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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05. 2021

베이징 여행(03)

잿빛 컬러 컬러링(16)


북경 삼박사일


▐  만리장성(萬里長城)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①만리장성은 그 길이가 약 5,000km에 이르러 우주에서도 보인다고 하는 유일한 지구 건축물로 인류가 만든 최대의 문화유산이다. ②로마 콜로세움 ②페루 마추픽추 ③이집트 피라미드와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만리장성은 지선(支線)을 제외한 일직선 거리만 2,700km로 동쪽 허베이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에서 시작해 서쪽 간쑤성(甘肅省) 가욕관(嘉峪關)까지 이어져 있다. 베이징 인근에는 거용관(居庸關:60km), 팔달령(八達嶺:68km), 모전욕(募田峪:75km) 만리장성 관문이 3개 있다.


가욕관(서)과 산해관(동)

1999년 다녀온 곳은 [거용관 장성]으로 북경에서 가장 가까운 만리장성이기에 예부터 최후방어선으로 중시된 곳이다. 거용(居庸)이란 명칭은 춘추전국시대 呂氏春秋에 “천하에 9개 요새 중 하나가 거용이다(天下九塞, 庸其一)”라는 기록에서 따왔다고 한다.  


베이징 인근 3대 장성

또한 [거용]은 ‘군사 한명이 능히 지킬 수 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그만큼 가파른 지형의 난공불락 요새라고 한다. 이곳은 케이블카가 없어 걸어 올라가기 때문에 비교적 한가롭게 둘러볼 수 있다.


거용관 장성 관문

2007년 입행 25주년 기념으로 50여명의 동기들과 함께 다녀왔던 만리장성은 [팔달령 장성]으로 성곽 대부분을 개조해 고색창연한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북8망루에 오른 뒤, 북4망루에서 슬라이딩카로 내려오면 쉽게 다녀올 수 있다.


팔달령 장성 입구

이곳은 기구를 타고 수월하게 장성관람이 가능하고 중국관광을 대표하는 관문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관광하는 곳으로 꼽힌다. 따라서 관광객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며 떠밀려 장성을 둘러보는 가장 붐비는 곳이다.


팔달령 장성 인파

[모전욕 장성]은 명나라 초 주원장의 대장군 서달(徐撻)이 북제(北齊) 유적지를 기반으로 건설하였다. 이후 명조 1404년 완공되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증축되었다. 이곳에 보존된 만리장성은 중국 장성유적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구역이라고 한다.  


모전욕 장성

중국역대 왕조들이 북방민족의 침범을 막기 위해 세운 성벽 [만리장성]은 기원전 220년 진(秦)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북방 흉노족 침입에 대비해 방어용 장성을 쌓은 것이고, 절반이상은 춘추전국시대 연(燕)과 조(趙)가 쌓은 통합된 장성을 의미한다.



북방민족 침입을 막기 위한 중국역대 왕조의 만리장성 축조는 부분적으로 건축했던 성벽을 연결하고 증축하여 명대(明代)까지 계속돼 2000여년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만리장성은 중국 거리단위 리(0.5km)로 환산하면 1만리(里) 이기에 만리장성이라 불렸다.



시베리아의 혹한으로 더 이상 북방으로 진출할 수 없었던 유목민족은 남쪽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기후가 온화하고 식량이 풍부한 농경지대로 진출하기 위해 만리장성이라는 관문(關門)을 통과해야만 했다.


따라서 [만리장성]은 외부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막인 동시에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이질적인 문화를 구분하는 경계선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만리장성은 역사적, 전략적으로 장대한 규모의 군사시설물인 동시에 건축학적으로도 세계적인 고대유적으로 남아있다.


