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혁 Jun 02. 2024

이민진, '파친코'

소속되기 위한 출구 없는 투쟁의 이야기

인간은 ‘소속감’이 필요한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니 자신은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지만, 그 사회가 자신을 배척한다는 것을 느낄 때 인간은 한없이 무력해진다. 그럼에도 소속감이라는 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 중 하나이기에 소속되지 못한 인간은 끊임없이 소속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 집단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기도 하고, 그들 집단이 높게 평가하는 가치를 본인이 가지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그들처럼 말하고 그들처럼 생각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 집단에 포함되는 것, 그것이 사실 어떠한 노력을 해도 불가능한 것이라면 배척당한 사람들은 그저 끝나지 않는 증명과 투쟁, 출구 없는 싸움을 하게 된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과 6.25 전쟁이라는 혼돈의 시기에 그 끊임없는 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살게 된 사람들, 그들의 2세, 3세, 또 그들의 자녀 세대들, 이들은 자이니치라고 불리며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을 의미한다. 사실 처음 건너간 이들의 자녀 세대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일본인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이 ‘모국’이라고 생각하던 조선 사회에서도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며 어느 사회에도 속할 수 없었다. 소설 ‘파친코’는 수 세대에 걸친 이들의 투쟁과, 그럼에도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처음 일본으로 떠나게 된 선자, 선자의 자식들인 노아와 모자수, 모자수의 아들인 솔로몬까지 그들은 각자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일본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노력했다. 선자는 어려운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수많은 어려움을 견뎌냈다. 그렇게 자란 아들 노아는 수없이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견디고 공부해서 일본인도 가기 어렵다는 와세다대학교에 입학한다. 일본 사회에서 인정받는 대학에 입학하지만 자신의 출생과 삶에서 지워낼 수 없는 조선인의 흔적, 특히 스스로 ‘선량한 조선인’이 되려고 노력했던 만큼 자신이 피하고 싶었던 ‘불량한 조선인’의 흔적이 자신에게 남에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좌절한다.


오히려 괴롭힘을 참지 않고 일찌감치 학교를 나와 파친코장에서 일하며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였던 모자수는 크게 좌절하지 않고 일본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게 된다. 물론, 경제적으로 아무리 성공해도 얻을 수 없었던 일본 사회에서의 소속감을 모자수는 자신의 아이인 솔로몬이 일본식 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게 하는 것으로서 얻으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솔로몬마저 조선인이라는 딱지로 벽에 부딪히고 파친코로 돌아간다.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던 재일 조선인들에게 파친코는 마치 그들만의 사회이기도 한 것처럼 그려진다.


이들의 싸움에는 출구가 없다. 일본 사회에서 아무리 성공하더라도 조선인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고, 자녀 세대는 그 허전한 소속감을 채우기 위해 부모 세대의 국가, 자신의 ‘모국’을 찾아가 보지만 모국의 언어를 잘하지 못하고, 그들의 모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본인인 것처럼 보이는 그들은 거기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남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얻는 것을 그들은 수 세대에 걸쳐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했지만 얻지 못했다.


물론 이들을 상처가 많은 우리 근현대사의 피해자들이라고 좁혀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를 떠나 이민자들과 그들의 소속감에 대한 문제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지구 어딘가에는 개인이나 한 가족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슬픈 역사가 반복되고 있고, 그 역사 안에서 무력한 사람들은 이민자가 되고, 이방인이 되어 떠돈다. 그들은 자신을 물리적으로 받아들여준 그곳에 보답하고, 또 소속되고 싶은 마음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삶을 살아가고 헌신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너무나도 쉽게 좌절되기도 한다.


파친코가 그리는 것은 단순히 일본 사회가 아니다. 그 못지않게 우리 사회는 닫혀 있다. 우리는 여전히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외국인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그 폐쇄성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자이니치의 삶을 안타까워하는 우리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이니치들에게 그런 삶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소설에서 그들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그들만의 사회인 파친코로 돌아간다. 과연, 지금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다른 미래를 줄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존 윌리엄스, '스토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