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을 다루는 방법
물질의 영역, 그리고 정신의 영역에서의 불확실성에 대해
신과 이성의 시대를 거쳐 우리는 뚜렷한 정답이 없는 시대에 놓여 있다. 기존 가치의 해체를 시도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조,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실존주의 철학의 등장 또한 정답의 부재와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인간 정신을 기초로 하는 영역에서의 이러한 혼란, 정답의 부재가 충분히 해소되기도 전에 기술적인 영역에서 인간은 디지털 시대라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들 스스로 열어젖힌 디지털로의 전환은 세상 모든 것을 0과 1이라는 가장 간단한 숫자로 환원하기 시작했으며, 숫자로 환원된 데이터를 통해 수많은 기술, 기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디지털을 필두로 한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지지 기반 부재를 잊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 더 이상 인류는 정신적인 영역에서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노력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기술적인 영역의 발전으로 이 세계의 비밀을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이 이 세계의 비밀을 모두 파헤쳐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해결책 부재가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과학기술 만능주의는 급속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어느 순간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적 영역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기술 발전은 어느 순간 인류에게 해가 되는 일을 만들어냈다. 물론 과학은 순수했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과학이 대중화되었을 때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발견에 대한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것은 원자폭탄의 개발로 이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해칠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디지털 기술은 우리를 편리하게 해 주고 있지만 우리가 디지털 데이터인 0과 1을 그 자체로 읽을 수 없는 사이에 누군가 우리의 정보를 빼내거나 공공연히 공개되는 것에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소셜 네트워크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 더 많은 사람들이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는 미래를 이야기하며 개발되었지만 알고리즘에 갇힌 사람들끼리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그 외 집단의 사람들은 더 강하게 배척하도록 만드는 기술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정신의 영역에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는 불안함을 잠시 마취 시간 과학 기술의 발달은 어느 순간 한계를 드러냈다. 기술을 통해 인간이 원한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기도 하고, 정신의 문제는 마취된 것일 뿐 시시각각 우리에게 찾아와 공허함을 남겼다. 핵무기는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고, 소셜 네트워크는 인간이 가진 고독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정신세계에 놓은 마취는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고 인류는 다시 지지기반이 없는 인간 정신 위에서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본질적 불안함에 다시 직면한 그들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정신적인 영역에서 무엇인가 하나를 선택해서 믿는 일. 그것이 무엇이든 한 가지 가치를 선택해서 정답이라고 선언하고 믿게 된다면 그것이 관련된 영역에서 그들의 불안함은 사라진다. 과거에 인간이 신과 이성의 시대를 거치며 얻은 방법, 즉 정답을 택하는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정답의 시대는 무너졌지만, 그 후에도 결국 이렇다 할 정신의 해결책을 찾지 못한 인간들은 다시 정답의 시대로 회귀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불안함을 잠재우려 하는 것이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들이 선택한 정답이 다양해진 것이다. 과거에 정답이었던 신, 그리고 인간 이성은 이제 유일한 해가 될 수 없다. 공통의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답이 필요한 사람들은 각자의 답을 세웠다. 누군가에게는 경제가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답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평등이 유일한 해답이 되었고, 안보, 자연, 기술 등과 같이 자신이 선택한 하나의 가치를 통해 모든 것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철학을 마련하지 못해서 일어난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다원주의라는 가치의 터전 아래에 교묘히 숨어 들어가 마치 각자가 자신의 답을 하나씩 마련하고 물러서지 않는 이 상황이 옳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다원주의는 인간의 다름을 이해하고 다양한 가치가 상충하는 상황 자체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각자 자신의 유일신이 있는 것과 같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다양한 가치가 존재할 뿐 그것들이 서로 상충하는 상황을 누구도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원주의의 이름 아래에 숨어 있을 뿐, 다원주의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철학은 아니다.
