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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16. 2015

백두산 등척기(01)

간도(間島)의 역사


■  백두산 등척기(登陟記) - 간도(間島)의 역사


금차 乙未生 회갑기념 백두산 등정을 계획하며 여행지에 속해있는 지역들이 간도(間島)에 포함돼 있음을 알게 됐는데, 길림성의 북간도는 흑룡강 성의 하얼빈과 함께 귀에 익숙한 곳이다. 하지만 중국 동북내륙에 있는 많은 지역들이 왜 섬에 의미를 지닌 간도(間島)로 불렸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도는 서간도와 북간도(동간도)로 구분되는데, 통상 길림성 동남부지역인 북간도를 지칭하며 연길(延吉)이 있는 두만강북부 만주 땅을 말한다. 간도지역은 옛날 옥저를 거쳐 영토를 뻗어나간 고구려에 속해 있었으며 이후 발해 영토가 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에 걸쳐 간도 각지에 여진족이 흩어져 살았는데, 당시 여진족들은 조선왕에 조공을 바쳐왔고 조선조정은 그들이 생필품을 교역할 수 있도록 북관개시(北關開市)를 허용했다. 두만강과 북동쪽 해란강을 중심으로 산지가 발달한 북간도는 산림자원이 풍부했지만, 당시 유목과 수렵에 의존했던 여진족은 비옥한 지역으로 개척하지 못했다.


17세기 여진족 세력이 커지며 청 태조(1616년) 누루하치는 백두산일대를 여진족의 발상지인 성역으로 삼았다. 이후 병자호란 (1636년) 뒤에 청 태종은 백두산과 북쪽 간도지역을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선포하고 조청인(朝淸人) 모두 입주를 엄금하는 지역으로 삼았다.



이후 청과 조선 사이(間)에 놓인 섬(島)과 같은 땅이라 하여 간도(間島)라는 지명이 유래됐다 한다. 하지만 조선후기 우리농민들이 새로 개간한 땅이라며 간도(墾島)로 적었다고도 한다. 당시 백두산 산삼채취를 둘러싸고 양국 백성이 국경을 넘는 월경사가 빈번해지다보니 살인사건까지 발생해 양국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1712년(숙종 38) 청 성조(康熙帝)는 봉금지역 경계를 명백히 하고자 조선과의 국경선 획정교섭을 요청했고, 청국파견사 목극등(穆克登)과 조선 접반사(接伴使)는 양국경계 공동조사를 위한 회동 뒤 백두산 현지조사 끝에 정계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 분수령에 세운 것으로 명기하였다.


당시 청국은 토문강을 송화강의 상류로 보고, 간도경계 중 송화강 동쪽 지역인 북간도를 버려진 땅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정계비가 건립된 뒤 약 160년간은 간도 문제가 재 논의된바 없이 잘 지내왔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 철종 말부터 청의 봉금정책과 조선의 월경금지가 해이(解弛)해지고 함경도 백성들의 두만강 월경농사가 늘어나면서 국경문제가 다시 야기되었다.


두만강을 넘나들며 북간도에서 농사를 짓던 조선 백성들은 타락의 절정을 이룬 세도정치와 지방탐관의 수탈에 시달리자 아예 간도지로 주거를 옮기게 되었고, 관료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너머에 농경지를 개척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쇄환(刷還)을 종용했지만 삶의 근거를 잡은 백성들의 간도이주는 점차 확대돼 갔다.


1881년(고종 18) 청의 봉금정책이 해제되고 개혁을 착수하며 청인의 간도이주와 농경정책이 장려되자, 앞서 이주했던 조선농민과 뒤에 이주한 청인들 간에 분쟁으로 간도 영유권문제가 정치화 됐다. 1883년 양국은 백두산 계비를 재조사 했는데 비석의 “토문”을 놓고 조선과 청나라는 여전히 의견이 엇갈리며 별다른 해결을 찾지 못했다.



토문강의 해석을 놓고 조선은 만주 송화강의 한부분인 토문강이 국경선이기에 북간도가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고, 청은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해 국경합의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백두산 북쪽지역은 조선백성이 많이 이주해있어 현실적으로 조선영토로 묵인되고 있었다.


이후 1900년 대한제국은 행정적으로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편입하고, 1903년에는 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켜 세금징수를 하는 등 실질적인 행정권리을 행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는 1909년 청과 간도협약을 맺어 남만주의 안동(단둥) - 봉천(선양)간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국에 넘겨버렸다. 또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때 백두산정계비를 철거해 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을 전후해 항일운동 등 일제침략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다. 서간도의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는 독립운동 기지가 세워 졌었던 곳으로, 군사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가 설치됐고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돼 독립군지휘관을 양성함으로써 후일 청산리대첩에 주역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는 명동학교 등에 교육기관이 설립돼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며, 청장년의 독립군편성을 추진했었다.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일본 국경수비대를 교란시켰다. 1926년 간도지방에는 1만호의 중국인에 비해 조선인들이 무려 5만호를 넘어있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인들은 간도농토의 52%를 소유했고, 화룡과 연길지방에서는 72%를 소유했다 한다. 하지만 1945년 해방 후 중국공산당에 의해 점령되며 간도임시정부는 간도지명을 연길과 변방을 합친 연변(延邊)으로 바꾸었다. 1952년에는 연변 조선민족자치구 임시정부가 성립돼, 연길시를 비롯 5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현재 길림성은 연길(옌지), 도문(투먼), 혼춘(훈춘), 용정(룽징), 화룡(허룽), 돈화(둔화) 6개 市와 왕청(왕칭), 안도(안투) 2개 현이 있다. 현재 약 200만 인구 중 조선족은 80만(40%)으로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많은 조선족이 외지로 나가는데 반해 한족은 연변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고구려가 지배했던 우리의 광활한 만주 영토가 잊혀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아쉬움에 회한(悔恨)의 여운이 서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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