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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소의뿔 Oct 06. 2022

겸손으로의 초대를 수락합니다.

'ㄱ'자 모양을 꼿꼿하게 유지하고 있어야 할 엄지 손가락이 심하게 떨렸다. 모바일을 잡고 문자를 찍으려는데 핸드폰 위의 엄지는 힘없이 구부러졌다. 아무리 문자를 찍으려 해도 손가락이 구부러지고 힘없이 미끄러졌다. 믿기지 않았다. 내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였고,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손가락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신경이 손상된 것일까? 뇌가 이상해진 것일까? 안 멈추고 계속 떨리면 어떻게 하지? 설마 이 증상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겠지?' 뇌가 내리는 평범하고 쉬운 명령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손가락을 보며 순간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였다. 아주 잠시였지만, '끝'이라는 극단적인 단어까지 연상되었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까지. 가도, 너무 멀리까지 갔다.  


멀리 간 생각의 반대편에서 '일상이 기적이다'는 말이 기억나며 마음에 와 부딪혔다. 그러고는 나는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장악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간 내가 마치 절대자인 마냥 살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에 닿는 순간 고고하게 쳐들었던 머리가 숙여지고 높았떤 마음이 꺾이는 듯했다. 그리고 지금 내게 가장 절실한 것은 '겸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겸손은 낮아짐이다. 겸손은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겸손은 불완전성을 아는 것이다. 나를 높이지 않는다. 낮추는 것이나 비굴함이나 굴욕을 느끼지 않는다. 내가 겸손을 내 삶으로 들여온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원망이 사라질 것 같다. 당연히 취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누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으로 마음에 겹겹이 쌓인 원망과 분노, 화가 녹아질 것 같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했던 이들에게 더 이상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될 것 같다.   


인생의 변곡점이 될 시간을 앞둔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이 '겸손'인가 보다. 큰 어려움을 감당치 못할 아이 같은 나는, 엄지 손가락이 잠시 맛 가는 작은 사건으로, 소소하고 무탈한 일상들이 기적이며 나 스스로는 그런 기적을 만들 능력이 없음을 배운다. 그리고, 겸손으로의 초대를 기꺼이 수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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