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테랑2: 유튜버의 자질 그리고 극단주의자

양심이란 무엇인가

by 이각형


신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헤르만 헤세는 양심이라고 말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양심을 법률이나 도덕의 범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가 말한 양심은 도덕과 법률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과 같다.



헤르만 헤세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신이 있다고 믿었다.



내면 속에 잠재해 있는 신은 영혼을 통해 개인의 진정한 잠재력을 펼칠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 헤세는 고독과 고뇌를 통과하며 영혼의 목소리를 발견하라고 독일인들을 재촉했었다.



신을 마주 볼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양심은 결국 신이 부여한 영혼을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동의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양심은 도덕과 법률이라는 범위를 넘어서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악행을 저질러도 된다는 뜻은 단연코 아니다. 신이 영혼을 통해 인간에게 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고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양심은 신이 부여한 사명을 발견하는 능력에 가깝다. 그리고 발견한 사명을 충실히 실천에 옮기는 의지와 노력이 바로 생의 밑바탕이자 자질인 것이다.



헤세가 이런 말을 남긴 것은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방황하는 독일의 젊은이들을 향한 차갑지만 자상한 목소리였다. 한순간에 최강국에서 패전국가로 전락해 버린 독일을 걱정하며 보살피고자 한 목소리였다.



지금의 한국도 당시의 독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독일은 외부적인 사건에 의해 영혼을 잃어버렸고, 우리나라는 자멸적인 내부의 사건에 의해 혼란에 빠졌다는 양상만 다를 뿐이다.



한국사회는 방황하고 있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현상을 파악하는 일은 언제나 원인을 찾는 일에서 시작한다.



그 원인의 단서를 영화 배테랑2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튜버다.



조지 오웰은 이런 말을 남겼다.



"무기가 소형화될수록 공권력은 약해진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의 말은 여러 차례 증명되었다. 총이 처음 등장했을 때에 비해 지금의 총은 손바닥만 한 권총이 있을 정도로 소형화되었고, 폭탄도 도시락만 한 크기로 축소되었다.



안중근은 권총 한 자루에 의지해 하얼빈에서 일제의 침략자를 쓰러뜨렸으며, 캐네디 대통령도 화려한 정치생활을 작은 총알에 의해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소형화된 무기는 최고 공권력의 상징인 국가지도자를 무너뜨린 일이 수없이 많았다. 나는 조지 오웰의 예언이 총과 같은 무기라는 물리적인 파괴력을 갖춘 도구에만 한정되는 줄로 착각했었다.



하지만 펜이 총칼보다 강하다고 했다. 언론이 정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보다 강하다는 의미이다.



역사적으로 언론의 역할을 하던 매체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시작했었다. 그 후 텔레비전 시대를 거쳐 방송이 한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종합편성방송사 시대가 도래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우리들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발생하진 않았다.



문제는 영상을 촬영하는 기계가 소형화됨에 따라 이제는 누구든지 이것이 바로 진실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시대가 되었다. 바로 유튜브와 유튜버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누구든지 쉽게 촬영장비와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영상을 전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송출할 수 있는 유튜브라는 수단도 갖추고 있다.



아무나 쉽게 촬영하고 그것을 전 세계에 노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토록 접근성이 높아진 영상 촬영 기술은 언론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유튜브의 성장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부작용을 사회 전반에 만연히 흐르게 하고 있다. 지금은 정통언론보다 유튜버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정도이다.



35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유튜브를 쳐다보고 있을 정도로 유튜브의 파급력은 막강하다. 검색엔진 시장에서도 유튜브의 점유율은 1위 업체를 바짝 긴장시키고도 남는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손바닥을 바라보면서 유튜브를 보는 데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유튜브에서 뭔가를 봤냐고 묻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데 문제는 유튜브에 올라온 정보를 사람들이 너무 쉽게 믿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문제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무대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지적되곤 했다. 정보의 홍수 속에 정보의 가치와 진실성 여부에 대한 우려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지적되곤 했었다.



유튜브도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오히려 인터넷보다 더 큰 문제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활자를 읽기보다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영상물을 보려고 하는 경향이 훨씬 강하다. 활자를 읽으려면 해석을 통해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두뇌의 작용이 필요한 반면에, 영상매체는 그냥 눈을 뜨고 있기만 하면 될 정도로 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펴놓고 있기보다는 핸드폰을 손에 들고 유튜브 영상을 틀어놓기를 훨씬 더 선호한다. 이러한 풍경은 출퇴근길 대중교통 안에서 아주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고 있는 사람과 책을 읽는 사람의 숫자를 세어 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거짓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독서를 통한 비판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영상에 노출될 때 과연 비판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정신적으로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투입된 정보에 대해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것만이 유튜브의 독성이자 맹점이 아니다. 유튜브의 가장 큰 해악은 바로 유튜버들의 검증되지 않은 자질에 있다.



