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2: 도덕에 관하여

by 이각형


고백하건대 나는 시인이 될 수 없다.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언제나 시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

시인이 발견한 것이 우주의 신비로운 순간이라면, 그 순간에 머물렀던 시인의 마음과 시간들만큼 나 또한 시간을 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 한 편조차 감상할 수 없다.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길가에 핀 풀잎을 보고도 통곡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시인의 시선이자 마음가짐이다.



시인이 우주의 신비를 인간의 시선으로 찾아냈다면 마땅히 일개의 독자로서 동일한 자세를 갖춰야만 시인의 체험에 동참할 수 있는 법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나는 손에 시집을 들고 다닌 때가 매우 한정적이었다.

이처럼 시인이 발견한 우주의 숭고한 순간을 그대로 응시하기 위해서는 나도 시인과 같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만큼 나는 평소의 모습에서 시인의 면모를 찾을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냉수 한 잔을 마시더라도 예술을 담은 컵에 물을 따르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물은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한 컵이 적당하다.

그렇다고 나는 철학자도 아니다. 내 전공은 잡학을 모아 놓은 학문에 불과한 경영학이다.

경영학에 수록된 이론 중에 노벨상을 받은 건 딱 세 개뿐이다. 그런데 그것도 전부 경제학과 금융공학 분야였다.

그러니 그동안 내가 쓴 글들이 마치 철학자의 색채와 비슷해 보인다고 해서 이각형이란 작자가 철학자라는 것은 단연코 진실이 아니다. 나는 그저 철학이라는 학문의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철학자도 시인도 아닌 나는 둘 중의 누군가를 닮고자 하는지조차 알 수도 없다. 때로는 알 수 없는 감수성에 취해 담쟁이풀이 휘감고 있는 장면을 보고 우주의 신비를 절감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기도 하며, 현상의 이면이 관통하는 현실 앞에서 칸트며 헤겔이며 니체에게 항복하듯이 나를 내어주며 고개를 숙인다.

더군다나 나는 나만의 창작물도 전혀 없다. 내가 떠든 말들은 모조리 생각을 빌려온 것으로 답습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처음엔 표절이라고 표현했지만 철학자들의 글을 있는 그대로 가져오기보다는 나의 언어로 소화해 표현했기 때문에 빌려온 것이라고 수정하고자 한다.)

만약 이 글이 철학 전공자의 손에 들어갔다면 한눈에 이 글의 한계를 파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철학을 사랑하며 예술을 추종한다.

단언컨대 이러한 나의 의지는 결핍에 의한 것이다. 내게 충족되지 못한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영원한 자연을 동경하게끔 만든다.

이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배테랑2는 실제로 우리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졌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출가가 관람객에게 그토록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배테랑2에서는 도덕이 과연 무엇이냐는 추상적이며 심오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도덕이란 과연 무엇인가 말인가.

전해 듣기로 도덕은 최고로 정제된 향수와 같아서 휘발성이 강해 그 향기를 맡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연기와 같다고 한다. 이처럼 순결한 도덕성은 최고 순도의 향수을 정제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잉태된 것이 아니었다.

이 땅에 태어났던 고결한 영혼들이 우리보다 앞서 도덕에 관해 심취하여 시대가 거듭될수록 한층 복잡해진 심층을 반영해 이미 도덕적 관념은 한눈에 파악될 수 없을 만큼 두터운 깊이를 쌓아 올렸다.

이 땅을 거쳐간 현인들이 심사숙고를 거듭한 끝에 우리 손에 쥐어진 기준은 매개적인 교리에서 벗어났다. 그만큼 복잡해진 도덕은 그 누구도 순식간에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

숭고한 도덕은 그러한 것이다. 기존의 도덕적 체계에 의지하지 않지만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현시대를 반영하여 도덕적 직관을 발휘하여 판단하는 것이 바로 도덕의 속성이다.

이러한 도덕의 속성을 깊이 파악한 사람은 도덕에 관해서 말을 아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어떠한가?

왜 우리는 극단주의자에게 휩쓸려서 도덕적 가치판단을 일삼고 있는가?

우리가 과연 도덕의 재판관이라도 된단 말인가?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재산인 시간을 인생을 도덕의 심판관이 되느라 쓸데없이 소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설령 우리가 도덕의 재판관이라고 하더라도 심판을 내리기 위해 공들일 바에는 차라리 사랑의 이념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우리는 왜 분투하고 노력하는가? 바로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러한 진리를 일찍이 파악한 빅토르 위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사랑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다.

배테랑2라는 영화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도덕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고발한 영화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죄 없는 사람만이 이 사람을 돌로 쳐라.

도덕의 심판관이 되어 도덕의 재갈을 물리게 할 바에는 서로 사랑하자.

우리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자. 어차피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가시적인 세계가 전부라고 믿지 않기를 바란다. 이성의 세계를 넘어선 초이성의 세계가 있다고 철학자들 사이에선 이미 공통분모로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비가시적인 세계를 상정하는 것은 겸손의 표상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필멸의 존재이자 피조물인 존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미덕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배테랑2: 유튜버의 자질 그리고 극단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