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정장과 흰색 셔츠

by 이각형


8년 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를 얼마 전부터 보기 시작했다. 조승우와 배두나 그리고 신혜선 등 굵직한 배우들이 출연한 검사들의 세계가 주 무대인 드라마다.



8년 전 드라마여서 그런지 여러 가지 소품이라든가 분위기 면에서 지금과는 다른 점들이 종종 눈에 띄곤 했다. 예를 들면 물리버튼이 있는 핸드폰의 디자인이라든가 직원 신분증을 넣을 수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사원증 목걸이 같은 것들이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2025년에 쓰고 있는 비슷한 종류의 물건들이 10년 뒤에 볼 때 똑같이 '그땐 그랬었지'라는 감상에 젖어들게 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그래서 특별히 이질감을 주지도 않고 누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의 흔적들이다.




그런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디자인 - 물론 사소한 디테일에는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불편한 느낌을 주거나 어딘지 모르게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비록 그 사물을 향하고 있는 눈은 편할지 몰라도 마음속 어디선가 움직일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지곤 했다.




그리고 그 사물은 러닝 타임 내내 화면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운이 좋아 지난주에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들어갈 집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살던 집에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와야만 이삿날을 정할 수가 있었던 상황이라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기까지 약간 조바심이 나기도 했었다.



어림잡아서 10번 정도 부동산에서 손님을 이끌고 집을 보러 오셨었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분들이 몇 분 계시는데, 마지막으로 집을 보러 왔던 손님들은 그동안 방문했던 손님들과 다르게 특이한 조합이었다.




노인 두 분과 젊은 아들 그리고 그들이

새 며느리가 될 사람, 이렇게 총 4명이 집을 보러 왔었다. 그런데 80 정도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4월 중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툼한 패딩에다가 털모자까지 쓰고 왔었다.




누가 보면 하얼빈이나 삿포로 쪽에서 막 도착한 사람인 줄 알 정도로 한겨울 옷차람이었다. 그리고 색상도 굉장히 눈에 띄었다. 밝은 하늘색 패딩에 짙은 붉은색의 털모자를 쓰고 있었고 바지도 품이 넓고 두툼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알고 보니 상당한 자산가였다. 잔금을 치르는 날 부동산중개사무소에서 나타난 그 할아버지는 전혀 몰라볼 정도로 사람이 달라졌었다.




나는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의 굴은 잊지 않는다. 특히 그 사람을 언제 어디서 어떤 장면에서 만났는지를 절로 기억하는 편이다.



오죽하면 이사 당일날 내가 살던 집으로 전입신고를 하러 주민센터에 새로운 세입자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했을 정도이다. 새로운 세입자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어딘지 모르게 메마른 느낌의 얼굴 인상을 기억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보통 얼굴을 보면 잊지 않기 때문에 한눈에 딱 봐도 그 할아버지를 알아봤었어야 했는데 전혀 못 알아봤다. 할아버지가 공동중개인 옆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왜 앉아 있냐고 물어볼 뻔할 정도였다.



의아한 나머지 나는 왜 못 알아본 것인지 세심하게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 할아버지의 복장이 갑자지 180도 달라진 것이 원인이었다. 할아버지는 아주 말끔한 신사가 되어서 나타났던 것이다.



조금 과장하면 구한말 시대에 한복을 입은 조선인들이 사이에 중절모를 쓰고 양복차림으로 느닷없이 거리로 나타난 신세대 지식인 같은 인상을 받았을 정도로 사람이 다르게 보였었다.



한눈에 봐도 폴리에스테르가 아닌 고급스러운 울 재질의 짙은 감색 정장이었다. 그리고 그 검붉은 털모자 대신에 검정 플라스틱 안경테를 쓰고 있어서 어딘지 모르게 나이에 비해 두뇌회전이 빠르다는 느낌을 주었다.




더군다나 두툼한 옷을 입고 왔을 때와 다르게 정장을 입은 그 할아버지의 체형은 뱃살 하나 없이 말끔한 정상적이고 건강한 체형이었다. 그런 효과로 며칠새 나이도 10년은 더 젊어진 것처럼 보였다.




정장 하나가 이렇게 큰 반전효과를 보여준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중요한 자리라든가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는 정장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정장의 다른 이름이 바로 신사복이지 않던가. 그만큼 정장을 입었을 때 타인에게 상당히 고상한 인상을 남기게 하는 일종의 무기와도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남자들의 정장 착용"에 대한 사회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는 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남자들이 꼭 정장을 입어야 하는 기업들은 굉장히 많았었다. 하지만 2021년을 기점으로 대기업이나 금융권에서는 탈정장화를 선언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세계는 디지털화를 가속시키게 되었다. 비대면이 일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서 사람의 개입 없이 세상이 제 역할을 해야만 할 때 디지털이라는 도구에 손을 뻗게 되었다.




금융권에서도 마찬가지로 금융의 디지털화를 선언하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핀테크 기업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의 하나로 더 이상 정장을 입지 않기로 했으며 복장의 자율화를 통해 IT기업처럼 자유로운 사고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대기업권에서도 점차 정장을 입는 회사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이 몰려 있는 서울 중구에서 점심시간 동안 정장을 입은 사람보다는 캐주얼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눈에 띄곤 한다.




이러한 세태의 변화는 건전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눈을 갖게 만들었다. 굳이 정장을 입지 않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정장을 입고 나타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부터 금융권에서 검은색 정장과 하얀 셔츠를 입는 것은 불문율에 가까웠고, 이를 깨는 일은 통속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왜 금융권 사람들은 정장과 셔츠를 꼭 입어야만 했을까?