왜 사람들이 유튜버가 되고 싶어 하는가를 분석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큰 해악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비단 유튜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플루언서로 불리는 사람들의 행태에도 똑같은 문제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유튜버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유튜버의 자질을 의심해야 하는 건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유튜버는 구독자 수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는 유튜버의 소득에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튜버는 유명세라는 허영심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자극적인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숙명에 처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차원으로 자극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동안은 유명한 유튜버가 음식 섭취(먹방), 운동, 여행 그리고 영화와 같은 취미에 한해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그들의 유명세는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분야에서 주로 두드러졌었다. 그래도 문제는 발생하긴 했지만 그들끼리의 영역 싸움이 되어 일파만파 번지기만 했을 따름이었다. 그만큼 사회적 병폐는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치적 견해가 극단적인 사람들이 우후죽순 나타나서 선량한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더 나아가 한국사회를 광신도들의 불모지로 만들어 가고 있다. 구독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은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헤르만 헤세는 이처럼 세계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의 속성을 깊이 있게 파헤쳤다.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숨겨 놓은 의도가 부끄럽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개혁이라는 말 뒤에 숨곤 한다."



이 말을 가슴속에 두고 극단주의자 유튜버의 모습을 바라보면 과연 어떤 모습이 보일까?




영화에서도 정의부장이라는 유튜버는 마치 자신이 정의를 대변하는 사람처럼 행세했다. 공권력이 처벌하지 못한 범죄인들에게 보복범죄를 벌인 자에게 해치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해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정의의 사도라고 한껏 추켜올려주었다.



정의부장은 해치를 통해 자신의 유튜브 방송이 큰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재빠른 판단을 하게 되었다. 남산타워라는 공공의 장소에 많은 사람들을 불러놓고 해치를 만나는 행사를 기획했던 것이다.



현장을 생중계로 송출하면서 정의의 사도인 해치를 만나는 자리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해치를 돕기 위해 후원금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정의부장은 1시간 동안 5백만 원이라는 후원금을 뜯어냈다.



이러한 SNS상의 행태는 신혜선 씨가 주연한 영화 "그녀가 죽었다"에서 보다 극단적인 사건으로 치닫는다. 한 인간이 생존에 사활을 걸 때 SNS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무고한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아 갈 정도로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유튜버들의 모순적인 단면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은 정의부장이 영상을 촬영할 당시의 모습을 단적으로 그려냈다. 바로 정의부장이 열심히 촬영하고 있는 현장을 형사가 들이닥쳤던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 공권력의 상징인 형사의 손에 붙들린 정의부장의 옷은 정말 모순의 극치였다. 화면에 잡히는 상체만 정장 차림이었고 하체는 허연 다리가 볼썽사납게 드러난 반바지 차림이었다.



이처럼 극단주의자들은 기반이 없다는 것을 감독이 넌지시 알려준 것이다. 극단주의자에겐 지적인 기반이 없다. 지적인 기반은 지식의 유무가 아니라 자기반성과 자기 검열의 유무와 더 가깝다.



현실에서도 극단주의자들은 이렇게 가면을 쓰고 활동하고 있다. 서부지법을 쳐들어가 행패를 부린 사람들을 변호한다는 명분으로 후원금을 모았다.



과연 이러한 극단주의자들에게서 우리가 양심을 바라고 호소할 수 있겠는가? 신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능력인 양심에 호소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기껏해야 계속해서 자극적인 영상을 송출하기만 할 것이다. 자신의 유명세라는 허영과 경제적 이득이라는 탐욕에 갇힌 채 진리를 추구하기는커녕 자신의 이해관계를 파괴하는 현실에 맞서는 데에만 앞장설 것이다.



그리고 오르테가가 지적했던 것처럼 대중은 자신의 사유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허구적 집단의 사유로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 사유할 힘이 없는 대중은 언제나 타인에게서 사유를 빌려오기만 했다.



다시 말해 대중의 머리는 타인이다. 극단주의자가 말하는 것을 덜컥 믿어버리고 따르는 것이다.



일찍이 이러한 사실을 간파한 니체는 진실의 적은 믿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영상물을 사실이라고 쉽게 믿어버리는 현대시대에서 진실의 적은 사실이 되어버렸다.



진정한 사유는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완성된다. 자신의 힘으로 완성된 사유를 자신의 의지로 현실화시키는 사람이 바로 영웅이다.



귀에 솔깃해 자극적이지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이야기를 퍼 나르는 유튜버는 영웅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다. 개혁과 혁신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이면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찾아보기란 사실상 절망에 가깝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심어놓은 유튜브라는 세상에서 돈이 아니라 양심을 발휘하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이제는 적어도 책을 읽으라. 책이 싫다면 자신의 마음을 읽고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신과 얼굴을 마주 보아라.



그것이 바로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AI시대, 인간성이 사라지고 있는 최첨단 시대를 대비해야 하는 인간이 갖춰야 할 바람직한 자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유튜버, 그 중에서도 극단주의자들은 신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위인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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