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해양탐사선이 독도 근해 배타적 경제수역에 대한 해양측량을 하겠다는 일방적인 계획에 한일 간의 긴장이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하던 2006년 4월 22일(토) 1박2일 대마도를 방문하게 되었다.
3월 8일자 대마도 부동산투자에 대한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농담 삼아 방문해보자 한 것이 불씨가 돼 동료직원들과 여행길에 나선 것이다. 당시 신문기사 주요내용은 일부 한국인이 대마도에 별장, 숙박업소, 골프장등 여행객 편의시설에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이 5~6년 안에 유명관광지로 부상하며 땅값이 오를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10년 전 평당 100여만 원이던 대마도 땅값이 경기침체로 10만원까지 떨어졌으며 관광객이 늘고 있어 높은 투자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2006.03.08 동아일보 기사
일본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더 가깝다는 대마도는 쯔시마 해협에서 제일 가까운 후쿠오카 현(縣)에서 147km인데, [거제도]에서 쯔시마 북단 히타카츠(比田勝) 항까지 고작 49.5km라고 한다. 때문에 맑고 청명한 날에는 육안으로 부산이 보인다고 한다. (☞ 완도에서 제주까지 해상거리 약 97km)
섬의 지형이 말처럼 생겼다는 つしま는 일본 나가사끼 현(縣)에 딸려있는 섬으로, 그크기(695.9㎢)가거제도(383.4㎢)의 2배, 울릉도(72.9㎢) 10배, 제주도(1,843.3㎢)의 1/2.5이다.
북, 남 對馬로 나눠진 섬의 85% 이상이 삼림지대를 이루며 4만여 인구가 살고있으며, 한반도와 일본열도인 큐슈(九州) 사이에 위치해 있기에 역사적으로는 대마도는 백제계의 많은 후손들이 거쳐 간 곳이기도 하다.
부산 - 대마도 씨플라워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했던 시기인 BC 220년경부터 시작해, 초(楚)의 항우와 한(漢) 유방 간에 십수년간 혈전을 벌이는 동안에 지옥 같은 전쟁을 피해 빠져나온 한족들이 일본으로 넘어왔고 한반도 삼국통일 과정에서 백제인들이 이주했다는 것에 설득력을 갖는다.
BC 108년 한 무제(武帝, 7대)에 의해 멸망된 위만조선이 한 고조(高祖) 유방이 중원을 통일한 기원전 2세기 초 무렵 중국 연나라에서 망명해온 위만과 유랑민에 의해 세워진 국가라는 설에 기인한다면 일본역시 다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토요일 아침 7시 출발 KTX를 타고 부산역에 9시 40분 도착해 아침식사를 간단히 마친 뒤 국제여객터미널로 향해, 10시 30분 씨플라워 여객선에 올라 부산항을 출항해 북대마를 거쳐 남대마인 ①이즈하라(嚴原) 항에 13시 30분 도착했다.
이즈하라 항
최근에는 쾌속선을 타면 2시간대에 도착한다하니 쯔시마는 정말 가까운 곳이다. 대마도는 섬 대부분이 산이기에 어업에 종사하며 살다보니 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한다. 척박한 섬에서 먹고살기가 힘들다 보니 옛 부터 자연 왜구들이 들 끌었으리라 미뤄 짐작해본다.
저녁나절 이즈하라에는 섬주민이 보이지 않고 간혹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들뿐인데, 섬 전체 관광객의 95%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이즈하라 항에 도착해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조선통신사 홍보입간판]이 보인다.
조선통신사 홍보 입간판
간판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환영하는 듯 『朝鮮通信使の島. 2000年の時空を超えて』 "조선통신사의 섬. 2천년의 시공을 넘어서"라고 적혀있다. 2012년에는 도로변 건물 벽에 [조선통신사 대마역지 빙례(聘礼) 200주년 기념벽화]가 그려지기도 했다.
