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보들보들하고 무한한 행복

길고양이 콩이 이야기

by 장귤

우리 엄마를 '장 농부'라고 부른지도 벌써 9년째다. 각종 쌈채소와 배추, 옥수수는 물론이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을 뚝딱 길러낸다. 제철 과일인 수박과 딸기까지 있는 그 밭에는 엄마와 나의 행복 또한 살고 있다. 그 시작은 여느 때처럼 밭일을 마치고 익은 얼굴로 돌아온 장 농부가 식탁에서 툭 던진 말이었다.


"요즘 작고 삐싹 꼴은 새끼 고양이가 혼자 돌아다녀."

늘 가방 속에 고양이 간식을 넣고 다니는 나는 큰 쥐만 하다는 그 고양이의 생김새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작고', '말랐고', '혼자'라는 단어들이 내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엄마는 고양이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름을 지어주자고 했다.

"그냥 애기라고 부르는 건 어때?"

"별로야. 걔만의 이름이 필요하다구."

외형도 성격도 모르는 생명체의 이름이 쉽게 떠오를 리 없었다. 결국 엄마가 떠올린 '콩이'로 정해졌다. 뜻은 갖다 붙이기 전문인 내가 갖다 붙였다. 비록 지금은 삐싹 꼴았지만 콩처럼 동글동글 통통해지라고 콩이.


이름까지 지어주니 더더욱 콩이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밭에 따라나선 적이 없던 나는 다음날 곧장 엄마의 스쿠터 뒤꽁무니에 매달려 밭으로 향했다. 앞에서 펄럭거리는 엄마의 바람막이 주머니에 두 손을 넣으며 이래서 함부로 이름 붙여주는 거 아니라고 하나보다, 생각했다.


엄마의 꽃밭 근처에서 모습을 나타낸 콩이는 정말 작았다. 얼마나 작고 깡말랐는지 거센 바람이 불면 나동그라질 것 같았다. 하얀 바탕에 작은 마카롱만 한 검정콩 두 개와 조그만 치즈콩 세 개가 콕콕콕 박혀있는 삼색이. 옆구리는 움푹 들어가 있었다. 엄마가 윗집 개 까미를 위해 챙겨 다니는 고구마와 계란 노른자를 주었더니 게눈 감추듯 먹었다. 그날 이후 새끼 고양이용 습식 캔과 사료 포대를 구입한 나는 결국 꽃밭 옆에 겨울 집까지 놓아주었다. 출입구 위에는 심혈을 기울여 최대한 예쁜 글씨로 '콩이네'라고 적었다. 나의 성실한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롭고 즉흥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는 사랑을 할 때만큼은 성실하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텃밭에 출근 도장을 찍게 되었고 내 이부자리는 안 펴도 콩이 잠자리는 매번 매만져주었다. 저녁 식탁에서는 다 같이 그날 찍어온 콩이의 사진과 영상을 봤다. 영상 속 엄마와 나는 생전 내본 적 없는 말투로 콩이를 부르고 있었다. 밤에 듣는 고양이 울음소리는 마치 갓난아기가 우는 것 같아서 섬뜩하며, 특히 어둠 속에서 부리부리하게 빛나는 눈이 무섭다던 엄마는 콩이가 고양이인 걸 잊은 것 같았다. 갈 때마다 눈에 띄게 자라는 콩이의 몸집만큼이나 우리의 행복도 점점 커져갔다.



계절은 예고 없이 가고 또 찾아왔다. 해가 저물면 베란다에만 나가도 온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우리는 하루에 한 번씩 꼭 콩이를 걱정했다. 한파에 얼어버린 물그릇을 보거나 돌보던 길고양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겁이 났다. 가혹한 이 계절에 길고양이 학대 뉴스는 자꾸만 눈에 띄고 귀에 들려왔다. 길고양이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존재였다. 언제 생활 구역을 옮겨버릴지 모른다. 중성화 수술을 받기 전에 힘든 임신과 출산을 겪게 될지 모른다. 목숨을 위협하는 질병에 걸리거나 짐승만도 못한 사람의 눈에 띌지도 모른다.


길동물의 삶은 치열하고 끝은 허무하다. 사체를 구청에 신고하면 종량제 봉투에 담겨 쓰레기장에서 처리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콩이가 별이 된다면 우리는 꽃밭에 묻어주기로 했다. 한참 나중 얘기인데 눈물은 왜 맺히는 걸까. 넓디 넓은 세상 속 엄마의 꽃밭에 찾아온 길고양이는 존재만으로 내게 행복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존재라는 것은 결국 유한하다. 즉 지금의 행복 또한 유한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세상 이치인 사실이 살에 칼날이 꽂히듯 깊숙이 들어왔다.


유치원을 다닐 때 키우던 거북이 이후로 가까운 존재의 죽음을 접한 적 없는 나는 무심코 클릭한 시한부 고양이 영상에 눈물을 질질 흘리다 베개를 푹 적시는 데 이르렀다. 심지어는 수필 수업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가도 눈물을 흘렸다. 온 신경이 ‘존재의 소멸’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손수건 필참이라는 영화에도 꿈쩍 안 할 정도로 메마른 내 눈물샘을 알고 있는 지인들이 들으면 배를 잡고 웃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건 행복의 끝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지막이 분명히 존재한다. 존재가 주는 행복의 크기가 언젠가 닥쳐올 슬픔의 깊이와 비례할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을 직시한 나만 괴롭고 막상 콩이는 별생각 없어 보인다. 밥을 먹은 후 얼굴이랑 몸을 핥는 것에만 열심인데 그 모습이 어찌나 뻔뻔해 보이는지 헛웃음이 나온다. 근처에 차를 세우는 소리가 나거나 낯선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싶으면 잽싸게 컨테이너 밑으로 몸을 숨길 만큼 겁이 많지만 내가 내는 소리만큼은 반겨준다. 스쿠터 브레이크를 잡으면 왜 이제 왔냐는 듯 크게 먀옹거리며 튀어나온다. 원하는 게 있을 땐 째깐한 목소리로 어찌나 열심히 의사표현을 하는지! 작디작은 머리통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콩이 옆에 앉아있을 때만큼은 이 행복의 유한함 같은 건 생각나지 않는다. 작고 보들보들한 행복만이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성실한 사랑이 지금의 행복을 무한하게 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한다면. 그렇게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면 마지막의 무게에서 미안함과 아쉬움 정도는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은 이름 따라간다더니 묘생도 마찬가지 인가보다. 보기 안쓰럽던 새끼 고양이는 말 그대로 콩처럼 보기 좋게 동그래졌다. 중성화 수술도 받고 순탄히 성묘가 되어가는 중이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 날엔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오는 것은 여전하지만, 가만히 걱정하고 있기엔 할 일이 많다.


급식소에 깔아놓은 돗자리에 콩이가 왔다 갔다하며 묻혀놓은 흙을 걸레로 훔친다. 그릇들을 깨끗이 씻어 말린 뒤 다시 가득 채운다. 하얀 털이 묻어있는 쿠션도 팡팡 털어준다. 꽃밭 주인의 허락 하에 가능한 공존이기에 주변 환경미화도 철저히 한다. 사이사이 부는 바람에 키 작은 풀들이 흔들릴 때마다 자꾸만 고개가 돌아간다. 그러다 보면 깊은 잠에서 깬 건지 조금 멀리 놀러 갔다 온 건지 모를 콩이가 찾아온다. 반가움의 표시로 통통한 몸통을 연신 쓰다듬는다. 오늘도 성실하게 사랑했고 내일 역시 그럴 거다. 무한한 행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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