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하고 싶은 인생

by 이각형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 삶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삶에 관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여러 가지 글을 읽고 영화를 보기도 하는 행위들이다. 행위는 행동과 다르다.

행동은 수동적이지만 행위는 능동적이다. 그러기에 행위를 하는 이는 인류의 선구자이며 우리의 방향타이며 지침이다.

그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나선 나는 삶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다.

이해하고 싶다고 말한 삶이란 미래의 것이 아니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미래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이해하고자 하는 인생은 과거의 것이다. 과거의 누적이 현재이기 때문에 현재를 알기 위해 과거를 이해하고자 하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앞으로의 인생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해까지 바란다는 것은 과한 욕심일 것이다.

다만 미래는 수용과 감내의 대상일 것이다. 과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미래를 수용하고 감내해야 할 것들의 연속일 것이라며 짐작하고 담담한 태도로 기다리고 준비하는 과정일 것이다.






여기까지 글을 읽은 분들께서 혹시나 이런 걱정을 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른다.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한 나머지 오로지 과거의 이해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냐고.

미래는 개척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우리의 손으로 바꿔나갈 수 있다고 말해주실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에 나는 충분히 동의하고 있다.

미래를 바꿀 수 없다며 자포자기하는 식으로 미래를 단지 수용과 감내의 대상으로 여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생애주기에 있어서 나의 현 위치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미래의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여기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런 인생에 관한 이해의 범위는 숙명을 포함한 운명과 우연을 포함하고 있다.
얼핏 보면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파고들어 가고 있다.

운명과 우연은 삶을 구성하는 큰 요소 중 하나이다. 삶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은 언제나 내게서 떠나지 않던 무엇이었다.

그리하여 흐라발처럼 숙명을 대변하는 사람의 글, 아인슈타인과 같이 운명론자의 사상 그리고 확률 없이는 물리적 세계를 설명할 수 없게 된 양자물리학의 세계로까지 탐구영역을 확장했었다. 그리고 해답을 찾는 도구로 책뿐만 아니라 영화와 예술로까지 시야를 넓혀 나갔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영화 중에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은 세 편 정도가 있다. 그중에서도 내게 항상 같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영화가 한 편 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당신은 그 삶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한다.

이처럼 정해진 운명을 상정하고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는 마치 운명론자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다시 말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아는 상태에서도 과연 그 운명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질문은 얼핏 보기엔 답변하기가 매우 쉽게 느껴진다. 닫힌 구조로 외부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폐쇄된 물리적 세계에서 벌어질 일들은 모두 기계적인 법칙에 따를 것이라는 가정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과연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선택 또한 이미 정해진 것이라는 말로 인간 존재의 무기력함을 드러내놓고 조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의 배후에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힘 있는 권고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던 것을 그는 몰라서 큰소리를 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





삶을 대하는 자세에 관해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미래를 알게 된다. 자신의 딸이 불의의 산악사고로 20대가 되자마자 유명을 달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전에 남편이 자신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미래에 남편이 될 남자는 함께 외계의 언어를 연구했었던 사람이란 것도 알게 된다.

헵타포드라고 이름이 붙여진 외계인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인공에게 이런 능력이 갖춰지자 외계인들은 자신들의 할 일을 다 끝낸 농부처럼 우주로 돌아가 버렸다.

우주선이 지구를 떠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곁에 서 있던 미래의 남편이 될 남자의 손을 잡는다. 그 남자가 몇 년 뒤에 자신을 떠날 것을 알고 있어도, 그리고 자신의 딸이 짧은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함께 제2의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구슬픈 바이올린의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난 이 날이 네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었어. 추억은 이상한 거야. 생각과는 다르게 기억돼. 우리는 너무 시간에 얽매여 있어. 그 순서에......"

시간에 얽매인 건전한 인간은 전후관계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해낸다.

하지만 너무 그 순서와 흐름에 매몰된 나머지 우리들은 너무도 쉽게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꿀 수 없는 과거에 갇혀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우리는 용기라는 미덕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정하고 싶은 인생 앞에서 몸을 부를

들부들 떨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입춘이 지난 지도 한참이 되었는데 여전히 바람이 매섭기만 하다.

어둠이 깔려 사위가 쥐 죽은 듯 조용한 거리 위에서 어깨를 움츠린 채 옷깃을 세우고 걸어가는 한 남자의 뒤편에서 작은 물결 같은 회오리바람이 코트를 희롱거리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떠나온 그 남자가 옮기는 발걸음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https://https://youtu.be/EDMe_nUpzMM?si=FTe3SPrDA3ypITz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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