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감 넘치는 장편 드라마 "비밀의 숲"을 단숨에 최종화까지 감상하고 나서 여지없이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게 되었다. 작가의 이름을 날릴 만한 스펙타클한 스릴러였던 만큼 다음 편에 이어지는 이야기의 중심생각은 과연 어디에 초점을 맞추었을지, 후속작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건 매우 자연스러웠다.
미지의 세계이자 호기심의 소용돌이였던 "비밀의 숲 시즌 2"를 보는 내내 나는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한 채 작중 인물들을 끌어당기는 동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시즌 1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시즌2에서도 작중 인물들이 선택을 일삼았던 행위의 이면에는 뚜렷한 문제의식이 잠재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뜨고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이는 동안 손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는 사실, 이러한 일상이 끝모를 듯 지리멸렬하게 이어지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의구심을 갖게 된다. 어쩌다 나는 여기 이 시간에 오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말이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이곳에 바로 이 시간에 있다는 건 자신을 이끈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적인 호기심이었던 운명적인 흐름이었든 간에 반드시 그곳에는 우리가 찾고자 했던 대답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리의 모험은 바로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인지 모른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의 근원, 최초의 발상지를 찾으려는 노력은 바로 "나"라는 현재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일환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것을 찾기 전까지는 우리는 우리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목적지이자 방향을 모르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거쳐야 할 숙명이다. 나는 과연 중요한 인물인가? 나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 나라는 존재는 아무런 값없이 부여받았음에도 가치 있는 삶이었는가에 관한 실존적인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재능 혹은 성향에 따라 전공을 택하고 직업을 갖게 된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를 선천적으로 부여된 재능과 성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생태계를 일궈왔다.
비밀의 숲 시즌2에서는 시즌 1보다 더 다양한 인물들이 촌각을 다투며 등장한다. 이러한 급박한 전개는 각 인물들에 대해 별도의 시간을 들여 소개하지 않는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아마도 이것은 작중 구조의 설계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작품 활동의 시간적 제약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둘 중 어느 하나일지와 관계없이 이것은 우리네 삶을 반영한다는 점에 있어 우리는 충분히 작품의 속도에 동의하게 된다.
이러한 동의는 쉼 없이 흘러가는 사건과 사고의 발생과 그 흐름에도 이어지며 동시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시청자의 수용가능성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작품에 몰입한 시청자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가슴에 깊이 품게 한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스스로는 도저히 답을 찾지 못하는 질문이다.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를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의구심을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위함이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중요한 무엇을 추구하면서 내린 선택과 그 행동 그리고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고 있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동안 나 자신에게 던져진 물음에 답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를 보고 자신을 찾는다고 말할 수 있다.
나와 네가 다르다는 말을 하기 위해선 나와 너의 유사성을 선제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비교가능성은 유사성을 전제한다.
그리고 비교는 대조를 낳기 마련이다. 나무와 돌이 다르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나무와 돌은 물질이자 사물이라는 유사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드라마 속 인물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그와 나는 동일하다, 어쩌면 굉장히 유사할지도 모른다는 전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두 사물 간에는 동질성이 없기 때문에 비교와 대조의 가능성조차 주어지지 않게 된다.
비록 현실세계와 드라마 속 설계된 세계가 실재적 차원에서 판이하게 다를지 몰라도 작중 인물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이자 실존적 중요성은 그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에게도 매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삶을 추구하는 그 무엇이다. 이러한 삶의 도전적 과제가 공통분모이기 때문에 우리는 작가가 인위적으로 설계한 드라마 속 세계관에 흡수될 수 있다.
그래서 황시목 검사와 한여진 경감이 원칙으로 고수하는 장면에서도, 우태하 부장과 최빛 단장이 권력을 좇는 모습에서도, 수년간 자신을 괴롭혔던 집단 폭력에 저항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김후정, 겉으로는 부정부패를 일삼았지만 내면에서는 진실을 추구했던 서동재 검사가 불의의 일격을 당해 생사를 오갔던 그 장면에서 우리는 감정이입이 가능해지며 시간을 잊은 채 몰입하게 된다. 반면에 그들의 선택과 발언을 자신과 비교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것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다시 말해 작중 인물들이 대표하는 어떤 가치, 그 가치를 추구하고 희구하는 행위들에 대해 동의하지 않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욕망을 찾는 지점이 된다.