그러니 아직 정신의 영역에서 이 시대를 소화할 수 있는 철학은 없다. 그 해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물질 영역과 정신 영역은 서로에게 빚을 진 적이 많다. 정신 영역의 발전을 위해서 물질 영역의 지원이 필요하기도 했고, 정신 영역의 발전에서 얻은 것을 토대로 물질 영역이 발전하기도 했다. 특히, 물질의 영역이 정신의 영역에 빚을 진 대표적인 시기가 바로 14세기부터 시작된 르네상스이다. 이때 정싱적인 영역에서 한 가지 거대한 전환이 이루어졌다. 인간 이성이 철학의 정점에 자리 잡은 것이다.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신의 영역에서 자신들의 영역으로 보다 많은 것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때 빠른 속도로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신 중심의 가치관에 적합하던 플라톤 철학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이면서 르네상스가 부흥했고, 인간 이성을 필두로 한 실용적인 철학이 과학과 기술에 불을 붙인 것이다. 물론 그때는 아직 신 중심의 가치관도 여전히 강했기 때문에 어떤 과학의 영역에서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신의 세상을 바꾸려 한 죄로 죽기도 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정신적 기반에 과학의 발전이 빚을 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정신의 영역과 물질의 영역은 마치 자신들이 정반합의 정, 반인 것처럼 서로에게 빚을 지고 도움을 주며 새로운 철학,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왔다.
이제는 정신의 영역이 물질의 영역에 빚을 질 차례이다.
오늘날 정신의 영역을 지탱해 줄 새로운 철학을 찾으려 할 때에도 우리는 무에서 그것을 창조할 필요가 없다. 아니, 무에서 창조할 수는 없다. 분명히 우리 인류는 지금껏 역사의 과정을 이행해오면서 그것이 진보의 역사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지언정 수많은 경험을 통해 쌓아 온 것이 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아가는 한 발자국은 지금껏 쌓아온 것에서 충분히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영감을 주는 대상이 이번에는 과학, 그리고 기술인 것이다. 정신적 영역에서 우리가 혼란을 겪는 이유는 이 시대가 불확실성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하나의 가치가 정답이 될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이 시대에 어울리는 보편적인 사상 체계가 있어야 우리가 느끼는 본질적인 불안과 인간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오늘날의 시대이다. 정신의 영역이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헤매는 동안 물질의 영역에서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불확실성을 다루는 학문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불확실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구분하기 시작했다. 마치 칸트가 순수 이성이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을 치밀하게 연구해 그의 책 '순수이성비판'을 쓴 것처럼 디지털 시대 기술은 '불확실성 비판'을 해 온 것이다. 그들이 불확실성을 비판하며 만들어 낸 학문이 바로 '확률론' 그리고 거기서 이어진 '통계학'이다.
통계의 기반이 되는 확률은 그 자체로 불확실성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이 각각 1/2이라는 말은 동전을 던졌을 때의 결과를 우리가 미리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앞면이 될 수도 있고, 뒷면이 될 수도 있다. 결과가 불확실성을 내포하는 이런 상황에서 확률론은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확률 이론은 도박에 대한 논의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페르마와 파스칼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발전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확률론은 오늘날 수학에 포함되어 있지만 수학의 굵직한 가닥 중에서도 가장 늦게 발달이 이루어진 영역에 속한다. 이렇게 확률론의 발달 시점이 늦었던 것 또한 불확실성을 다룰 생각이 없었던 우리 정신의 틀에 기인한다. 정신의 영역에서 확실한 답이 존재했기 때문에 불확실성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시기에는 자연 속에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간이 탐구할 필요가 없었다. 과거에도 동전을 던지면 앞면이나 뒷면이라는 결과가 우연에 의해 결정되기는 했지만 그 우연은 인간이 고민할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연은 신의 영역이었고, 인간 이성으로 결정되지 않는 영역이기에 소외되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 가면서 불확실성의 세계에도 접근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때 인간이 불확실성에 대해 접근한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확률에 대한 호기심, 도박과 연관된 오락적 요소에 의해 조금씩 불확실한 것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앞면이 나올 확률이 1/2라고 할 때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기댓값이나 분산, 표준편차와 같은 대표적인 통계량이 어떤 것을 알려줄 수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불확실성이 주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확률, 그리고 통계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개념은 직관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아서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가장 단순하게는 우리가 확률을 공부할 때 처음 배우는 통계량인 기댓값 개념조차도 단순해 보이지만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꽝 아니면 당첨인 복권에 대해 기댓값이 1000원이라고 할 때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당첨금의 기댓값이 1000원인 상황은 복권을 사서 1000원을 기대하라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복권을 샀으면 결과는 꽝 아니면 당첨뿐이다. 1000원이라는 기댓값은 동일한 복권을 아주 많이 샀을 때 결과의 평균값이 수렴해가는 지점을 의미하며, 한 장의 복권에 대해서는 그러한 결과는 기대할 수 없다. 단순해 보이는 기댓값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변동성을 나타내는 개념들과 표본에서 발생하는 오차, 그 외에 수많은 확률 분포가 등장함에 따라 확률 이론은 전혀 직관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확률 이론을 정립해 간 수학자들은 이러한 모호성을 정확하게 제단해 어디까지 옳고 어디까지는 옳다고 할 수 없는지를 명확하게 잘라가기 시작했다.
