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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Jan 11. 2024

나는 사유 속에서 삶의 무게를 느낀다.



나는 사유 속에서 삶의 무게를 느낀다. 비록 사유의 속성상 사유가 멈춘 다음에야 사유의 존재를 알게 되긴 하지만, 사유가 없었다면 무거운 마음이 어디서 흘러온 것인지 알아낼 방법은 없을 것만 같다.

우리는 사유 속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라 사유에서 슬며시 빠져나오려고 할 때 그 사유의 존재를 알아차린다는 점에는 참 오묘한 의미가 있다. 생각하고 있을 때에야말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이러한 아이러니는 삶의 역설과 너무도 그 결이 같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행위에서 나온다고 하는 말에도 비슷한 의미를 적용할 수 있다. 즐거움을 주는 무언가를 하는 동안에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며, 그 행위에서 빠져나오기로 한 순간부터 사그라드는 행복감의 끝을 붙잡고 나서야 비로소 행복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러한 행복감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실질적으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인, 그 무언가를 하고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결국 이러한 행복에 대한 일침은 행복을 느낄 순간뿐만 아니라 불행감을 느끼지 못하게 막는 데에 방점을 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가만히 앉아 잠자코 생각에 빠져 있을 때도 있지만 바쁜 현대인에게 가만히 있는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다. 대신에 바쁜 만큼 어디론가 움직이게 되고 움직이는 동안 발바닥이 땅을 구를 때마다 머릿속이 작동하기가 수월해진다.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걷는 동안 생각에 잠기곤 한다. 잠수부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을 때 바닷속이 그의 세계 전부인 것처럼 사유는 나의 세계를 차지하는 실존의 위치로 기어코 올라서고 만다.

파스칼 메르시어 작가가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관념적 삶, 다시 말해 삶의 관념적 속성을 다음과 같이 단 한 문장으로 말했다. 인생은 사는 게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것이라고.

어떤 이는 산책이나 등산을 다녀오면 머릿속이 정리되고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나도 비슷하면서도 약간 결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질문 몇 가지를 들고 산길에 들어서서는 정상에 오르기까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몇 문장으로 다듬은 상태로 내려오곤 했다.

직장에 매인 신분이라 답해야 할 질문이 많다면서 매번 산에 오를 수 없는 법이다. 대신에 매일 아침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와 사무실로 향하는 길 위에서 생각에 빠진다.

이런 일이야말로 내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일과와 같은 일이다. 아마 출근하는 직장인 대부분이 비슷한 시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비록 겉모습은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내 머릿속을 채운 문제와 질문에는 직장과 관련된 건 단 하나도 없다. 내 시간과 월급을 교환하는 것이 노동계약이고, 직장과 관련된 생각은 월급을 받는 시간 안에 하면 그만이다.

그 외의 시간에는 나는 온전한 나 자신이다. 사무실로 들어서기 전까지의 시간은 온전히 내 삶의 것이다.

오늘 아침 속을 알 수 없는 무거운 마음이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애틋하면서도 서운하고, 절실하면서도 기운이 빠져 있었다.

바닥을 구르는 발동작에도 그러한 마음이 손길을 뻗쳤는지 힘이 나질 않았다. 시선도 정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정처 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애석한 마음이라도 구름에 담아 흘려보내고자 하는 듯이.

한참을 걸었는데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어둡고 굽어진 마음의 큰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좌우로 고개를 돌려보아도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청담동 사거리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어딘가가 평소의 모습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차도 위에 두어 사람이 서 있었다. 자동차가 쌩쌩 달려야 할 그곳에 나약한 두 존재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이례적인 모습은 사람들 눈에 띄기 십상이기 마련이었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자동차 두 대가 연달아 서 있었다.

뒤차가 앞차를 세게 때린 모양이었다. 뒤차의 보닛이 심하게 구겨져 앞 유리창을 반쯤 가리고 있었고, 아래로는 냉각수인지 투명한 액체가 흘러 땅바닥이 유독 더 거뭇거뭇했다.

멀리서 볼 땐 몰랐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은 남자와 여자였고, 고개를 숙인 채 연신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는 조금 여유가 있어 보였고 여자는 뭐랄까 서두르는 기색을 억지로 감추려는 표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해 사고차의 주인은 여자였던 것이다. 다행히 두 사람은 안전벨트를 잘했는지 육안상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내일이면 앞쪽 차량의 주인인 남자가 목 뒷덜미를 붙잡고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일단 멀쩡해 보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청담역에서 걸어 다니는 코스로 통근길을 바꾼 지 2달여 만에 처음으로 본 추돌사고였다.

두 달 만에 사고를 목격했으니 산술적으로 계산했을 때 이 사무실로 출근하던 지난 34개월 동안 총 16번의 사고를 추가적으로 목격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러다가도 이는 순전히 산술적인 계산이며 확률과 통계를 대입시키면 그렇진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나는 고작 하나의 사례로 전체를 가늠하려는 실수의 유혹에 이끌려 계산까지 해버렸다. 내 식대로 판단하려는 유혹에 저항했다. 쉬운 계산에 싫증이 나버렸다.

사고현장을 지나쳐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고에 시선을 뺏긴 나머지 어두컴컴한 마음에 한줄기 빛을 비춰 볼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몰려왔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가 켜지면서 더 지친 기색이 들었다.

오전 문정동에서 상담 약속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급히 서둘러 서류 결재와 보고서 작성을 마무리하고선 백팩을 들고 다시 길가로 나왔다.

문정역에서 내려 약속장소로 이동하는 길도 도보로 꽤 걸어야만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다가 나는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이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마음이 어두워진 이유의 단서를 찾아냈다. 이것을 깨닫자마자 마음이 일순간 마음이 놓이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그녀를 모르고 있다. 아니, 그녀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가 말하지 않는 시간에 관해 그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고개를 든 고민은 바로 이것이었다. 만일 이토록 알고자 하는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은 과연 소유욕에 의한 것인지 사랑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모르는 그녀의 시간이 있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을 모른다는 단순한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열망에 그어야 할 경계선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열망이 내면에 가득 퍼질 때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결국 내 마음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난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러 온 셈이었다.

그리고 눈을 드는 순간 생면부지의 사람, 내게 단서를 던져준 사람이 안쪽으로 들어오라며 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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