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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Jan 11. 2024

생각하는 힘

김기석 목사님께서 소개해주신 것같이 인간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우두커니 앉아 사색에 빠진 채 자신과의 대화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다.

만일 자신이 지닌 지적인 능력을 통해 남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만족하면서 이성이라는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철학이라든가 윤리라든가 과학이든 간에 학문을 불문하고 사유의 힘을 긍정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대화가 사전에 충분히 이뤄진다는 점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인간은 자신과 스스로 나누지 않은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법이다. 작가가 긴 분량의 글을 썼다면 그는 분명 그만큼 자신과의 긴 대화시간을 보냈다는 방증이다.

또 만일 작가의 글이 끝 모를 심오함을 담고 있다면 작가 자신이 깊은 바닷속으로 몸소 들어가 대화라는 사투를 벌인 끝에 잡아 올린 포획물인 것이다. 이토록 언어에는 그 사람의 정신세계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이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로고스라는 말을 통해 언어와 생각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실재를 외부세계에서 찾음으로써 근대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말았다.

내면의 대화는 인간성에 대한 탐구와 다르지 않다. 필멸의 존재인 우리는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해야 하며 그 끝은 어디로 향하는가에 관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것이라면, 인간성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사 이래로 인간이 생각하는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분야인 철학은 방향설정에 관한 것이다.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바로 철학함의 의의다.

따라서 철학은 언제나 질문에서 시작하며 철학자마다 써낸 답안지는 시대가 바뀌어감에 따라 빨간 줄이 그어지고 새로운 종이를 꺼내도록 사유하는 자를 부추긴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정처 없이 떠돌던 이가 문득 고개를 들고 시선을 멀리 던질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철학을 붙잡기 마련이다.

그저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심심풀이로 활자를 붙잡고 있는 사람과 다르게 그는 질문에서 시작한 사유의 경로를 따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과의 대화가 진지해지면 진지해질수록 그의 사유가 지닌 무게는 저울추를 무겁게 짓누른다.

하지만 문제는 철학에서 찾아낸 답도 허무주의라는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현명한 철학자는 부담감을 덜기 위해서라도 지적 완고함이라는 짐을 내려놓고 신학에 귀의하곤 한다.

최고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지적 완고함이 실재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었다면,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지적 허영심이 우리의 눈을 가린다. 중량감 넘치는 다독이 완고함을, 그보다 양적으로 못한 어설픈 다독이 허영심을 낳기 마련이다.

지적 허영심은 지기 싫어하는 욕망을 근거로 한다. 허나 어깨에 힘을 뺄 때에야 비로소 물속에서 앞을 향해 쉬이 팔을 뻗을 수 있다는 역설처럼 우리의 마음이 가벼워질수록 삶의 경로는 우리에게 대로를 열어주는 법이다.

한 공간 안에서 나보다 나은 존재라고 자부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주장 중 하나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근거가 없는 명제라고 분명히 밝힌 것이 있었다.


남자는 여자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피엔스에서 하라리는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 논문은 찾아볼 수 없다며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술자리에서 본인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지난 십 년 간 십수 번을 읽었다고 자랑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내 앞에서 유발 하라리의 책을 십수 번 읽었다면서 유발 하라리의 발견과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 것이었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지적 허영심의 발로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동안 나는 반면교사를 기피하기를 열망해 왔다. 바른 길로 인도할 지적 선구자를 만나고자 바랄지언정 반면교사를 구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하라리 박사의 말대로 만일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진리탐구를 믿는다면, 실수를 인정하는 것도 게임의 일부가 된다.

그게 바로 인간성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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