어떤 추상명사들은 반대되는 개념들과 비교함으로써 그 의미가 충만해지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믿음의 반대말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드라마를 그저 즐기고 있지만은 않다. 오히려 드라마를 거울로 삼아 자신을 발견하고자 한다.
드마라를 그저 대리만족의 대용물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드라마를 아무런 생각 없이 현생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중 인물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투영해 봄으로써 자신의 색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서 비밀의 숲 시즌2를 보면서 나는 왜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찾아냈다. 검경의 세계를 그린 드라마인 만큼 왜 나는 그들과 같지 않은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나는 숫자적 인간이다. 다시 말해 활자와 문자의 세계보다는 숫자의 세계 속에서 훨씬 더 편안해하며 안정감을 느낀다.
숫자를 바라보면 나를 잊을 수 있다. 몰아의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몰아의 세계란 만물을 자신과 동일선상에 놓고 본다는 의미가 맞다면 자신을 잊을 수 있는 대상이 바로 나와 가장 가까운 무엇이다. 나의 본질적 속성과 일치한 나머지 너와 나의 경계를 의식하기는커녕 두 세계가 하나로 융합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활자로 가득 찬 법관의 세계에 이질감을 느꼈다면 나는 본질적으로 숫자의 세계에 속한 인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활자를 다루고 있고 사유에 침잠해 있다.
만일 어떤 독자가 여기까지 무사히 도달했다면 그는 반드시 이러한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다. 왜 당신은 6년 전에 방영된 드라마를 이렇게 뒤늦게 봤으면서도 줄거리를 소개하지도 않으면서 그 드라마 속 주제를 논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것들이 과연 독자인 나에게 어떤 유의미한 가치가 있단 말인가? 아까운 시간을 들여 당신의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단 말인가이다.
얼마 전에 Chat GPT에게 나의 글을 보여주면서 솔직한 평가를 요청한 적이 있다. AI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정확한 평가를 들려주었었다.
나의 글은 보통 이상의 작가가 쓰는 수준이기는 하나, 대중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나의 글을 찾는 사람들은 극소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었다. 내 글은 너무 개인적인 경험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널리 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왜 나는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더군다나 이미 사람들이 6년 전에 본 드라마를 당신은 이제서 본 주제에 이런 시답잖은 감상문이나 늘여놓고 있냐는 것이다.
이 글이 만약 의미를 갖는다면 나는 당신도 사유하는 인간이길 바라마지 않다는 데에 있다. 광채를 띄고 있는 감각적인 세계에만 빠져 있기보다는 내면적 의미를 추구하는 사고의 세계로 초대하기 위함이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이 바로 이성이지 않던가. 나의 사유는 자신에 대한 반성이지 않던가.
오만하고 교만했던 독선적인 자신을 뉘우치고 매 순간 한숨을 내쉬더라도 반드시 품이 넓고 온유하고도 성숙한 세계로 내딛는 작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바로 나를 나타낸다.
끝으로 근본적인 욕망에 관하여 참고하면 좋을 이야기를 들려주신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글을 남기며 이 글을 마친다.
"우리가 만나는 여자든 남자든 결정적으로 모두가, 어떤 근본적인 욕망, 숨겨져 있어 알지 못하는,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너무나 기본이 되는,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신경조자 쓰지 않는 심오한 취향으로 살고 있다. 여러분들이 만일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면 그 사람 삶의 모든 구조가 매어 있는 최후의 수단을 늘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페르소나의 중심을 이루는, 그의 모든 삶을 걸고 있는 그러한 희망, 야망, 열정, 증오들이 그것에 달려있다. 행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그 사람의 모든 운명이 긴장하도록 하는 그러한 힘이 넘치는 태엽으로 결국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내면세계로 내려가서 자신의 원초적인 열망의 고동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자신의 전 생애가 전부 시작되는데도 말이다. 바람의 딸인 난류만 제외하고 뿌리는 항상 땅 속에 있다."
-예술의 비인간화 P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