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하늘 Mar 07. 2024

6) 새소리로 아침을 맞이하는 84m2

집의 의미

6) 새소리로 아침을 맞이하는 84m2


친정 가족들과 확실한 독립, 분리를 위한 방법으로 결혼만큼 간단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한 식구가 된 가족과 순조롭게 분가를 할 순 없었을까? 세 대구성원중 성인만이라도 생활비를 공통으로 부담했다면 분가가 쉬웠을지도 모른다. 가족 일곱 명 중 성인은 넷, 엄마, 오빠, 작은언니, 나. 미성년은 조카 둘, 내 아들. 이미 육십이 넘고 큰 병으로 한번 몸이 상한 엄마는 열외로 치더라도 성인이 셋이었다. 작은언니는 딸린 식구 없이 혼자였지만 오빠에겐 자녀 둘도 있었다. 그러나 오빠는 일을 할 때보다 안 할 때가 더 많았다. 분명히 집에 가장 포지션은 나 한 명이었다. 생활비의 대부분을 감당한 건 당연히 나 혼자다. 작은언니 아이들이 같이 살 때는 작은언니도 상당 부분 식비를 부담했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1년 6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재혼을 하기로 마음먹은 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였을까? 친정으로부터 완전한 분리와 독립이 목적이었을까? 삼산동으로 나 홀로 분가했을 때 가족과 분리되어 내 공간에 있는 게 좋았다. 그러나 아들과 떨어져 있는 건 죄스러웠다.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은 가슴 한편에 불안과 미안함이라는 고름을 채우고 있었다. 제자식 하나 못 챙기면서 부모 형제 조카를 챙긴다는 게 모순 같았다. 부모로서의 책임에서 도망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반면 자식으로서의 책임은 벗어나고 싶었다.  마치 자식을 챙기기 위해 부모형제를 등한시하는 건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자위했다. 실은 그저 가족을 짐으로 여겼을 뿐이다. 내리사랑이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가족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정당성을 마련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혼 가정이 아닌 남편이 있는 가정이 필요해. 재혼을 하려고 해도 지금 이대로는 안돼. 생활비를 계속 이중으로 부담하는 건 맞지 않아."


이기적으로 새롭게 마련될 내 가족만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기심은 누군가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걸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작은언니. 늘 미안하고 고마운 언니에게 내가 감당했던 부담감을 고스란히 넘겨줘야 했다. 알고 있었다. 오빠는 어차피 외면할 것이다. 오빠는 자기 용돈벌이도 못해서 엄마에게 담뱃값이며 용돈을 받아서 쓰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언니는 언니대로 알아서 살길을 마련하길 바랐다. 결국 나는 이기심을 포장했다. '나 자신에 집중하고 짐은 좀 내려놓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자' 시작을 위한 결합이 아닌 도망가기 위한 재혼을 감행했다.


경제적인 자립과 정리를 위해 가족들과 협의(?)했다. "아들은 당연히 나와 살 거고 생활비를 이중으로 부담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24평 아파트에 그대로 친정식구들이 살아도 좋다고 말했다. 다만 생활비 지원은 끊겠다고 말했다. 선택은 언니에게 하라고 선택권을 주듯 선심 썼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그만큼의 생활비를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다섯 명으로 줄더라도 기본적으로 생활비가 많이 들었다. 집 대출이자는 내가 내더라도 생활비와 세금도 만만치 않았다. 소득이 많다면 문제없겠지만 소득도 크지 않았다. 작은언니는 생활비 감당을 모두 하면서 살기는 어렵다고 말하며 이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나 또한 내 집이었지만 그 집으로 들어가서 사는 건 부담스러웠다. 왠지 가족들을 내쫓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마음도 불편했다. 그 집이 어떤 집인가? 집에 대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렇게도 소망했던 내 집, 아파트. 임신해서 갈곳 없이 떠돌며 얼마나 집에 굶주렸는가? 단칸방에 살 때 하루가 멀다 하며 주택공사 홈페이지를 확인하고 계획공고부터 계약까지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정식 당첨도 아닌 추가합격이 되어 간신히 마련했다. 그사이 시어머니가 쓰러졌고 건축완공까지 3년을 기다렸다. 아들, 남편과 입성했지만 남편을 가족에서 손절했다. 이혼하면서 남편명의로 했던 임대아파트 명의를 내 명의로 바꾸고 5년이 지나서 내 소유가 된 24평 아파트. 그 집을 매도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집관리가 엉망이라서 집이 잘 나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도배를 다시 하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작은언니에게 두 번째 선택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맘때 나는 경매받은 집이 있었다. 22평 아파트로 부천역곡에 있는 5층짜리 구옥아파트였다. 구옥으로 이사 갈경우 담보 대출 이자는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작은언니의 결정에 따라 24평 아파트에 살던 친정 가족이 이사를 했다. 단 세평차이지만 집 크기가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그리고 구옥이라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친정식구들이 짐을 옮기고 나에게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속상했지만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짐이 자리를 못 잡고 거실에 쌓여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 두 칸에 모두가 함께 살려고 하니 거실에 이불을 깔아야 했다. 나는 친정식구들의 희생을 외면하며 한가족에서 각자의 가족으로 독립했다.


