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참 아쉬움이 큰 서적이다. 출판사의 편집인들이 조금 더 신선한 시선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만든다.
이 책에 실린 헤세의 글이 문제는 아니다. 헤세는 아주 탁월한 문장과 섬세한 신경으로 우리에게 지혜로운 이야기를 남겨주었다.
헤세의 문제가 아니다. 편집부의 평범한 안목이 헤세의 주옥같은 글을 얼마나 따분하게 만들었는지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다른 글에서도 그랬지만 이 책을 통해서도 헤세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은 자애로 가득 차 있어서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차 산악인들이 지리산에 발을 들여놓을 때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따듯한 마음에 감화되곤 한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것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만큼 헤세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지만 어딘가 에너지가 느껴졌으며 좌절하고 지쳐버린 우리로 하여금 다시 기운을 회복하게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제목부터 잘못되었다. 나는 미용실에 갈 때마다 책을 들고 가곤 하는데 미용사가 책 제목을 보더니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보통 무슨 책을 좋아하세요? 이 책은 자기계발서 아니에요?"
애서가를 자청하는 나에게 자기계발서란 마치 페니실린이 필요한 응급환자와 같은 사람들이 찾는 책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하필 헤세의 책을 출간한 편집부가 "인생론"이라는 제목을 달았으니 참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헤세가 살아 있었다면 자신의 글에 "인생론"이라는 제목을 달기로 한 출판사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단 한 번만 읽었는데도 헤세의 이런 의중을 알 수 있었는데 교정과 편집을 반복하는 편집부에서 "인생론"이라고 제목을 달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은 관점이 평범하다는 것이다.
헤세와 같은 특별한 작가의 글이 특별하지 않는 사람들의 손을 거친다는 것은 아쉽게도 불명예다. 은쟁반을 알류미늄 호일로 감싼 것처럼 명문장들이 싸구려 포장지에 담긴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거창한 제목에 비해 글 내용이 형편없다는 것이 아니다. 소박하게 들릴지 모르는 그의 논조는 오히려 거대담론을 뛰어넘는다.
그는 이성세계를 뛰어넘는 초이성의 세계로 눈길을 돌리도록 우리를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토록 헤세의 글이 지닌 가치를 보존하기는커녕 다른 분야의 글로 보이게끔 할 생각을 했는지 아쉬움이 크다. 제목을 다시 보아하니 어쩐지 출판사가 도박을 건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책이 출판사의 운명을 좌우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거창한 제목을 달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헤세는 그렇게 거창한 것을 선호할 정도로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굳이 인생론이라는 제목을 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한때 산악회 활동을 했던 적이 있었다. 도봉산에서 내려와서 가졌던 술자리에서 내 옆에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온 사람과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했다는 사람이 각각 앉아 있었다.
그들이 내가 남긴 산행기를 읽고서 저마다 한 마디씩 하곤 했었다. 일종의 품평회였다.
그러다가 책에 관한 이야기로 급격히 화제로 쏠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가 점입가경이었다.
일본유학파는 자신이 학사학위 논문으로 나쓰메 소세키를 썼으며, 편집부 출신은 다짜고짜 자기 앞에서는 책 얘기를 꺼내지 말라는 식으로 고압적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세밀한 표현으로 소세키의 작품을 희구했었고, 마블의 세계관을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 풀이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본유학파와 편집부의 입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섬세한 표현과 구체적인 설명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고 저 어딘가 그림자 속으로 파묻혔다. 나는 그들의 허영심과 권위의식 앞에서 침묵하고 말았다.
그 뒤로 나는 출판사의 편집인 앞에서는 함구하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세의 글에 인생론이라는 제목으로 오점을 남긴 데에는 한없이 유감을 표할 수밖에 없다.
헤세는 자기계발서를 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시인이자 화가이며 영혼을 찬미하며 영혼의 목소리를 발견한 영험한 사람이다.
그에게서 영감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우리에게 헤세란 과연 어떤 의미란 말인가.
이처럼 따듯한 위로를 받은 적이 있던가. 우리를 이끌어주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에게 개성을 부여하고 잠재력을 마주 보기 위해 자리를 비워준 이가 어디에 있었던가 말인가.
영혼, 언어, 시 그리고 독서가 헤세에겐 인생의 전부이긴 했다. 그렇다고 영혼, 언어, 시 그리고 독서에 관한 글을 실었다고 해서 인생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편집인 출신인 사람이 이 글을 보면 아마도 네가 직접 해보라고 할 것이다.
그래, 맞다. 내가 직접 편집하게 되면 더 졸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소한 나는 헤세의 묵직한 글에 "~랑"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하지 않을 테다. 또한 비문처럼 읽힐 수 있는 여러 문장들을 조금 더 다듬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제목을 제안하자면 차라리 떠나는 헤세가 후배를 위해 남기는 글이라고 솔직 담백하게 제목을 정하고 싶다.
아니면 "사랑을 담아, 헤세가"라고 했어도 헤세를 사랑하는 독자는 두 팔 벌려 기뻐하면서 이 책을 애호했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아쉬운 마음에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사람처럼 그랬을 것이다.
나는 헤세에게 빚진 것이 참 많다. 그는 질투심은커녕 독자의 반발심마저 잠재웠던 천재였다.
니체와는 격이 다른 따듯하고 자애로운 관용의 천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