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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Feb 16. 2019

2. 내가 더 잘할 거 같은데

- 스킬의 차이


작년 가을 어느 날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옆에 앉은 어떤 분이 노트북으로 계속 복사 + 붙이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동작이 시선을 끌어서 슬쩍 본 적이 있다. 화학 관련 논문 자료들을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모아 짜깁기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용을 번역기에 돌린 내용을 파일에 붙이기를 하고 있어서 꽤 놀란 적이 있다. 물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분은 기계로 번역한 내용을 읽으면서 말이 안 되는 부분을 수정하고 있었다.   

 

그때가 AI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면서 없어질 직업 중의 하나로 통역/번역가가 상위에 뽑혔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마음 한 구석이 묘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그래, 저런 기술 번역 정도는 꼬여있지 않은 단순한 문장이니까 인공지능이 해결할 수 있겠지. 하지만, 문학 작품은? 아직은 그 수준까지 올라오지는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분야에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판단조차도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모든 직업이 다 그렇다. 그러니, 인공지능이 모든 걸 다 통역하고 번역하는 날이 오기 전까지 하던 일을 해나갈 뿐이다.


영어만 잘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쪽 일을 하다 보면 통역이 별 거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특히,  영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한국어-영어 쪽에 그런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통역과 대화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화자 (speaker)'가 누구냐이다. 통역가나 번역가를 interpreter, translator로 부르는 이유는 '화자'의 말을 중간에 옮겨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번역가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아닌, '화자의 생각'을 다른 언어로 전달해주는 사람이다. 이와는 반대로 '대화'는 '화자'가 자신의 말을 중간 수단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을 훨씬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양쪽 언어를 다 잘하는 사람(bilingual)도 있는데, 그들은 통역보다 요약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루 종일 남의 말을 옮길 수 있는 기술이 충분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번역은 자료가 영원히 남으니 언제든지 컴플레인이 생길 수 있어 더 어려운 분야이다. 이 부분은 따로 얘기할 예정이니, 이번 편에서는 통역에 대해 더 집중하려고 한다.


나도 할 수 있겠는데

 

가벼운 예로, 회사를 다니는 친구가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상사가 외국인 클라이언트의 통역을 하라고 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통역을 하고 있는데, 상사가 저 사람이 한 말의 반의 반도 안 한다며 놀리는 바람에 집에 가는 길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얼마나 욕을 하던지.

 

또 다른 예도 있다. 동기가 삼 일짜리 회의에 참여했는데, 회사 담당자가 '내가 이 분야를 더 잘 알고, 영어도 잘하니까 내가 해도 될 거 같다"라는 말을 들어서 기분이 별로 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전문 분야가 아닌 이상 통역가는 아무리 많이 공부한다 해도 시간 제약이 있으니 담당자보다는 지식의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어 자체는? 글쎄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해에 같은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3일짜리 회의에 첫날만 통역가를 고용했다. 문제는 이틀째 회의를 그분이 혼자 통역하다가 삼일째 다시 통역가를 불러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겠지만, 통역과 영어를 잘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거다.

 

학부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조카가 교수님의 부탁으로 한국에 방문한 일본인 학술단체를 수행 통역하게 됐다면서 엄청 떨린다고 한 적이 있다. 걱정되는 마음에 작은 노트와 필기도구 하나를 준비해 적으면서 하라고 당부했었다. 하루 종일 통역을 한 조카는 속마음을 털어놨다. 전에는 한-일 통역가들이 하는 통역을 보며 저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혹은 저건 아닌데 하고 생각했었단다. 그런데 막상 해 보니, 맥락을 파악하기는커녕 뜻도 잘 모르겠어서 닥치는 대로 했는데도, '화자'가 한 말을 반도 전달하지 못했단다. 또, 필기를 하려면 '화자'가 한 말이 귀로 쑥 통과되어 나가니 적을 수도 없었단다. 그러면서,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았다는 말에 많이 웃었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다. 한 정부기관에 취직한 통역가들은 공무원으로부터 그렇게 좋은 머리로 왜 통역가를 하냐는 말을 들었다며 어이없어했다. 그만큼 어떤 이들에게는 통역/번역가라는 직업이 자기 일이 없는 단순직으로 보이나 보다. 물론, 하나의 직업으로 존중해주는 분도 있고, 그걸 넘어 환상이 있는 사람도 많다.  


수면 아래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백조


다른 직업처럼 이 일도 꽤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하나의 행사를 위해 관련 주제에 관해 꽤 많이 공부한다. 여유가 되면 2-3주 이상 공부하거나 안 되면 단 며칠이라도 그 주제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본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보는 것은 당일 회의장 부스에서 혹은 회의실에서 얌전하게 앉아있는 모습이다. 프로라는 건 그런 것이다. 이제껏 준비한 걸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일한다.  

 

통역가는 드러나면 안 되는 사람이다. '잘하면 본전'이라는 말이 있다. 이 분야도 그렇다. 잘하는 티는 안 나는데, 못 하면 모든 실패는 통역 탓이다. 그러니, 드러나지 않게 최선을 다해도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 게 이 일이다. '골목식당'의 백종원 씨의 말처럼 어디 가나 칭찬을 해 주는 사람보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그렇다고 해서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수고했다는 말 하나로 위로가 되는 일이 또 이 일이다.  

 

얼마 전 통역할 일이 있었는데, 상대방도 통역가를 데리고 왔다. 통역가가 두 명인 자리에서는 통역하기가 더 조심스럽다. 어쩔 수 없이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프리랜서로 온 나와 비교하여, 상대방은 그곳에 소속된 상근 (in-house) 통역가였다. 우리끼리 보면 대충 연차가 보인다. 나보다 후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긴장된 모습은 보였지만, 상사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빼지 않고 전달하려는 모습에 꽤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통역할 때도 맞은 편에 앉아있던 분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해 주셨다. 일이 끝나고 난 후, 그 분들에게 인사한 후, 통역사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니, 같이 수고했다며 고개를 숙인다.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다.


무슨 일이든 스킬이 필요하다


앞서 실제로 통역을 해보고 다시 통역가를 부른 이유는 바로 이 스킬이 없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과 타인의 생각을 말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저 사람이 왜 저렇게 말한 건지, 이 말은 앞서 저 사람이 한 말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건지 계속 생각하고 적어가며 동시에 통역을 해야 하는, 즉, 계속 투 트랙으로 머리를 회전시켜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전문지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렇게 실전을 하기 전, 대다수의 통/번역가들은 통역/번역 대학원에서 2년간 대부분은 비난으로 가득한 시간을 보내면서 화자가 하려는 말의 의도를 파악하고, 양쪽의 언어로 모두 통역/번역하는 스킬을 배운다. 물론, 하루 6시간 이상 한국어-영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끈기도 배운다. 취업한 신입사원이 회사의 시스템 안에서 선배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니, 영어를 단순히 잘하는 사람과 통역/번역의 스킬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하는 통역/번역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세상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무리 스킬이 있어도 기본적인 지식이나 용어에 대해 궁금증이 있으면 통역가는 담당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분야에 있는 사람으로서 존중하니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 날의 통역이 더 잘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스킬이 필요하니까. 그러니, 서로의 스킬을 존중해주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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