택권은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한 것이 아닌 내가 선택하지 않을 수만 가지 핑계를 만들게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도전이라는 행동을 이끌 기회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https://blog.naver.com/janekim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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