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일을 할 때도 3년, 5년, 10년이면 각기 다른 개념의 경력과 숙련됨을 짐작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의무교육을 받는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에 인간이 세상밖으로 나아가 사회 속에서 살아갈 지식이 들어있다. 그런데 꼭 필요한 공부는 빠져있는 것 같다. 인간관계, 돈에 대한 공부는 인생에 중요한 부분인데 왜 교육에서 배제한 것일까? 사회 속에 나와서 나의 부족을 느꼈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다양한 경험과 시간이 필요했다. 불혹을 지나서 이제 좀 알 때도 됐는데 늘 부족함만 알게 된다. 그러니 배우고 익히는 건 삶의 일부가 된다.
다행히 요즘은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의지만 있다면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손바닥만 한 핸드폰 하나에 세상의 지식이 넘쳐난다. 어떤 분야에 알고 싶다면 검색하고 익히는 시간을 내면 된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 하루 24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지는 평등한 시간이다. 24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는 각 개인이 선택한다. 시간이 없어서 건강을 못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일이 바쁘고 몸이 피곤하다고 운동을 게을리할 때마다 나에게 함부로 하는 건 세상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임을 깨닫는다.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라도 꾸준히 해야겠다.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건강한 정신과 신체라는 걸 지금 글을 쓰며 나에게 또 각인한다.
23살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인생에 일생일대의 선택이란 걸 했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잘 살아보고 싶었다. 가정을 꾸리려면 공간이 필요했는데 갈 곳이 여의치 않았다. 친정집에 기거할 순 없었다. 작은언니가 작은방에 살림을 살고 있기도 했지만 엄마와 계속 한식구로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집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빚의 굴레를 만들어주는 부모님에 대한 거거움도 있었다. 언니, 오빠들을 보고 알게 되었다. 결혼만이 분가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집을 얻어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19살부터 4년 넘게 돈을 벌었지만 모은 돈은 모두 엄마에게 드렸다. 심지어 빚도 있었다. 회사에서 낸 빚 2천만 원은 명퇴를 하며 갚았지만 개인빚 300만 원이 남아있었다.
갈 곳을 물색하다가 도저히 돈도 없고 방법이 없어서 남자친구의 집으로 들어갔다. 임신 8개월 차 일 때다. 집으로 들어가면서 혼인신고도 했다. 그곳에서 한 달 정도 있었다. 남편과 남편의 형이 총각 때 돈을 모아 시어머니 명의의 빌라집을 샀다. 그리고 형이 결혼을 해서 형수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시간 동안 나는 마치 내가 쥐처럼 느껴졌다. 사방팔방 고양이가 밖에서 지키고 있어서 문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쥐새끼. 가장 무서운 고양이가 형님(남편의 형의 아내)이었고 그다음 무서운 게 남편의 형, 시어머님 순이었다. 무서운 고양이 소굴을 나올 수 있었던 건 큰언니 덕분이었다.
계라는 걸 처음 참여했다. 큰언니가 계원이라서 늦게 들어온 나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첫 계를 탈 수 있는 기회는 아무한테 주는 게 아니라고 들었다. 큰언니가 보증을 서면서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곗돈으로 500만 원을 탔다. 첫 달치 곗돈 25만 원을 내고 바로 500만 원을 받기로 했다. 곗돈이 나오는 날을 계산하며 미리 집을 구하러 다녔다. 적은 돈으로 여러 집을 보고 또 봤다. 그런데 월세라는 개념이 무서웠다. 매달 고정비를 내야 한다는 게 돈이 없어지는 개념이라서 월세금액이 아까웠다. 부족한 돈으로 집을 구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개념이 있다. 전세, 그리고 전세자금 대출. 무주택자에게 전세보증금의 70%까지 대출이 된다고 했다.
내가 바란 건 단 하나였다. '방 한 칸만 있어도 좋겠다.' 아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공간. 나만의 공간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출이율이 높은 편이 아니었고 상대적으로 월세보다 돈을 아낄 수 있었다. 월세를 이자로 환산한 것에 비해 전세이율이 저렴했다. 전세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원리금 금액을 내야 해서 30만 원보다 더 많은 돈의 지출이 생겼만 원금을 갚아나가기에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순수하게 이자로만 생각하면 월세 30만 원 보다 적은 이자가 전세자금대출에 대한 이자로 책정됐다. 돈 만원도 귀할 때라서 몇만 원 아낀다는 게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만삭이 된 몸으로 은행을 여기저기 다니며 이율과 혜택을 비교했다.
2001년에 처음으로 얻은 나만의 공간인 집은 전세보증금이 1300만 원이었다. 500만 원 곗돈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대출을 받았다. 경기도 부천은 서울 인근이라 전세가격이 높은 편이라서 내가 얻은 집이 그나마 저렴한 집이었다. 방한칸의 집을 온전히 내 공간으로 얻었다는 생각에 남 부러울 게 없고 뿌듯하기만 했다. 집으로 이사 들어오니 막상 없는 게 투성이었다. 밥그릇, 냄비, 숟가락 젓가락부터 식기도구, 전자제품등 친정식구들이 품앗이로 사주거나 있는 걸 나눠주었다. 집이 제법 생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채워졌다.
남들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나에겐 소중하고 귀한 집이었다. 그러나 실제 그 집은 만족함을 느낀 곳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절대적으로 집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준 집이기도 하다. 단칸방이었고 부엌과 화장실이 다소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었다. 살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원래 2층엔 1 가구만 살 수 있는 집 하나가 전부였다. 총 2층으로 된 다가구로 1층은 단칸방이 2개 있고 2층은 원래 주인세대 한 가구가 사는 집이었다. 내가 얻은 집은 원래는 별도의 세대를 줄 수 있는 집이 아니고 2층 주인세대의 끝방이었다. 그런데 세를 더 놓기 위해 개조한 집이었다. 급조한 공간으로 방에 부엌으로 나가는 문을 새로 달아놓았고 화장실도 증축했다. 방한칸에 연결된 문이 두 개가 있었다. 안채로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한쪽문을 막기 위해 장롱을 구매했고 안채로 가는 문을 막았다. 부엌과 화장실을 추후에 개조한 집이라서 난방은 방 한 칸만 됐다. 단칸방에 창문이 크게 설치되어 있었는데 새시로 된 게 아니라 나무창틀이었고 창문방향이 북향이었다.
6월에 아이를 낳고 그 집에서 만 2년을 살았다. 겨울에는 화장실이나 부엌에서 아이를 씻길 수 없어서 방에 물대야를 받아서 아이를 씻겼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집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해졌다. 방 한 칸이면 충분했던 마음은 욕심을 키워 최소 방 두 칸의 집으로 이사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북향의 집에 아이옷을 말리면서 남향집에 대한 욕구도 커졌다.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집으로 이사길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생각하고 알아봤다. 소득과 지출을 감안할 때 이사는 먼 곳에 있는 잡히지 않는 오아시스 같았다. 현실적인 대안을 고민하면서 미래를 함께 설계했다. 방한칸이란 개념에서 집이란 개념이 생기는 시기였다. 안전한 집, 따뜻한 집, 가치가 있는 집에 대한 열망이 계속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