거용관 장성 관문(우측)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을 오르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곳으로 꼽는다고 한다. 거용관(居庸關) 장성 정상에 오르니 주변 산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장대한 성곽이 눈에 들어오는데 마치 한 마리 용이 꿈틀거리는 모양새이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이곳 주변은 만리장성을 쌓던 옛사람들이 축성(築城) 공사를 하다가 죽어나간 경우가 많았는데 그로인해 오랜 세월동안 산성을 따라 주변에 인부들이 수없이 묻히다보니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 터로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다른 한편에서 인류역사를 바라볼 때 과연 만리장성이 어느 한순간 철저한 방어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수비성의 역할로 거친 북방민족을 단 한 번도 막아낸 적이 없었던 인류최대의 허장성세(虛張聲勢) 건축물은 아니었는지...



BC 221년 진시황은 중국 최초로 전국을 통일하였다. 내부에서는 더 이상 대적할 세력이 없었던 진시황제였지만 그도 북방의 흉노를 의식해서인지 장성(長城)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은 이 장성을 통해 온전히 안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장성에 올라서서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나 처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마지노 線]을 떠올려 보았다. 오늘날 『유럽의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마지노 요새]는 근세기 프랑스의 슬픈 역사로 남아있다.



최후 방어선이란 뜻의 [Maginot Line]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가 대(對)독일 방어선으로 국경에 구축한 요새선이다. 당시 국방장관 앙드레 마지노(André Maginot)가 건의해 1936년에 완성했으나 독일은 이 방어선을 우회하여 벨기에를 침공한 뒤 프랑스를 공격함으로써 [마지노 선]은 쓸모없게 되었다.



프랑스는 독일을 막기 위해 10년이라는 시간과 엄청난 자금을 투입했음에도 마지노 요새가 본래 목적과는 달리 전쟁을 막지 못하고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함으로써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방어선 마지노는 지금도 [마지노 선]이란 이름만 남아있다.


오늘날 萬里長城은 중국의 자부심이요 세계최고의 관광명소이자 자랑거리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작은 산 하나도 없는 드넓은 북경에서 60km를 달려가, 끝 모를 산세를 타고 뻗어있는 만리장성 계단중턱에 올라 잠시 이러저런 상념에 잠겨보기도 했다.



그 옛날 북방민족들은 마음만 먹으면 중국본토를 공략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겠지만 대군(大軍)이 통과할 길목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만리장성이 마치 도강(渡江) 정도의 장애물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강줄기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해서 무적의 방어선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작전지역을 우회하거나 역(逆)으로 돌파할 방법을 찾아야 했기에  일부나마 만리장성의 방어효과는 확실히 있었을 것이다.



고대 중국은 특정한 방어 거점들이 있었지만 영토자체가 워낙 광대하여 일부 방어선만 뚫으면 허허벌판인 평야지역을 손쉽게 돌파할 수 있었다. 청조(淸朝) 초기에도 당시 만리장성을 넘을 수 있었으나 성벽 돌파 후 보급선을 걱정해 쉽사리 침공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북방 몽골인들은 바람보다 빠른 기동력을 위해 갑옷조차 만들지 않았고 식량으로 말린 고기와 차를 구비해 전쟁에 나서면서, 세계 어느 곳에도 몽골인보다 빠른 전사들이 없었으니 [만리장성]도 그들 앞에서는 무용지물 일 수밖에 없었다.



끝이 없는 성곽이 만들어졌던 노역(勞役)의 역사는 장대한 성을 쌓기 위한 피나는 노력과 수많은 노역자들의 뼈마디 고름으로 이뤄진 오열(嗚咽)이었다. 저 멀리 험준한 산악까지 이어져간 만리장성은 이름 모를 민초들에겐 크나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르고 또 오르는 수백, 수천 년의 역사 속 돌계단 길은 하얀 벽돌에 깔려있는데 사람들의 발길에 닳아서 깎여나간 모습이 보인다. 만리장성은 분명 불가사이 한 성곽을 이루고 있었지만 또 다른 생각에 머무는 동안 하루해가 노을 속에 저물고 있었다.


돌계단 길 벽돌


Extra Shoo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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