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만 줍는 습관이 앗아간 삶의 해상도에 대하여.
지금 당신의 인생은 몇 픽셀인가요?
우리는 이제 본문을 읽지 않는다. 그저 결론을 쇼핑할 뿐이다. 결론만 줍는 습관이 앗아간 삶의 해상도는 아주 낮다. 과정을 건너뛰는 태도가 반복될수록, 우리 안에는 익명의 대중이 복제해 낸 평균적인 감정만이 남는다. 내 인생을 선명하게 만드는 '사유의 픽셀'은 5분짜리 요약본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지금 내 인생의 해상도는 선명한가?
5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은 5분짜리 영상으로 섭취한다. 기사의 본문을 마주하기도 전에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베스트 댓글부터 확인한다. 타인의 생각을 엿보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진짜 문제는 내가 본문의 내용을 소화해서 생각을 하기도 전에, 타인이 정제해 둔 정서적 결론에 내 감정을 끼워 맞춘다는 데 있다.
이것은 사유의 게으름을 넘어선 감정의 외주화다. 어떤 온도로 분노를 느껴야 할지, 어떤 지점에서 감탄해야 할지조차 타인의 합의에 기대어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읽지도 않은 글에 대해, 경험하지도 않은 과정에 대해 이미 결론을 내리는 이 기괴한 속도전 속에서 나의 관점은 증발했다.
결론을 빠르게 요약해 주는 영상은 환영받는다. 지적인 갈증을 정보의 쾌락으로 즉각 해소시켜 주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은 지식을 습득한 것이 아니라 지식을 소유했다는 기분을 소비한 것에 불과하다. 저자가 수만 번의 고뇌로 길어 올린 수백 페이지의 서사를 5분 만에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욕심은 오만이다. 단숨에 삼킨 문장은 지혜로 축적될 리 없다.
결론만 줍는 삶의 해상도는 흐릿하다. 과정이라는 빽빽한 숲 안에는 결론이 결코 담아내지 못하는 수많은 '하지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맥락의 픽셀들이 숨어 있다. 이 작은 조사와 접속사들은 단순히 문장을 잇는 도구가 아니다. 앞선 논리를 뒤집고, 예외를 탐색하고, 끝내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게 만드는 사유의 엔진이다.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만날 때 뇌는 잠깐 멈춰 서서 반대편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문장을 읽을 때 삶의 희망과 숭고함을 만날 수 있다. 본문을 읽으면서 저자가 고뇌 끝에 고른 본문의 어휘들은 고유한 색채와 채도를 지닌다. 이 지루하고 건강한 과정을 건너뛰고 결괏값만 삼키는 사람은 결코 나의 삶을 선명하게 해석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지루하게, 또 수고스럽게 했던 벽돌책 같은 과정들이야말로 삶의 가장 단단한 기준이 된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살아냈던 과정들은 큰 생명력을 지닌다. 읽는 내내 지루했던 대목들,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했던 난해한 문장들, 깊게 고민한 과정들이 시간이 흐른 뒤 인생의 고비마다 적재적소에 지혜로서 나타나 지탱해 주었다.
이제 빠른 이해라는 함정에서 걸어 나와 다시 과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지루하고도 고귀한 과정만이 사유의 근육을 만든다. 결론만 줍는 삶에는 답을 고쳐나가는 기쁨도, 정답 너머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경이로움도 없다. 맥락의 픽셀이 빠진 결론을 찾는 인생은 꽤 효율적이고 매끄러울지 몰라도, 가까이서 보면 텅 빈 흐릿함뿐이다. 뒤돌아봤을 때 남는 것은 매끈한 결괏값이 아니라, 그 결과를 향해 헤맸던 과정의 질감이다.
결론만 남은 인생의 해상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비약적인 결괏값을 환호하는 대신, 나는 과정을 환대하기로 했다. 단숨에 결론으로 비약하는 헬리콥터에서 내려, '하지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안개 낀 맥락의 숲을 직접 걷기로 했다. 그 지루하고도 정직한 보폭만이 내 인생의 해상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헤매고 고민하면서 내 인생의 본문을 써 내려갈 때, 내 인생의 해상도는 최고치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다시,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