금융권 종사자가 하는 일은 돈으로 돈을 벌게 하는 일이다. 제조업이나 도소매업과 다르게 금융업은 돈이 재고자산이자 유형자산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은행이나 증권사를 찾아오는 고객들은 자신이 상담하는 금융사 직원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바로 위험회피 성향에 따른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확실한 조언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융사 직원은 고객들의 기대에 부응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금융사에서 재직하고 있는 직원, 다시 말해 투자상품을 권유하는 직원의 사명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양자컴퓨터 시대가 도래한다고 해도 미래를 예측하는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명 때문에라도 금융사 직원들은 자신들이 마치 미래의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처럼 "보여야만" 한다. 그런데 역시나 같은 인간이기에 고객들의 기대에 부응할 확실한 방법이 전혀 없다.




따라서 그들은 눈을 속이기로 하게 된다. 그것도 검은색 정장으로 위엄을 갖추고 하얀색 셔츠로 정직을 살짝 끼워놓는 방식을 선택한다.




내가 얼마 전 부동산중개사무소에서 겪었던 것처럼, 보잘것없던 노인이 하루아침에 멀쩡한 신사로 거듭나는 일이 금융사를 찾는 고객들 눈에도 발생한다. 앞날을 내다보지 못해 어떤 상품에 투자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 눈에 세계 유수의 투자회사들은 검은색 정장과 흰색 셔츠를 입고 미래의 수익을 예측하는 사람들로 변모하고 만다.




그렇게 정장을 고집하던 우리나라 금융사들도 2021년부터 복장 자율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래서 그 주변에서는 정장을 입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자율적인 의복문화에 따라 몇 년을 생활해 온 끝에 직원들은 생활의 편리함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정장이라는 사물이 직원들의 목을 졸라매고 있었단 점도 깨달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정장을 입고 있지 않아도 금융사 직원들이 업무 처리를 하는 데에 있어서 걸림돌은 전무하다시피 한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나는 사실 금융권 종사자로서 이미 15년 전쯤에 팀 후배에게 "야, 우리가 꼭 정장을 입지 않고 넥타이를 매고 있지 않아도 일할 때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지 않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로서는 굳이 정장을 입고 그 일을 하는 것이나 면바지에 셔츠를 입고 하는 것이나 생산성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주말부터 보기 시작한 2017년작 드라마에서는 검사들 모두가 보기만 해도 답답해 보이는 짙은색 정장과 흰색 셔츠에 넥타이까지 매고 나온다. 똑같이 정장차림을 한 검사들 중에 한쪽은 정의를 추구하고 다른 한쪽은 정의를 이용하고 있다.




정의를 명분으로 자신의 부귀영화를 꾀하고 있던 사람들과 정의를 구축하기 위해 투철한 사명감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모두 똑같이 정장차림이었다. 겉으로 볼 때 다른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비리의 온상인 정장차림이 부하 검사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국민을 위한 검사"와 "법정의"를 천명할 때 시청자들은 살짝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저렇게 번듯하게 차려입은 검사장이 과연 나쁜 인간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우리나라 금융권에서 탈정장화를 선택하면서 금융권 주변의 카페에는 늙수그레한 사람들이 정장차림으로 모여 앉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들이 종종 눈에 띈다. 그들 곁을 지나가게 되면, 그들의 대화 중에 꽤 큰 액수의 돈을 언급하는 것을 들을 때가 간혹 있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설득하려는 그 연극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인위적인 사람들의 모습들을 포장한 것이 바로 정장차림이었다. 그 뒤로 나는 TV에서나 어디서나 굳이 정장을 입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정장을 입고 나타나는 사람들 또는 캐주얼 슈트로도 충분히 격식을 갖췄다고 여겨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장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의도성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처럼 돈을 다루는 회사 근처에는 돈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권리에 대한 정당한 주장이면 모를까, 뭔가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투자를 권유하고 장밋빛 전망을 귀에 흘리고 있는, 얼굴도 모르는 중장년층이 정장을 입고 카페에 앉아 있는 장면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참 씁쓸할 때가 있다.




정장이라는 갑옷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말에 신뢰라는 무기를 달아주는 것, 바로 그것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정장이다. 그래서 이런 장면을 목격할 때면 나는 두 사람이 생각난다.




우선 생각나는 사람은 나심 탈레브이다. 블랙 스완이라는 책의 저자로 그는 금융회사 직원들이 왜 검은색 정장과 흰색 셔츠를 입는지 - 앞에서 내가 대신 말한 - 그 이유를 꼬집었다.




그리고 이런 특정한 분야를 넘어 인문학적인 배경에서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의도를 감추려는 모습을 정확한 언어로 묘사한 피츠 제럴드의 말이 떠오른다. 그의 단편 소설 부잣집 아이의 서문이었던 그 문장들을 여기에 옮기며 긴 글에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






한 개인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유형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 어떤 유형을 먼저 생각하면 아무것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유별난 괴짜이기 때문이다. 얼굴 생김새나 말투의 배후에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우리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보다 더 유별난 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평범하고 정직하며 개방적인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가 뭔가 분명하고도 어쩌면 아주 끔찍한 비정상적인 점을 가지고 있는 나머지 그것을 감추려고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러니까 평범하다, 정직하다, 개방적이다 하는 단언은 말하자면 범죄 은닉을 생각나게 해주는 그의 방법인 셈이다.


민음사 F. 스콧 피츠제럴드 단편선 1 P214




(추신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복으로서의 검은색 정장차림은 여전히 유효하다. 예복으로서의 검은색 정장은 자신을 검은색 속으로 감춤으로써 경사와 조사에 관계된 사람들 모두에 대한 존중과 예우를 갖추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추신 2) 이 글은 남자들의 검은색 정장과 흰색 셔츠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지, 여자들의 정장에 관해서는 남자로서 언급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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