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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늘 Jan 05. 2024

2) 명퇴 그리고 개인빚(사채)

빚과 가족의 상관관계

2) 명퇴 그리고 개인빚(사채)


탕~

아버지는 낚시와 사냥을 좋아했다. 낚싯대와 사냥총관리는 늘 철저히 하셨다. 낚시할 때 딸 중에서는 막내인 나만 종종 데려갔다. 사냥은 위험해서 그랬는지 딱 한 번 따라갔다. 초등학생 때였다. 꿩이나 토끼를 잡으러 간다고 들었다.  눈이 내린 산길을 걸었다. 사람의 통행이 적은 산에서 작았던 내 발은 새하얀 눈 속에 폭폭 박히며 모양을 만들었다. 무척 신났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아버지는 분주하게 움직였고 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순백의 아름다운 풍경에 빠졌다.


탕~ 총소리가 난 후 빠른 걸음과 뜀으로 사냥감을 확인하러 달렸다. 장갑을 끼고 모자를 썼지만 코가 빨개지고 볼이 바람에 쓸려 온통 실핏줄이 터졌다. 추위를 잊을 만큼 청량한 공기가 마냥 좋았다. 눈 덮인 산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나무들은 뽀송한 겨울옷을 입고 패션쇼를 하는 듯 곧게 어있었다. 아버지의 손에 시선이 멈췄다. 총에 맞고 굳어진 물체는 인형처럼 보였다. 까마죽처럼 새까맣고 동그란 눈알만 유독 빛났다. 더 이상 날지 못하는 꿩은 자루에 담겼다.


1996년, 회사에 들어간 지 불과 몇 개월이 지났다. 아침 7시 전에 집에서 나와야 안양에 위치한 회사에 늦지 않았다. 오후 6시가 되면 일을 멈추고 학교로 뛰어갔다. 수업시작이 6시부터라서 1교시는 매번 지각이었다. 수업을 마치면 다시 지하철로 뛰었다. 잠시잠깐 딴짓을 하면 마지막 차을 놓치게 된다. 부천역에 내려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야 했다. 버스 막차시간까지 지키려면 이동하는 발걸음에 여유 따위는 없었다. 주말은 주중에 밀린 회사업무를 위해 출근했다. 공부하고 싶어서 야간대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공부가 목적인지 체력단련을 위해 학교까지 달리는 게 목적인지 구분이 안 되는 생활이었다. 5월의 봄날, 밤 12시가 거의 다 돼서 집에 도착했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다.


아빠는 가끔 병증이 심해지면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갔고 며칠 동안 치료를 받곤 했다. 이전과 같은 일상인줄 알았는데 분위기가 심각했다. '큰일이 났구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런데 실상을 알고 나서 더욱 충격을 받았다. 심해지는 통증으로 고통스러웠던 아버지가 총으로 자신을 쏘았다. 사냥총은 총구가 길고 스스로 자신몸을  쏘기에는 부적절했다. 조준이 비껴 났고 총알은 배를 관통했다. 사냥총이 집에 있었던 게 잘못일까? 환자의 잘못된 판단이 문제일까? 병마와 안녕을 고하고 싶었던 아버지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 병원비가 무지막지하게 청구됐다. 의료보험조차 적용이 안 돼서 치료비가 2천만 원이 넘는다고 했다. 1996년에 2천만 원은 2024년에 2천만 원과는 다른 가치였다. 돈마련을 해야 하는 주체는 우리 집의 막내인 내가 당첨됐다.


나는 명색이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었다.  20살이 안되었지만 대기업을 다닌다는 이유로 신용대출이 가능했다. 회사 내에 대출제도는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연 1%짜리 이자, 한 가지는 연 15%짜리 이자였다. 연 1%짜리 이자는 은행예금이자보다 저렴해서 직원들에게는 꿀 같은  큰 혜택이었다. 다만 특혜를 받으려면 반드시 기혼자라는 신분이어야 했다. 나는 그때 아무하고라도 결혼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대상을 찾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병원비를 안내면 아버지는 볼모가 되어 퇴원이 허락되지 않았다. 병원비만큼 대출신청을 했다. 나에게 빚이 생겼다. 아버지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대출 후 급여일이 어김없이 도래했다. 이자가 원천징수되고 나온 급여는 참담하게 작았다. 더구나 당시 야간대학교등록금도 작은언니가 신용카드로 마련한 돈을 변통해 주었기에 6개월 동안 나눠서 갚아나가고 있었다. 회사에서 받은 대출금 2천만 원 중 원금은 1원도 지 못하고 이자만 납부했다. 월급을 받았지만 집에 드릴돈이 없었다. 그즈음 생에 첫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대학교 2학기가 다가왔다. 등록금 낼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공부에 대한 열망을 뒤로한 채 휴학계를 냈다. 대학교정문에 높고 높은 계단을 내려오며 학교에서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와는 다른 고민을 하는 학교친구들의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철없는 고뇌가 한없이 부러웠다. 다음날 출근하는데 발걸음이 가벼웠다. 앞으로는 회사에서 눈치볼일이 없을 것이다. 회사에서 내 몫의 일을 잘하고 인정받고 다니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업무능력을 키우며 1년이 지났다. 97년 뜨거웠던 여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97년 겨울, 안양지점 내 여직원 중 나만 부천에서 원거리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 아까워서 부천이나 인천으로 발령이 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용기를 내서 인사과선배님께 메일을 보냈다. 인사과 선배님은 내가 대학교를 포기한 걸 알게 되었고 부천으로 발령을 내주셨다. 부천에서의 총무생활은 그야말로 최고로 인정받으며 좋은 성과를 내며 지냈다. 즐겁고 재밌는 1년이 좋은 인연을 맺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빚은 2천만 원 원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98년 직장에서 명퇴붐이 일어났다. 명퇴는 IMF이후 꾸준하게 지속됐다. 그러나 나는 대상자도 아닐뿐더러 대출금 때문에 명퇴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후 보상금이 점차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출원금을 갚기에는 부족했다.


빚은 오랜 시간 동안 내 몸 위에서 무겁게 짓누르는 바위로 인식됐다. 답답한 마음은 자유를 꿈꾸는 마음을 키웠다. 명예퇴직조건은 퇴직금과 보상금이 꽤 커져있었다. 그런데도 돈이 부족했다. 그때 엄마에게 상의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부족한 돈 500만 원을 마련해 주신다고 했다. 희망의 불빛은 커지고 자유를 꿈꾸며 비상하기 위해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빚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환호를 지르며 명예퇴직신청서에 이름을 올렸다. 이미 마감이 된 명단에 내 이름을 넣기 위해 장문의 사내메일을 인사담당선배님께 보냈다. 선배님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오셨던 분으로 입사에서 퇴사까지 내내 나에게 큰 은인이셨다.


명퇴가 확정되고 퇴직했다. 그리고 명퇴보상금으로 빚을 갚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철석같이 믿고 있던 엄마가 돌연 돈이 없다고 했다. 퇴직과 동시에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 처했다. 연체가 뜨고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마지막보루였던 우리 사주까지 처분했다. 3년 후 우리 사주는 10배가 올랐다. 당시 우리 사주는 imf여파로 전부처분해도 200만 원 정도였다. 결국 연체가 됐다.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처음부터 안된다고 했으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친구를 만나서 한바탕 눈물바람을 쏟아냈다. 친구심이 돈을 빌려주었다.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명퇴를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친구에게 개인빚이 생겼다. 2천만 원의 감옥에서 탈출했지만 300만 원이라는 사채(개인빚)의 족쇄를 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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