24평 아파트로 나도 이사를 갔다. 몇 개월 정도 그 집에 더 살다가 집을 내놨다. 집에 담배냄새가 빠지고 정리 정돈하며 관리하자 집이 쉽게 나갔다. 그즈음 나는 싸이드잡으로 음식점을 낸 상태였다. 부천범박동에 빈 상가를 얻어 가게를 오픈했다. 고등학교 친구 심과 영 나 셋이 공동투자로 창업했다. 당시 유행의 초기였던 명태조림음식점이었다. 가게는 차차 자리를 잡고 맛집으로 입소문이 나고 있었다. 낮에 보험일이 끝나면 5시 반까지 음식점으로 갔다. 저녁장사부터 마감까지 내가 가게에 있었다. 이사할 곳을 자영업을 하는 가게 근처로 알아봤다. 역곡으로 이사 간 엄마의 집과도 좀 더 가까워질 테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중학생인 아들이 전학을 가야 한다는 게 단점이었는데 아들은 흔쾌히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세 식구가 84m2 아파트에 입성했다. 오빠아들(조카)이 곧 군대를 갈 예정이라서 우리 집에 와서 지내라고 해놨다. 32평 아파트는 뭔가 달라 보였다. 24평과 똑같이 방세개 화장실 두 칸인데 방과 거실 크기가 확실하게 차이가 났다. 널찍한 방과 거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부천에서는 흔치 않은 산을 끼고 있어서 공기가 청량했다. 왜 그렇게 예로부터 배산임수 집을 최고로 여겼는지 알 것 같았다. 물은 없더라고 산만으로도 집이 아늑하고 공기와 냄새가 달랐다.


이사 후 크게 달라진 게 몇 가지가 있다. 잘 때 자주 가위에 눌렸는데 단잠을 자게 됐다. 두통이 없어졌다. 그리고 아침마다 새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범박동은 부천 전 지역 평균 온도보다 2도가량이 낮았다. 공기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실감했다. 가게를 오가는 것도 수월해졌다. 음식점에서 집까지 거리가 5분 정도였다. 아들에게 밥을 해주는 주체가 내가 되었다. 엄마랑 같이 살 때는 엄마가 음식을 해주셨기 때문에 내가 음식을 하는 건 특별한 날만 하곤 했다. 아들이 중학생이 되니 확실히 청소년이라 조심스러웠다. 워낙 이른 나이 9살 때 사춘기를 보냈기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아들은 중학생 때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약속을 지켰다. 학교 학원 집 다람쥐쳇바퀴 같은 생활이 되었다. 중학교1학년 첫 시험 때 교과목 시험성적 중 영어점수가 3점이었다. 10점 만점이 아니라 100점 만점 시험이었다. 아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한참 고민 끝에 물어봤다. "아들, 혹시 시험문제 풀었니?" "엉" 아들이 대답했다. "그렇구나, 한 번호로 찍었으면 점수는 더 나왔겠지만, 자세가 좋구나." ㅎㅎㅎ 며칠 더 고민 끝에 학원을 옮겼다. 그리고 중학생 때는 반드시 공부하겠다고 약속했던 내용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학원을 옮긴 건 잘한 일이었다. 성적이 급격하게 올랐다.


중학교 3학년이 된 아들의 성적은 꽤 괜찮은 수준까지 올라왔다. 왜 그렇게 부모들이 사교육에 열성을 다하는지 알 것 같았다. 수학, 과학은 확실히 성적개선이 빨랐다. 국어와 영어는 다소 더디게 개선됐지만 성적이 꾸준하게 올라서 평타를 유지했다. 그런데 아들이 불현 대학은 안 가겠다고 선언했다. 고등학교도 특성화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했다. 아들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그래도 한 번은 만류했다. 아들은 완고했다. 결국 아들은 특성화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온수역 근처라서 집에서 아주 멀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84m 2의 집에 이사할 때 집 명의를 남편 명의로 했었다. 재혼이었고 결혼 전에 오롯이 내가 모은 돈이라서 재산분할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혼을 결심했을 때 집에서 큰소리가 나는 게 싫어서 커피숍에서 대화했다. 집은 좋은 기운을 주는 곳으로 싸우거나 안 좋은 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이혼 후 집명의를 바꿔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취득세를 또 낸다는 것도 불편했다. 그 과정에 남편이 재산 분할에 대해 언급했다. 집이 오른 것에 대해서라도 반을 내놔야 하지 않냐는 말이었다.


돈 앞에서 사람들이 과도한 욕심을 내는 걸 경험하곤 한다. 그런 것에 화가 나진 않는다. 다만 사람을 믿었던 마음이 허전해질 뿐이다. 그래도 이해시키고 차분하게 설명한다. 필요하다면 법률자료도 보내준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래. 사람들은 자기편한대로 생각한다." 그러니 늘 모든 걸 처음부터 기준대로 일처리를 해둔다. 예를 들면 최후에 법으로 하더라도 권리를 명확히 하기 위해 모든 걸 계좌이체로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5) 나만의 공간 49m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