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장소에 대한 이야기
동백꽃이 붉다. 12월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검붉은 동백은 반짝이고 두꺼운 잎사이로 단단하게 피었다. 붉은 동백꽃 옆에 ‘철거’ 글자도 붉다. 15도 경사로 기울어진 이끼 낀 시멘트 담벼락에 철거, 철거, 철거 글자가 끝없이 쓰여있다. 협박 같다. 철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협박, 사라지라는 협박. 철거, 철거, 철거, 붉은 스프레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철거를 그렸다. 철거, 철거, “너는 철거되지 않으면 안 돼. 너의 시간은 사라질 거야.” 철거.
현관문에는 “출입금지” 스티커가 붙었다. 이것도 붉다. ‘무단으로 침입하면 형법 제319조에 의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고 외치고 있다. 안 들어간다, 안 들어 가. 오래전에 도망치고 싶었고,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장소. 수치심과 그리움이 뒤섞인 장소, 아버지가 싫었고, 어머니가 부끄러웠던 장소. 어린 동생들을 두고 서울로 도망간 나의 심장, 그 심장의 자리를 외로움, 우울, 갈증으로 채웠던 시간들. 그 집이 이젠 영영 출입금지란다. 철거되는 집, 사라질 수치심, 잊힐 아버지의 고함소리, 버려질 엄마의 붉은색 홈드레스, 동생들의 고군분투.
나는 그곳에서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35년 전 떠나온 나의 집. 나의 수치. 그 자리에 다시 서서 매매계약을 하고, 수도요금을 내고, 도시가스 요금을 내고, 엄마의 낡은 냉장고를 싣고 떠난다. 철거될 집, 출입금지 당한 집. 이제 나의 집은 없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오랫동안 그리워했고, 그래서 끊임없이 길 위를 떠나 다녔던 나의 심장.
그 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버지 경조 씨와 어머니 영자 씨의 삶에 대해서. 우리가 울고 맞고 고함치고, 웃고 춤추고 마시던 그 장소에 대해서.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 오랜만입니다. 돌아왔습니다. 매주 정기적으로 뵐게요. 추운 겨울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다음 주는 입춘이랍니다. 입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