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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Mar 02. 2021

이제껏 몰랐던 소리가 들린다

나이 드나 봄

젊을 때는 자신이 꽃이라 자연의 꽃에 관심이 없다가 나이가 들어야 비로소 자연에 피어있는 꽃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다. 잠깐 생각해봐도 맞는 말이다. 어릴 때에는 내가 인생의 주인공인데 나 말고 신경 쓸 것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사람도 아니고 꽃에? 안될 말이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심지어는 꽃이 피어있는 곳을 지나갈 때에는 코와 입을 막거나 숨을 쉬지 않고 빠르게 지나갔다.


그런데 서른 후반쯤 되니 어느 날 갑자기 산책하다 길가에 피어있는 꽃이 눈에 들어오며 발걸음을 멈춘다. 이게 무슨 꽃인가 궁금하기까지 하다. 물론, 알레르기 때문에 냄새를 맡지는 않지만 예전에 비교해서는 가까이 꽃에 다가서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세상이 좋아져 스마트 렌즈에 꽃을 찍으면 무슨 꽃인지 알려주기도 한다. 한때는 길가에 피어있는 꽃들의 이름을 외우려고 했지만, 나 말고 세상에 신경 쓸게 많다 보니 자꾸 잊어버려 이제는 꽃 이름은 알려하지 않는다. 다만, 아, 이렇게 예쁜 꽃이 내가 신경 쓰지 않는 동안에도 피고 지고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주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래서 우리 엄마는 그리도 꽃을 좋아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며칠 전, 저녁에 산책을 하다 항상 지나가던 주택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상한 소리가 났다. 찌르르르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다. 비가 오지도 않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계속 소리가 났다. 다시 귀를 기울이니 팝콘이 튀겨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날따라 차도 다니지 않아 그 소리는 크지는 않지만 아주 뚜렷하게 내 귓가를 때려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로 동영상을 찍었다. 


밤이라 형체는 알 수 없는 그림이지만 소리는 뚜렷이 들린다. 화단에 낮은 높이로 자라는 향나무가 앞에 있고 그 뒤로 문제의 소리가 나는 바짝 마른 이름을 알지 못하는 비슷한 높이의 관목이다. 한참을 서서 지켜보다가 다시 산책을 갔다. 한 시간 반 동안 걷는 내내 어디에서 나오는 소리일까 싶어 궁금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나서야 정리가 되었다. 푸른 싹이 말라빠진 겉껍질 안에서 자라서 밀려 나오느라 나는 소리인 것이다. 달리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그거 말고는 또 가능성이 없다. 봄이 오고 있는 2월 말쯤, 날이 너무 따뜻해 낮에는 긴팔만 입어도 되는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으니까. 


그 쪼그만 싹이 나오려고 애쓰는 모습이 상상이 되어 웃음이 나버렸다. 이제 꽃만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나이가 된 걸까?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보통 쌀을 불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가? 쌀을 여러 번 헹궈서 물에 담글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미련 없이 주방을 벗어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날 내가 다르게 한 행동이 있었다. 중간에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간 것이다.  그때 또 찌르르르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싶었다. 처음에는 가스가 새는 건가 하고 겁을 먹었다. 하지만 원인을 발견한 순간 나는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확인을 위해 쌀을 담가놓은 용기에 얼굴을 바짝 댔다. 그래! 여기서 나는 소리야! 귀를 쫑긋거리니 소리는 더 잘 들렸다.  


섞인 보리쌀과 현미찹쌀이 최선을 다해 물을 빨아들이느라 내는 소리였다! 더 맛있게 하기 위해 물에 담가놓는다는 이유 말고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소리가 들린다. 맛있어지려고 물을 머금는 노력이라니. 이과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문과적 감성이 터지고 말았다. 줄기에서 잘리자마자 이미 생명이라는 작용을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도정을 지나 계속 말라있던 그 쪼그만 조각들이 물과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빨아들이는 힘은 감탄을 자아낸다. 처음 발견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게 된다. 


 


조금 더 사물에 신경을 써보는 여유가 생기는 나이가 되었다는 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만큼 온전한 나 자신으로는 자신이 없어 자꾸 장신구나 색으로 치장을 해야 한다는 의미니까. 반면에 여전히 생명활동을 하고 있는 자연은 태어나고 자라고 영글다가 죽는 삶을 되풀이하고 있다. 어차피 다시 태어나니까 미련이 없다. 하지만 인간인 나는 지금의 현재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없으니 미련 덩어리일 수밖에. 


도시 안에서 산책을 하는 걸로 걷기 운동을 하는 나는, 더 이상 직진만 하지는 않게 되었다. 잠깐잠깐 눈에 띄는 꽃들을 자세히 보기 위해 멈추기도 하고, 전에 봤던 적이 있는 꽃은 금방 잊어버리겠지만 인터넷으로 찾아본다. 그런 여유가 생긴 지금의 내가, 나는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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