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십 년쯤 되었을까? 나는 이런 얘기를 종종 듣곤 했다.
내가 어떤 책이나 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남기면 그 작품을 꼭 읽거나 보고 싶어 진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만일 이런 얘기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면 나는 아마도 비평에 관해 어떤 소질이 있다는 걸지도 모른다.
이러한 근거 없는 자신감을 등에 업은 채 나의 지적 스승의 도움을 받아 비평가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나 해보면 어떨까 싶다. 왜냐하면 이곳 브런치에서도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남겨 자칭 비평의 임무를 맡고 있다고 말하는 작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평가는 비평이라는 작업의 기생적인 한계에 근거해 그 역할을 특정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만일 어떤 작품에 대한 비평이 그저 작품의 줄거리를 늘어놓고 있다면 그것은 비평의 역할을 빙자한 채 스포트라이트를 모조리 자신에게 향하게 하기 위한 의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비평은 원작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 자체로 이미 원작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비평은 언제나 원작보다 두드러지면 안 된다. 원작보다 비평이 유명해진다면 이것은 지적인 허영심이며 질투를 우회적으로 표한 것이 된다.
그리고 겸손하지 않은 비평가들은 언제나 내적인 충족감이 부족한 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빈약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에게는 자신만의 콘텐츠가 없다.
설령 그들에게 콘텐츠가 있다고 하더라도 순전히 단편적인 것이다. 단편적이지 않고 심층적이었다면 그들은 비평가로서의 소임을 마다하고 자신이 갈고닦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에 스토리를 입혀 이미 세상에 꺼내 놓았을 것이다.
이러한 원작과 비평의 관계를 깨달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베프이자 비평가였던 친구에게 비평가로서의 임무를 편지의 형식을 빌려 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오르테가의 비평가에 대한 글을 읽기 전부터 작품을 소개할 때 줄거리를 말함으로써 원작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에 찬물을 끼얹은 적이 없다.
만일 자신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책으로 읽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가 덤블도어 교수가 책 몇 권에서 죽고, 앨프 도비가 언제 어디서 죽게 되며, 해리 포터의 여자친구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면 어떨까?
지적인 모험은 언제나 미지의 세계를 기초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통해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한다면 진정한 감상은 언제나 선입견이 없어야 가능하다.
줄거리를 모두 안 채로 작품을 본다는 건, 미리 결말을 아는 소설을 다시 읽는 것과 같다. 감상의 여지는 줄어든다.
결국 비평이라는 작업의 태생적인 한계를 명확히 깨달았다면 비평가의 임무를 저절로 알게 된다.
비평가의 임무란 독자와 작가의 연결고리 역할이다. 훌륭한 작품을 독자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작품의 줄거리를 직접으로 말해주는 비평가들을 향해 등을 돌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 세상에 길이 남을 만한 명작을 오로지 자신만의 경험으로 즐길 수 있게 된다.
비평가이거나 비평가가 되고자 한다면 이러한 관계를 가슴 깊이 받아들여야 하며, 이에 따라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면 줄거리를 꺼내거나 개인적인 감상에 치우지지 말아야 한다.
비평가는 안내자이며 해변에 세워진 등대이다. 독자에게 초대장을 건네는 파티 호스트의 진정한 친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