확률 이론이 현실적인 문제에 접목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통계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통계학은 사람들의 생활과 사망에 이르기까지 인구와 관련된 많은 영역에서 축적된 데이터에서 결과를 도출하기 시작했다. 인구 통계에서 만들어진 결과는 연금이나 생명보험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골턴은 통계학에서 오늘날까지도 강력하게 사용되는 가설 검정 이론의 토대를 마련했다. 인간은 이제 불확실한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거기서 '유의미함'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반복되는 실험 환경에서 어느 정도의 결과를 얻었을 때 내가 실험하려 했던 효과가 유의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신약이 모든 사람에게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의 사람에게 효과를 발휘했을 때 신약의 효과가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주관적인 기준이 들어가긴 하지만 본인들이 설정한 주관적인 기준 내에서 불확실성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약뿐 아니라 불확실한 모든 상황에서 통계 이론은 가설 검정을 통해 유의한 이론과 그렇지 못한 이론을 분류해가기 시작했다. 통계학이 갖춰지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유의미한 결과와 그렇지 못한 결과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말한 '불확실성 비판'을 해낸 것이다.
그렇게 확률 이론에서 시작해서 발전한 통계학은 실험의 유의성을 판단하기 위한 도구로만 남아 있지 않았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통계학은 자신들의 사용처에 대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통계학과 디지털이 합쳐지면서 예측과 추정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0과 1로 표시되는 디지털 데이터는 그 자체로 불확실성을 수량으로 표현하게 된다. 단순하게 봐서 0이 실패, 1이 성공이라고 한다면 디지털 데이터는 성공과 실패의 확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축적된 데이터를 통해서 그다음에 나올 데이터가 성공을 의미하게 될지 실패를 의미하게 될지 알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 그들 앞에 놓였고, 그들은 그에 대한 통계적 방법론을 마련했다. 쌓여 있는 데이터는 통계적 방법론을 거쳐 확률 모형을 만들어내고 확률 모형은 그다음에 나올 결과를 확률적으로 예측한다.
물론 확률적으로 예측하는 것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놓여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거기 있었다. 그들은 미래를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아주 거대한 변화였다. 지금까지 인간은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예측을 꺼려 왔다. 내일 비가 올 것인가, 혹은 오지 않을 것인가는 그들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확실성의 영역이 될 수 없다. 무조건 온다, 혹은 무조건 오지 않는다와 같은 답은 없다. 올 확률과 오지 않을 확률을 조금 더 정확하게 추정할 뿐이지 하나의 확률이 100%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그전까지 인류가 그 영역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영역으로 생각하게 했다. 신과 이성의 시대에서 확실성만을 다뤄 왔던 그들에게 아무리 고민해도 불확실성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영역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통계학은 불확실성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학문이었다. 결과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우리는 불확실성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이 수준의 불확실성 하에서는 결과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지, 그리고 결과를 더욱 정교하게 예측하기 위해서는 어떤 데이터가 필요한지와 같은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상황이 모두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확실성을 있는 그대로 다루기 시작한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영역을 엄청나게 확장시켰다. 그 결과는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기술들로 이어졌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머신러닝과 같은 기술은 모두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디지털 시대의 기술이다.
확률, 그리고 통계학을 받아들인 기술의 영역에서는 이렇게 불확실성 자체를 다루는 방법이 발전했다. 그리고 물질의 영역은 불확실성을 받아들여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게 되었다.
여전히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인간 정신의 영역은 고민을 거듭하고 있고, 잠시 마취되었을 뿐 다시 깨어나며 혼란을 겪고 있다. 인문, 철학, 사회, 정치와 같은 영역에서 그 혼란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이제는 물질이 영역이 나아간 한 발자국이 정신의 영역이 다음 발자국을 걷는데 도움을 줄 때가 된 것이다. 물론, 정신의 영역은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통계학을 자신들의 생각의 틀로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