조선통신사 200주년 기념벽화
최근 한일 간의 분위기 때문에라도 쯔시마에 태극기를 꽂고 올 심정으로 출발했으나 이곳 섬 주민들의 모습은 무척 순박해 보이며 정치적인 것엔 무관심해 보였다. 일본인들이 속내를 잘 안 들어내는 기질이 있긴 하지만 왠지 대마도 주민들은 일 본토 사람보다는 한국인에 더 가까운 듯한 인상을 받기도 했다.
이즈하라 마을 수로
2층 아담한 만송각(萬松閣)을 찾아 여장을 풀고 모텔을 나와 인근 마을을 돌아보며 오후 시내투어에 나섰다. 이즈하라 첫날 투어코스는 [조선통신사 비]와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최익현 선생 순국비]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만송각 인터넷 사이트
좁은 길을 따라 도보로 둘러보는데 항구를 시작으로 약 2시간 정도면 대부분의 여행지를 둘러볼 수 있다. 우리나라인 듯 일본 땅인 쯔시마에는 『조선통신사의 길』이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단절된 국교를 회복시키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요즘은 대마도 북쪽의 [히타카츠 항]과 남쪽의 [이즈하라 항]에 여객선이 닿지만 그 옛날 조선통신사가 대마도에 첫 발을 들인 곳은 북서쪽 해안의 사스나(佐須奈) 항이었다고 한다.
작은 동네 길옆으로는 실용적인 일본인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듯 소형차량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고, 길 가운데 흐르는 수로(水路) 둑에는 조선통신사선 입항과 조선통신사 행렬을 기념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조선통신사선 입항 벽화
[조선통신사선 입항] 벽화 우측 옆에는 『江戶時代(에도시대)の 嚴原港(이즈하라 항)と 朝鮮通信使船入港圖(1811年)』라고 쓰여 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시작되는 조선역사와 관련된 유적들을 찾아가는 발걸음에 더 큰 의미가 담겨져 있는 듯 느껴졌다.
관련 자료에 의하면 조선통신사는 한양을 출발해, 충주-문경-밀양을 거쳐 부산에 도착해 6척의 배에 나눠 타고 대마도 관리의 안내를 받아 출발했다 한다. 통신사 일행은 정사와 부사 및 종사관을 포함해 300~500명으로 이뤄졌다.
조선통신사 행렬 벽화
통신사는 쯔시마를 거쳐 대마도주의 안내로 시모노세키(下關) 항을 통해 일본 본토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여기서 뱃길로 히로시마(廣島)를 거쳐 오사카(大阪)에 도착한 뒤, 육로로 교토(京都)를 거쳐 에도(도쿄)에 이르렀는데, 이동(편도) 기간은 약 10개월~1년 정도였다.
조선 전기에는 일본의 수도인 교토에 쇼군이 있었기에 [교토]가 종점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쇼군이 에도(東京)에 머물렀기 때문에 최종목적지는 [도쿄]가 되었다. 당시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는 한시문의 필담창화(筆談唱和)라는 문화상(文化相)의 교류가 성대했다고 한다.
쯔시마 이즈하라 항에서는 매년 8월에 조선통신사를 소재로 한 『아리랑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강호(えど)시대 때 대마도를 거쳐 간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최대 규모의 축제라고 하는데 8월 첫째 주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에 걸쳐서 열린다고 한다.
쯔시마 아리랑 축제
숙소를 빠져나와 시내에 위치한 대마도의 대표적 신사(神社)인 하치만구(八幡宮) 신사를 찾았다. 이곳은 임진왜란 선봉장수인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후손을 모시는 신사가 있다하여 달갑지 않은 곳이었다.
신사입구
일본은 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신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중 궁(宮)으로 불리는 신사는 격이 높은 신사라고 한다. 신사 경내를 이곳저곳 둘러보는데 일본의 신사는 왠지 심기가 불편한 까닭에 사진 한 장 남긴 뒤 대충 훑어보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