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이유
사랑하는 것들은 왜 형광펜으로 칠해놓은 것처럼 보일까? 좋아하는 사람의 짧아진 앞머리, 엔딩 크레딧 속 친구 이름, 엄마가 손톱 옆 거스러미를 떼어낸 자국 같은 것들. 그리고 또 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길고양이들. 날 선 경계심을 가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듯한 그 속도를, 시야 좁은 내가 어떻게 번번이 포착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발견 다음은 작명이다. 우연히 만난 길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소소한 취미가 되었다. 양말이, 막내, 연두, 엘라, 콩알이, 알밤이 등등. 흔한 단어라면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름이라 좋고 특이한 이름은 고유한 매력을 담고 있어서 좋다. 시간과 고양이만 허락해 준다면 사진을 찍어 작명한 이름과 함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린다. 그걸 <길냥작명소>라는 제목의 하이라이트에 모아두고 있다.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있는 고양이들은 얼추 300여 마리이다(고양이 보호시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선명한 고양이가 있다. 18년 전 등굣길, 그 고양이는 아파트 입구 앞 사차선 도로 위에 눌려있었다. 까만 턱시도 무늬였는지 어두운 밤색 고등어였는지는 가물가물한데 말도 안 되게 납작했던 두께는 마치 어제 본 것 같다. 고양이라는 동물에게 관심 없던 때였지만 그 이름 모를 존재의 마지막 모습은 기억으로 변하며 단단히 꿰매어졌다.
그다음으로 기억하는 고양이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만났다. 아침 운동 갈 땐 건너편 편의점 앞에, 저녁이나 늦은 밤에는 우리 아파트 벤치에 앉아 있던 치즈 고양이. 매일 왔다 갔다 하며 두 집 살림을 했지만 사심 담아 우리 아파트 이름을 붙여주었다. 중성화 수술을 했다는 표식으로 왼쪽 귀를 댕강 잘린 채 시선과 손길을 즐길 줄 알던 그 고양이를 꽤 오래 그리워했다. 치즈 고양이가 수없이 건너다녔을 사잇길 역시 이차선 도로였다.
엄마의 텃밭에 나타난 작은 고양이를 챙겨주게 되면서 그제야 사차선 도로 위의 고양이가 궁금해졌다. 그 애도 이름이 있었을까. 나에게 치즈 고양이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그 애를 오래 그리워했을까. 그 차선을 지나간 운전자들은 아무도 몰랐던 걸까 아니면 모두가 알았을까. 그 애의 명복을 바라주지 못했고 더는 짓눌리지 않을 곳으로 옮겨주거나,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그제야 아팠다.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삶과 그 삶의 마지막 순간을 그제야 아파했다.
길가를 들여다보면 자그마한 꽃들이 제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꽃에 영 관심이 없으니 민들레나 개망초 같은 게 아니면 알지 못한다. 대신 꽃을 심기 위해 텃밭 자리를 따로 빼둘 정도로 꽃순이인 우리 엄마가 다 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꽃들에게는 이름이 있다. 들에 뿌리를 내린 꽃일지라도.
나에게 이름 모를 들꽃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사랑이었을지 모르는 그 애의 이름은 뭐였을까. 이름이란 오롯이 나에게만 주어지는 사랑이다. 소중한 존재가 어떠한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을 몇 글자로 힘껏 눌러 담은 결과물이다. 그래서 이름을 지어주는 건 너를 사랑할 거라고 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길고양이의 이름을 지어주고 또 불러본다. 별거 아니었던 우연이 사랑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름 모를 그 애의 이름은 '구름이'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모습과 정반대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이름을 주고 싶었다. 통통하고 폭신한 구름. 목숨을 걸고 뛰어야 하는 땅이 아니라 저 높고 넓은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 여전히 빠르게 달리는 차들 위에서 저만의 속도로 흘러가기를 바란다. 어쩌면 이미 이름을 여러 개 가진 인기쟁이였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늦어버린 마음을 이제서야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